세계수 아래에는 시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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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롱뇽
작품등록일 :
2024.10.0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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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0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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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5)

DUMMY

배가 아프다.

카트리야는 근육 하나 없는 한심한 배를 문질렀다. 사람의 어깨에 들쳐 메인다는 건 생각보다 코어 근육이 필요한 활동이었던 모양이다. 콘라드 추기경이 구해준 덕에 오래 가진 않았지만, 내장이 눌린 통증이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사도님은··· 목숨이 위험해져도 도망칠 능력이 없구나···?”

엘피에라는 툭 하니 중얼거렸다. 샐비어가 곱지 않은 눈으로 엘피에라를 흘겨보았다. 그런 당연한 소리 하지 마라, 같은 서늘한 눈빛이었다. 하긴, 그러니 루드비히가 이렇게 싸고도는 것이리라.

콘라드가 납골당으로 가는 문을 열어 주자 카트리야는 납골당 안쪽으로 들어갔다. 엘피에라는 잠깐 숨을 들이마시고 그 뒤를 따라 발을 들였다.

한여름에도 서늘한 석조 건물의 곰팡내 나는 공기는 익숙했다. 빽빽하게 안치된 유골함들을 지나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화장되지 않은 시신들이 보관된 자리가 나온다.

어린 신학생 때 담력 시험을 하던 단골 코스였다. 그리고 아는 사람이 이곳에 안치되면서 장난을 그만두게 되는 곳이기도 했다.

스쳐 가는 유골함에서 익숙한 이름들을 발견하고, 엘피에라는 낮게 숨을 내뱉었다. 천수를 누리고 임종한 스승부터 전장에서 함께 싸운 기사와 사제들까지. 파문당하는 바람에 제대로 명복을 빌어 주지도 못한 사람들의 이름이 눈에 박혔다.

어쩌면 가장 먼저 왔어야 하는 곳이었는데. 생각이 부족했다. 나름대로 신앙심은 유지했다고 생각하지만, 용병으로 지내면서 사제다운 사고방식이 흐려지긴 했다.

엘피에라는 속으로 반성했다.

“···배치는 좀 바뀌었네요?”

“음, 아무래도 유골함을 치우는 속도보다는 늘어나는 속도가 빠르지 않겠냐. 그렇잖아도 납골당 안치 기간을 좀 줄이자는 이야기가 있긴 하다만.”

콘라드가 심드렁하니 대답했다. 진지하게 의논할 문제조차 아니라는 태도였다. 비용 문제는 있지만 유가족에게 제대로 된 조문의 장소를 제공하는 것 또한 대성전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콘라드는 늘 강조했었다.

카트리야는 안쪽의 일반인 시신 안치소로 쏙 들어갔다. 안치소의 입구에까지 단정하게 쌓인 유골함들을 지나 그 뒤를 따랐다.

카트리야는 부패 방지 마법을 걸고 천으로 덮어 놓은 시체들 사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서 그중 한 시체 옆에 섰다. 살그머니 천을 내려서 얼굴을 확인하고 머리 옆에 작은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안녕, 에다 씨. 오늘도 인사 왔습니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인사에 엘피에라는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니까 저게 ‘에다’인 거로군. 사도가 처음 강림한 시체.

인상이 흐릿한 시골 아가씨였다. 반쯤 뜯겨나간 목덜미가 엉성하게 꿰매어져 있다. 대성전의 사제들이 죽었을 때 입히는 수의를 정갈하게 입고 누운 시체의 머리 옆에 새하얀 뱀 인형과 조그마한 꽃다발, 꽃반지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시체가 조문받는 기간은 보통 한 달이지만, 이쪽은 교구 사제들이 종교 재판에 걸려 있어서 아직도 화장되지 못한 채 여기 남아 있다.

샐비어와 콘라드가 성호를 긋고 짧게 기도했다. 사도는 기도는 하지 않고 에다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져 주었다.

바깥은 여름이래요. 딱히 덥진 않던데 여긴 살기 좋은 동네네. 마법도 있어서 다행이죠, 보존이 잘 되어서. 그래도 슬슬 제대로 옮겨주고 싶은데 어렵네요, 무능해서 미안해요.

카트리야는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 내용은 그저 한없이 다정했다. 마치 저 시체가 살아 있을 때 갖지 못한 친구가 되어 주는 것처럼.

