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4)

“음, 일단 은발을 표현하기 힘드니까 흰색으로 대체한 거겠··· 지요···?”
알베르토도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의도는 알겠는데 결과가··· 이번에도 좀 그렇다. 사도가 가져온 그림과 인형을 번갈아 보았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만 그나마 애정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인형이 쥐꼬리만큼 낫다.
“엄청 창의적··· 아니, 근데 이 그림도 성하였습니까? 난 성하가 무슨 괴물 그림 찾는 취미가 생겼나 했지?”
“···사도님 선물입니다. 무슨 게임 상품이었다고···.”
푸하하하. 에드윈은 배를 잡고 웃었다.
루드비히는 에드윈의 등을 가볍게 치고, 둘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래봤자 침실이라서 의자가 넉넉하지 않았다. 알베르토가 엘피에라 맞은편의 의자에 앉고, 에드윈은 그 옆의 협탁에 대충 걸터앉았다.
루드비히는 침대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잠깐 딴청을 피우는 사이 엘피에라는 진정한 상태였다. 호흡은 살짝 떨리지만 눈물기는 없었다.
“그래서, 용건은요?”
루드비히의 부드러운 질문에 엘피에라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가벼운 마음으로 수다도 떨 겸 찾아왔던 게 전부 엉망이 되었지만, 전할 말은 있었다.
“그. 은퇴한 음유시인을 찾았, 어. 에다 씨를 만난 적 있는 것 같은.”
차마 존댓말은 나오지 않았다.
“벌써? 역시 용병들은 정보가 빠르군요.”
알베르토가 반색했다. 엘피에라는 기억을 되살리며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확인은 해 봐야 하는데, 에다 씨네 마을 근처를 자주 다니던 사람이고, 몇 번 불쌍한 여자애 이야기를 한 적이 있대. 머리가 모자란 애가 후견인을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 교구 사제가 교구민을 구호하지 않는 사유가 뭐가 있을까, 증거 없이 범죄를 고발하면 죄가 되느냐, 그런 걸 술김에 상담했다는 것 같아. 은퇴도 겨우 작년 말이라고 하니까.”
매우 희망적이다. 대성전에서 추적 중인 음유시인은 다 현역이었다. 은퇴한 음유시인까지는 손이 미치지 않았는데, 저쪽이 증인으로서는 더 좋을 것 같기도 하다.
루드비히는 턱을 쓸어내렸다.
“본인 이야기를 꼭 들어보고 싶군요. 적어도 그 마을을 오가던 행상인들 정도는 파악하고 있겠지요.”
“행상인들은, 용병들 의견으로는 증인 채택 어려울 거라던데. 그쪽은 정해진 루트대로 행상을 도는 경우가 많아서 중간 마을 하나에 밉보이면 여정이 틀어지면서 그대로 장사를 접어야 할 수도 있다고.”
“비공개 증인으로 보호하지요. 마을 하나에 밉보이는 게 교단 전체에 밉보이는 것보단 나으실 테니.”
“···신의 사도에겐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지?”
그럼 없겠냐.
목까지 치밀어오르는 질문을 삼키고, 루드비히는 엘피에라를 올려다보았다. 법황에게 암살자가 오는 게 어지간히 큰 충격이었는지 표정이 엉망이다. 지금이야 기분이 복잡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신앙심이 강한 친구였다. 신의 사도가 불신자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잘 모셔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걸까.
“사도님은, 도저히 마음에 안 들던가요?”
두 번째로 질문해 보았다.
엘피에라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숙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사도님이 성도에 기증받은 저택, 내가 관리한다고 되어 있는 거 알지.”
외출할 때마다 종종 대는 핑계였다. 저택 내장을 바꾼다 경호를 세운다 하면서 사방팔방 헤집고 다녀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덤으로 빈 저택을 접선 장소로 이용하기도 편했다.
“웬 남자가, 사도님을 만나고 싶다고 찾아온 거야. 당연히 안 된다고 했는데, 그럼 사도님한테 편지를 전해 달라는 거지. 성전으로 보내랬는데 굳이 나한테 주고 가더라고? 궁금해서 뜯어 봤지.”
