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수 아래에는 시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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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롱뇽
작품등록일 :
2024.10.0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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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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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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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3)

DUMMY

반사적으로 허리에 찬 단검을 뽑으려는 순간 그 팔이 붙잡히고, 창문 옆 기둥에 등이 부딪쳤다. 목 아래에 날이 시퍼렇게 선 단검이 들어왔다.

푸른 눈에 어렸던 살기가 단번에 귀찮음으로 바뀌었다.

“문으로 다니라고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엘피에라는 루드비히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법황의 침실이다. 그런데 바닥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의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피비린내는 그쪽에서 났다. 남자의 복면을 벗긴 에드윈이 얼굴을 더듬어 보고 있었다.

“야, 이거 가면 아닌데? 진짜냐?”

“마법 같은데요. 어디 아티팩트 있겠죠.”

“일단 치우고 확인하겠습니다, 대장.”

경호대원들이 속삭이면서 방수포로 시체들을 감쌌다. 그 옆에서 알베르토가 팔짱을 끼고 남자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바닥에 피 좀 흘리지 맙시다, 여러분. 싸울 때야 어쩔 수 없다 쳐도 뒤처리 때는 좀. 매번 카페트 교체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압니까? 이거 어디에 청구할 수도 없고 진짜.”

“아니, 그러게 카페트 걷고 그냥 돌바닥 하자니까요, 주교님. 우리도 빨래 생각하면서 싸우기는 힘들다고.”

에드윈이 부하들 대신 대꾸했다. 알베르토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돌바닥에 뼈를 갖다 박는 건 다들 괜찮으시다고요? 그렇다는데요, 성하. 카페트 치워도 되겠습니까?”

루드비히는 살짝 한숨을 내쉬고 흐트러진 머리를 풀어서 다시 묶었다. 깨끗한 수건을 엘피에라에게 던지고는, 다른 수건으로 검날에 묻은 피를 쓱 닦아냈다.

멍하니 수건으로 목을 닦아낸 뒤에야 엘피에라는 자신의 목에도 피가 옮겨 묻은 걸 깨달았다.

“빨기 쉬운 깔개로 바꾸지요. 방수포 깔고 그 위에 담요를 덮으면 대충 카페트처럼 보일 겁니다. 관리도 편해지고.”

“미끄러워서 위험할 것 같은데요···.”

알베르토는 루드비히의 의견이 제법 괜찮게 들렸는지 잠깐 고민하다가, 엘피에라를 보고 흠칫했다. 허리에 손을 얹고 눈을 뾰족하게 뜬다.

“엘피에라! 아무리 성하를 몰래 만날 필요가 있다고 해도 그게 한밤중에 침실 창문으로 숨어들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최소 반나절 전에는 방문 의사를 밝히고, 시간 잡아서 문으로 들어오세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 무슨 추문이 생길 줄 알고 창문으로 다닙니까? 그리고 침입자 같은 복장도···”

“저거 암살자야, 선배?”

엘피에라가 경호대가 들고 나가는 시체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걸 꼭 들어야 아냐는 표정이 대답이었다.

엘피에라는 피를 닦아낸 수건을 힘껏 움켜쥐었다.

“법황한테, 암살자가 와?”

“법황한테 귀족이 암살자 보내는 건 전대 사도님 시절부터 오랜 전통이라더군요. 선법황 성하도 여러 번 당하셨다고 하고. 저야 잘 안 당하니까 오기로 더 열심히 보내는 거 아니겠습니까.”

루드비히는 태연히 대꾸하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알베르토가 그렇죠 그렇죠 하고 옆에서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당하시면 안 되지요, 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경호대원들은 다른 명령 없이도 벽에 튄 피까지 대강 정리한 다음 삭삭삭 모습을 감추었다. 에드윈은 부하들이 들키지 않고 나가는 것을 확인한 다음 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런 모습들이 지나치게 익숙했다. 암살자가 찾아오는 것이 일상다반사라는 듯이.

“자주, 온다고?”

엘피에라의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알베르토는 어깨를 움츠렸다.

“뭐··· 요즘은 좀 줄어서 보름에 한 번 정도?”

그게 줄은 거라고?

“자기들끼리 겹치는 일도 없고, 확실히 줄었지.”

“암살자는 비싸니까요. 돈이 좀 떨어졌나 봅니다.”

하하하. 남자들은 태평하게 웃었다. 엘피에라 혼자 화가 치밀어 이를 악물었다.