엘피에라는 신성력을 끌어올려 에다의 시체를 진단해 보았다. 이쪽은 ‘정상적인 시체’였다. 생전에도 건강이 그리 좋지는 않았는지도 모른다. 한 달 정도 부패한 상태였다는 사도의 판단도 아마 정확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도는 알 수 없었을 다른 것도 눈에 보였다.

엘피에라는 앳된 분위기가 남아 있는 에다의 시신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신이 사도를 시체에 강림시킨 이유가 무엇일까. 각자의 생각들은 있었다. 의심도 있었다. 엘피에라 자신도 어쩌면 신이 언데드를 총애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는가 불안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이 그저 숨이 막혔다.

죽은 다음에야 평온을 찾았을 가엾은 자매님. 당신의 공포와 애원은, 살려달라는 비명은, 그 기도는 우리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그건 신의 귀에만 닿았다.

신께서는 당신의 기도에 이런 식으로 응답해 주신 것일까. 당신이 죽은 후에야. 신의 사도를 통해서.

엘피에라는 천천히 에다의 시신 옆에 무릎을 꿇고 안치대에 팔꿈치를 얹고 고개를 숙여 기도했다.

미안. 제때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당신의 기도를 들어 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신의 아이들이 이렇게 부족해서, 이렇게 무력해서 죄송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지켜 주어야 했는데.

그런데도 당신은 자신의 몸을 신의 사도에게 내어 주셨음에 그저 감사합니다.

나의 자매님.


대성전의 본당은 대체로 열려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들어오지는 않았다. 대성전의 본당이라는 위엄이 있다. 매일 정기 예배를 치를 때가 아니면, 본당에 들어오는 것은 기껏해야 장난을 치는 신학생들이거나 진지하게 기도를 올릴 일이 생긴 신자들 뿐이었다.

루드비히는 본당의 예배석 첫째줄까지 조용히 걸어가서, 그 자리에 걸터앉았다. 본당 한가운데에서 중앙의 제단을 향해 엎드려 있던 엘피에라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파문 철회됐으니까 출입해도 되는 거지.”

“예, 괜찮습니다. 저도 여가 시간에 잠깐 들른 것뿐이라.”

거짓말이다. 콘라드 추기경이 안색을 바꾸고 달려왔다. 엘피에라가 뭔가 상태가 이상하니 지켜보아 달라고. 그 말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루드비히도 성전 본당에 왔다.

신자석에 앉은 게 얼마 만인지 헤아려 보려다가 포기했다.

루드비히는 몸을 숙이고 담담히 물었다.

“신의 사도님은 도저히 마음에 안 들던가요?”

“···내 고해 사제가 법황 성하인 것 같지는 않은데.”

웃음기와 울음기가 한데 섞인 대꾸가 돌아왔다.

그리고 엘피에라는 조금 더 몸을 낮추었다. 차가운 바닥에 이마를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에다라는 그 애 있잖아. ···걔, 신성력 있었더라.”

순간 루드비히는 숨을 삼켰다. 엘피에라는 속삭이듯이 짓씹듯이 내뱉었다.

“파문 사제 중에 신성력 잃은 인간들, 그런 것들 몸에는 신성력이 흔적도 안 남아. 그런데 신성력 못 쓰는 애 중에 몸에 신성력이 남은 애들이 있다? 보통 아슬아슬한 배교자들이야. 알아?”

모른다. 법황이 만날 일은 없고 진단을 할 일은 더더욱 없는 사람들이다. 루드비히는 주먹을 움켜쥔 채 자신에게 등을 돌린 동기를 바라보았다.

엘피에라의 낮은 목소리는 흐느낌처럼도 들렸다.

“어머니가 말이지, 얘들은 내 아이라고 신성력을 나눠 줘. 그런데, 루디. 그런 애의 부모가 파문당한 인간이거나 배교자면 어쩔 것 같아? 자기 애는 신성력이 없다고 현실을 부정하는 거야. 그럼 어떻게 되게? 애가 미쳐. 어릴 때는 부모가 세상 전부잖아. 그런데 자기는 다른 애들하고 다른데, 부모가 넌 다른 애들이랑 다르면 안 된대. 내 아이는 그럴 리가 없대. 그럼 그 애가 어떻게 할까?”