“뜯···?!”
루드비히와 알베르토가 나란히 입을 벌렸다. 받아본 것도 아니고 뜯어 봤다고?
엘피에라는 두 사람의 경악을 무시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품에서 얇은 편지 봉투를 꺼냈다.
“[노트르담은 평안합니까]래. 어떻게 생각해?”
···무슨 암호인가?
기왕 엎질러진 물은 어쩔 수 없다. 루드비히는 엘피에라에게서 봉투를 받아 편지지를 꺼내 보았다. 내용은 진짜 그 한 문장뿐이었다.
알베르토가 받아서 편지지와 봉투를 등불에 비춰 보고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다른 메시지는 없었다. 약간 고급스러운 편지지에 교육받은 사람이 정갈한 필체로 적은 단 한마디. 그게 전부였다. 봉인한 밀랍도 별다른 특징은 없어 보였다.
“노트르담은··· 사람 이름인가? 누구지?”
“지명··· 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루드비히가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입에 걸리는 발음인데, 어째선지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느낌이 드는 단어였다. 노트르담. 노트르담. 어디서 들어봤을까.
“우리 세계에 이런 지명은 없지 않아? 적어도 이 근처에는.”
엘피에라가 지적했다. 에드윈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사도님 세계 지명이라고?”
“사도님은 바깥에서 사람 만나는 일 없다며. 그럼 이건 대체 뭘까. 너희가 파악 못 한 사도님의 인맥이 이 세계에 있는 모양인데.”
수상하지 않냐고, 엘피에라의 얼굴이 말하고 있었다.
그 사람한테 그런 게 있을까?
루드비히는 활동량이 극히 적은 카트리야의 행적을 떠올렸다. 직공소에서 누군가를 만났을 가능성은 없지 않지만, 사도와 자신들 몰래 접촉한 누군가가 있었다면 두 번째 접촉도 같은 루트를 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이건 사도와 만나지 못한 사람의 첫 연락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사도를 실제로 만날 방법은 없고, 엘피에라가 누군지도 잘 모르는 성전 바깥사람.
잠시 고민하던 루드비히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올 문제다.
“본인에게 직접 물어 보지요.”
“미리 조사하지 않고?”
엘피에라는 지체 없이 되물었다. 사도에 대한 경계심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불신자인 걸 몰랐을 때가 오히려 더 사근사근했다.
루드비히는 속으로 한숨을 삭이면서 무덤덤하니 대꾸했다.
“편지를 뜯을 때 반응을 보고 판단합시다. 조사를 할 단서가 필요합니다. 일단은 음유시인 쪽에 집중하지요. 에드윈에게 인적 사항을 알려주면 이쪽이 확인하겠습니다.”
자, 오늘은 이걸로 해산, 하고 루드비히는 소리 없이 손뼉을 쳤다. 에드윈이 한 번 더 주위를 돌고 오겠다고 나가고, 알베르토도 편지를 돌려주고는 옆방으로 물러갔다.
루드비히는 편지를 품에 넣고도 미적거리는 엘피에라를 돌아보았다.
“할 말 남았습니까?”
“여기서도 법황 말투 쓰는 거, 갑갑하지 않아?”
“대성전 안에서는 노력 중입니다. 바깥이면 모를까 안에서는 듣는 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흔들림 없이 미소 짓는 얼굴을 보고 엘피에라는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그리고 한발짝 더 다가서서 루드비히를 코앞에서 올려다보았다.
“루디. 루드비히. 너, 행복해?”
루드비히는 낮게 웃었다.
“예, 그런 셈이군요.”
“···진짜로?”
“거짓말하면 알아보잖습니까. 전 괜찮습니다.”
골치 아픈 문제는 널려 있고 할 일은 많고 짜증 나는 일도 종종 생기지만 그 어느 때도 혼자는 아니다. 잃은 친구는 있으되 죽은 친구는 없다. 가끔 기분이 처지는 날도 있긴 하지만, 때로는 분노가 치밀 때도 있기는 하지만, 그만큼 보람찬 날도 평화로운 날도 즐거운 날도 있었다. 사도가 강림하고 엘피에라까지 돌아오면서 친구도 늘어난 기분이다.