“···어느 썩을 새끼가 감히 여신의 아들을···!!”

“조만간 땅속에서 썩을 새끼, 겠지요. 이번엔··· 에드윈?”

루드비히의 질문에 에드윈은 무기를 정리하며 대답했다.

“위장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뭐, 아마 밀포드 백작가 아니겠습니까. 마법사를 잃은 건 타격이 클 텐데 안됐네요.”

밀포드 백작가. 분노로 눈이 새빨개진 엘피에라는 머릿속에서 귀족 명부를 휘리릭 넘겼다.

“그 새끼들이 왜? 자기네 큰아들이 전쟁 때 항명죄로 처형당해서? 그러고도 법후 되겠다고 설치는 셋째딸이 번번이 거절당해서? 작년에 고향 대교구에 불량 방수포 납품하려다 걸려서 사업 몰수당해서? 아니면 걔네가 요즘 성도에 만든 어린이집 적자 나서 원한이라도 쌓였대냐?! 아니 그건 대성전 어린이집 있는 거 뻔히 알면서 귀족 어린이집 만든 자기들이 멍청한 거지!”

루드비히는 오늘도 무사히 습격에서 살아남은 물병에서 물을 따라 마시려던 것을 멈추고 엘피에라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역시 잘 안다. 그리고···.

···모아놓고 보니 암살자가 와도 딱히 놀랍지 않은 것 같다. 다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였는데 왜 백작가에 좀 미안하다는 기분이 드는 것일까.

옆에서 알베르토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듣고 보니 많네요. 백작하고 별로 좋은 인연이 아니군요.”

“지금 그딴··· 그딴 이유로 법황한테 암살자를 보낸다고?! 미친 귀족 새끼들이?!!”

뭐 다른 곳은 다른 이유고. 에드윈이 궁시렁거렸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물을 마신 루드비히는 잔을 협탁에 내려놓았다.

“그럼, 500명을 전쟁터에 끌고 가서 죄다 죽거나 사람 구실 못하게 만들어 놓고 본인만 멀쩡하게 돌아와서 법황이 됐는데, 다들 그게 신의 뜻이라고 인정하고 떠받들어 줄 줄 알았습니까?”

루드비히의 목소리엔 웃음기마저 담겨 있었다. 엘피에라는 그 뒤통수를 노려보며 내뱉었다.

“전원 자원했어! 우리가 애냐? 누가 잘해줄 테니 가자고 하면 생각 없이 따라가는 멍청이였겠냐고?!”

“이런 곳일 줄 몰랐다, 속았다. 그런 말 하던 게 어디 한둘이던가요? 그 사람들의 가족, 연인, 친구, 기타 등등까지 합치면, 뭐, 원한이야 많이 쌓았지요. 겁에 질린 사람들의 맨얼굴이야 저보다 엘피에라 경이 훨씬 더 많이 봤을 텐데요.”

그랬다.

순결 서약까지는 어기고 싶지 않다며 그냥 자기하고 잤다고 말만 해 달라고 빌던 사제들. 겁쟁이들하고만 자면 재미없지 않냐며 추근거리던 기사들을 몇이나 날려 버렸던가.

잠결에 엄마를 부르며 흐느껴 울던 사람도 있었다. 죽어가는 동료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남아서 치료할 용기가 없었다고 목놓아 울던 사람도 있었다. 견디다 못해 제 손목을 긋고 목을 매어 시체로 발견된 사람도 여럿 있었다.

저 루드비히조차 피투성이가 된 채 막사에 숨어 비명 같은 기도를 올린 적이 있었다. 이들을 전장으로 이끈 건 자신이니 제발, 제발 누군가를 거두셔야 한다면 자신을 먼저 거두어 달라고. 더이상은 내 형제자매들의 눈을 감기고 싶지 않다고, 제 잘못이라면 차라리 제가 가장 먼저 벌을 치르게 해 달라고, 피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던 때가 있었다.

그 와중에 침대를 덮친 자신을 밀어내는 것을 보고서 위태롭다고 생각했었다. 이 녀석은 이제 자신이 무너지는 것조차 용서하지 않는구나, 하고.

그래서 세계수의 기적이 내렸다고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이제 루드비히는 괜찮겠구나.’였다. 법황까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질투 비슷한 것이 생기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안도했다.