신성력을 부정하겠지. 자신은 신의 아이가 아니라 부모의 아이라고, 당신들이 준 것만을 받은 당신들의 아이이니 제발 사랑해 달라고 매달릴 것이다.

루드비히는 눈을 내리깔았다.

자신이 성전에 가겠다고 했을 때 자기 부모는 뭐라고 했던가. 동생들은 뭐라고 했던가. 화를 내고 짜증도 부렸지만, 그뿐이었다. 막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잘생겨서 괜히 이웃에게서 용돈을 받아 오는 아들은 나름대로 소중했지만, 열 살에 이미 마을 여자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키고 자라나면 귀족의 첩이 될지도 모르는 아들은 골칫덩이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 대신 부담을 져 줄 사람들에게 기꺼이 아들을 넘겨주었다.

“애들이 제 손을 잘라. 어떻게 해서든 다른 애처럼 보이게 맞춰. 알아? 신성력을 타고난 애들 중에 그런 식으로 신성력 버리는 애들, 생각보다 많다? 어머니가 지금 당장 날 구해주지 못하면 그냥 어머니를 버리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애들. 어른 중에도 드물게 신성력 훈련을 받지 않고 자라서 신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면 신성력이 사라지는 사람도 있어. 그래도 몸엔 흔적이 남아. 에다처럼.”

한겨울에 밭에 묻어 두는 구근 같다고, 어느 용병이 웃었었다. 언젠가 봄이 오면, 다시 그 사람의 마음에 신앙심이 강하게 자라나면 피어날 준비를 하는 거냐고. 비유는 좀 그렇지만 크게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실망하고 토라진 아이가 언제든 돌아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렸다. 그 아이에게 다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주기를.

그리고 우리는 에다를, 어머니를 실망시켰다.

“에다가 무사히 성전에 들어왔으면, 제대로 배웠으면, 씨발··· 나보다 신성력이 많았을 지도 몰라. ···걔가, 그 애가 우리 다음 대 법황 후보였어.”

루드비히는 조금 현실감 없는 그 말을 곱씹었다.

법황 후보는 당연히 신앙심과 성품 등등을 고려해서 결정된다. 하지만 보통 10년 정도를 통틀어서 신성력이 가장 뛰어난 사제 정도는 늘 법황 후보로 거론되곤 했다. 루드비히처럼 말도 안 되는 젊은 나이에 법황이 되는 사람 때문에 세대교체가 중단되는 게 아니면, 신학교 기준으로 5년이나 10년에 한 번은 법황이 나오니까. 신앙심 강한 사제가 신성력이 약하긴 하지만, 신성력이 강한 사제가 신앙심이 약할 수는 없었다.

엘피에라는 죽은 에다가 그런 인재였다고 판단했다. 아마 틀림없을 것이다. 남의 상태를 파악하는 데 유난히 특화된 신성력이다.

루드비히는 소리없이 성호를 긋고 기도를 올렸다.

어머니의 큰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늘 말하지만, 이럴 때마다 정말로 많은 것을 놓쳤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께서는 아주 신중하게 사도가 깃들 몸을 고르셨다. 신성력이 풍부한 토양에 다른 세상의 부서진 영혼으로 세계수의 씨앗을 감싸서, 썩어가는 몸에 넣어, 부패한 교구에 내려 보내고, 한 번의 위기를 넘기게 해 주셨다.

너희가 지금 무엇을 놓쳤는지 보라고, 다정한 어머니가 엄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드님. 어머니께서는 그 다음에도 아끼는 딸을 보내 주셨는데, 우리 인간들이 그 아이를 죽였어. 사도님이 언데드에 강림한 것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겠지만, 그전에 우리가, 사도님이 강림할 그릇을 시체로 만든 거야. 우리가 문제였어.”

엘피에라가 피를 토하듯이 속삭였다.

가엾은 에다. 불쌍하고 모자란 아이. 신의 사도를 몸에 깃들이기 전에는 그저, 자신을 길러준 마을 사람들에게 착취당하기만 하던 애처로운 소녀. 살려달라고, 구해달라고 계속 울고 비명을 질렀을 텐데 누구도 구해 주지 않았다.

삶이라는 거대한 시련 앞에 아이의 신앙심이 메마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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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23. 울지 않는 아이 (2) +2 25.01.27 18 4 11쪽
85 23. 울지 않는 아이 (1) +2 25.01.26 22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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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5) +2 25.01.05 27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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