“모든 게 완벽하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것은 어머니께서 제게 내려주신 선물일 테고, 어떤 것은 시련이겠지요. 그렇지만, 예, 기대했던 것과 좀 다른 상황이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루드비히도 저 녹색 눈에 담긴 감정을 알고 있었다.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손끝으로 가볍게 툭 쳤다.
“저쪽도 진심으로 절 죽이려면 이 정도 암살자를 보내진 않습니다. 그냥 자기들 말 좀 들으라는 경고 수준이지요. 크게 염려할 것 없습니다. 모든 것이 어머니의 뜻대로 다 잘 될 겁니다. 그렇지요?”
그런가?
엘피에라는 숙소로 돌아오면서 그 말을 곱씹었다.
모든 것은 어머니의 뜻대로 될 것이다.
하지만 ‘잘’ 될까? 그건 알 수 없다. 우리의 ‘잘’과 어머니의 ‘잘’은 기준이 다르다. 그것도 모를 정도로 순진한 시절은 오래전에 지나갔다. 어머니께서 무언가 큰 뜻이 있으셔서 루드비히의 피를 원하는 지도 모른다.
그래도.
‘절망하지 말라. 의심하지 말라. 오직 어머니의 뜻을 믿고 따르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가르침을 엘피에라는 되새겨 보았다.
그 가르침이 나를 배신한 적이 있었던가? 없다. 내가 그 가르침을 배신한 적은 있었지만.
그분이 가리키는 앞에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있다. 망설이지도 헤매지도 말고 어머니의 말씀을 길잡이 삼아 나아가다 보면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미소 지어 주실 것이다.
자비로운 어머니께서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긴 밤이 지나면 해가 뜨고, 비가 쏟아진 뒤에는 무지개가 뜬다. 혹독한 겨울 끝에는 봄이 찾아 온다. 그렇게 절망 뒤엔 희망이 올 것이다.
엘피에라는 동이 틀 때까지 기도했다.
그러니 어머니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 뜻을 저버리지 않을 강인함을 주시기를. 이번엔 제가 어머니를, 그리고 루드비히를 실망시키지 않게,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게 해 주시기를.
제 친구들을 지켜낼 용기를 주시기를.
카트리야는 앞장선 엘피에라의 머리카락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금발이었던 머리가 흑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원래 색이라고 한다. 금발보다 훨씬 잘 어울려서, 옛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왔던 여주인공을 연상시켰다.
“오셨습니까, 사도님.”
루드비히와 알베르토, 에드윈, 셋이 정자에서 차를 마시며 서류를 보다가 일어섰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엘피에라가 품에서 편지를 꺼내 카트리야 앞에 내려놓았다.
“어제 어떤 평민이 사도님께 전해 드리라고 했던 편지입니다.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알베르토에게 편지 칼을 받아 봉투를 찢으려던 카트리야는 멈칫했다.
봉인 가장자리의 종이가 미세하게 일어나서 종이 섬유가 몇 가닥 붙어 있었다. 칼끝으로 봉인을 슬쩍 들어 보니 봉투가 딸려 올라왔다. 누가 봉인을 열어본 다음 다시 닫은 거다.
눈을 들어 보니 모두가 편지를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불쾌하다. 시험당하는 기분이었다.
당신들마저.
봉인을 뜯고 편지지를 꺼내는 짧은 사이에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노트르담은 평안합니까?]
편지조차 헛소리였다. 카트리야는 저도 모르게 이죽거렸다.
“불 나서 무너지는 바람에 새로 지었습니다. 평안은 무슨.”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카트리야는 오랜만에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편지지를 다시 읽어 보았다.
노트르담이라고? 그 ‘노트르담’?!
“아는 분입니까?”
루드비히의 건조한 질문에 카트리야는 엘피에라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아는 사람이던가요?!”
엘피에라는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얼굴로 대답했다.
당황하면 제발 입을 다물자.
카트리야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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