괜찮다. 신도 인간도 루드비히를 인정해 주었다. 그러니까 이제 피 흘리며 울던 그 친구는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밤중에 고작 암살자 따위나 상대하고 있었단 말인가. 전투 사제단이 없었으면 언데드가 대륙 전체를 휩쓸었을지도 모르는데, 루드비히가 모두를 구했는데. 이 세상을 구한 젊은 영웅으로 칭송과 존경만 받아도 모자랄 판에.

전쟁이 끝났다고 자신이 태평하게 세계를 구경하고 있을 때, 파문당했다는 것에 속을 끓이면서도 자신들이 지켜낸 세상을 만끽하고 있을 때, 정작 이 친구는 대성전에서 사람들의 눈먼 원한과 분노를 상대하며 계속 전쟁을 치르고 있었단 말인가.

혼자서. 이 어둠 속에서.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치밀었다.

엘피에라는 루드비히를 거칠게 돌려 세워 멱살을 움켜쥐었다. 루드비히는 별 저항 없이 벽에 밀쳐져 주었다. 붙잡으려던 에드윈이 쯧, 혀를 차고 다시 벽에 기대어 섰다.

멱살을 잡아 흔드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너, 너···! 너··· 너, 이러고 살았어? 내가 없는 동안, 너 이렇게 살고 있었어?!!”

어휘력이 갑자기 사라진 것 같았다. 그저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이렇게 살았냐고 몇 번이나 반복하면서 루드비히의 몸을 흔들었다. 암살자들의 피가 튄 가슴팍을 몇 번이고 움켜쥐었다.

푸른 눈은 그저 차분하게 엘피에라를 마주 볼 뿐이었다. 그 눈빛에서 대답을 읽고 엘피에라는 속으로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어째서. 모두 다 잘 풀렸는데, 그 누구도 꿈꾸지 못한 최고의 결과가 나왔는데, 그래서 인간은 승리하고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돌아왔는데. 그 모든 것이 어머니의 뜻이었다고 지금도 믿어 의심치 않는데.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된단 말인가.

모두가 그 전쟁을 겪고 모두가 그곳에서 누가 어떻게 싸웠는지를 보았는데. 그런데 고작 몇 년 만에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들을 해대고 있단 말인가.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지 왜 모른단 말인가.

진실도 거짓도, 당연한 것과 당연하지 않은 것도 전부 제멋대로 뒤섞이는 기분이었다.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곤 어머니 하나뿐인데, 저 조그마한 사도가 그것마저 제멋대로 뒤엎고 있는데. 루드비히 너마저도.

엘피에라는 결국 힘이 빠져서 멱살을 흔드는 것을 멈추었다.

차분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러니 알베르토 사제 말 들으세요. 밤에 찾아올 거면 미리 연락하고 문으로 제대로 들어오도록. 암살자로 오해받으면 어쩔 셈입니까.”

엘피에라는 입을 떼지 못했다.

잠시 기다렸다가 루드비히는 농담조로 덧붙였다.

“대성전의 비밀을 하나 더 알게 된 걸 축하합니다.”

이번에도 엘피에라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루드비히는 조금 난처해져서 한숨을 내쉬었다. 엘피에라가 기운이 없어지면 어떻게 달래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일단 엘피에라의 손을 다독여서 풀어내고, 돌려세워서 빈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찬물을 새 컵에 따라서 손에 쥐여 주었다.

엘피에라가 떨어뜨린 인형을 발견한 건 그때였다.

낡은 회색 천으로 서투르게 만든 봉제 인형은 하얀 털실로 된 머리를 산발하고, 삐뚤빼뚤한 이목구비로 웃고 있었다. 누더기 원피스는 잘 보니 원래 흰색인데 때가 타서 색이 변한 것 같았다.

알베르토가 다가와서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거 혹시 성하···?”

루드비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인형을 보다가 벽난로로 다가갔다. 벽난로 위쪽, 지난번에 사도가 가져다준 과녁 게임의 해괴한 그림 옆에 인형을 앉혀 놓고 한발 물러서서 살펴보았다.

“혹시 세간에선··· 머리가 하얀 인간은 일단 저라는 법칙이라도 생긴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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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24. 영혼이 가는 곳 (3) +2 25.02.05 20 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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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23. 울지 않는 아이 (2) +2 25.01.27 18 4 11쪽
85 23. 울지 않는 아이 (1) +2 25.01.26 22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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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2) +2 25.01.20 24 4 11쪽
81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1) +1 25.01.19 21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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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3) +2 25.01.10 29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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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1) +1 25.01.06 26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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