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불행의 편지 (1)

“그렇죠, 제가 아는 사람일 리가···. 그럼··· 노트르담을 아는 사람···.”
카트리야는 고민했다.
전대 사도가 알았겠지. 그럼 대성전 관계자? 아니, 전대 사도의 수기는 법황만 열람이 가능하다고 했으니 추기경들처럼 직접 알고 지낸···.
···추기경···. ······혹시 그건가?
카트리야는 엘피에라를 올려다보았다.
“이 편지를 준 사람, 다른 말은 없던가요?”
“그냥 전해 주라고만 들었습니다.”
“사도님? 혹시 아시는 분일까요?”
루드비히가 다시 질문했다. 카트리야도 그 대답이 궁금했다. 어쩌면 알 만한 사이인지도 모른다. 만약 지금 떠오른 생각이 맞는다면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것이고.
카트리야는 루드비히의 팔을 잡았다.
“성하, 저하고 좀···.”
-그렇게까지 할 일 아닌 것 같은데요. 하려면 선생님 혼자 하시든가요.
갑자기 들려온 부루퉁한 목소리에 순간 몸이 굳었다.
카트리야는 일어서려다 말고 무심코 손을 들어 한쪽 귀를 눌렀다.
예전처럼 조금씩 일을 하다 보니 흐려져 가던 전생의 기억이 또다시 쳐들어올 때가 있었다. 환청은 아니지만, 전생에 들은, 어쩌면 들었다고 생각하는 말을 그 사람들이 귓가에 속삭이곤 했다. 지금처럼.
끈질기게 따라온 전생의 그림자는 사라지는 것 같다가도 조금만 방심하면 도로 이렇게 엉겨 붙는다.
귀를 누른 채 카트리야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이렇게까지 할 일이 아닌가? 별거 아닌데 내가 호들갑 피우는 거 아닐까?
···그런지도 모른다.
카트리야는 천천히 루드비히의 팔을 놓았다. 주섬주섬 편지지를 접어서 봉투에 챙겼다. 불길한 저주처럼 보이는 글씨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자 조금 호흡이 편해졌다.
잠시 호흡을 멈추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수상해 보일 건 아는데 도저히 눈을 들 수가 없었다. 지금 굉장히 이상한 얼굴이 되어 있을 것 같다.
“어, 그··· 제가,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아는 사람은 아닌데, 관계자일 수도 있으니까···.”
“사도님?”
“음, 오늘은 제가 좀 다녀보고, 정리되면, 아니지, 필요하면 추기경 예하들이 연락을 드릴 거거든요? 아마 별로 중요한 건 아닐 것 같은데···.”
카트리야가 일어서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루드비히가 카트리야의 팔을 살짝 손으로 막았다. 손을 대지도 않고 그저 팔 위쪽에 손을 내밀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의사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 손을 무시하지 못하고 카트리야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루드비히는 늘 그렇듯 사근사근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
“왜 갑자기 놀라신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진정하실까요.”
놀란 것처럼 보이는 걸까.
카트리야는 무심코 귓가의 잔머리를 넘겼다. 손끝이 조금 떨리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편지 때문이 아니라 갑자기 떠오른 그 지긋지긋한 목소리 때문일 거다.
편지는···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을 거다. 아마. 여기 사람들은 전문가일 테니까.
“혹시 협박··· 같은 걸 받고 계신 건 아니지요?”
루드비히는 조심스럽게 확인하면서 찻잔을 밀어주었다.
진정. 진정하자.
카트리야는 찻잔을 들어 따뜻한 차를 마셨다. 언제부턴가 카트리야에게 내 주는 홍차는 다른 사람들이 마시는 것보다 조금 식어 있었다. 뜨거운 것을 잘 못 먹어서 늘 한 김을 식혀 먹는 것조차도 눈치채는 사람들이다. 어설픈 거짓말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루드비히는 듣기 좋은 목소리로 차분히 설명했다.
“사실은 저희가 사도님을 시험했습니다. 보신 편지, 원래 봉인을 뜯어서 내용을 한번 확인했거든요.”
아. 자백해 주는 건가.
당황해서 잊고 있었던 상처가 조금 아물었다.
“위험을 거르느라 정해져 있는 절차이고 내용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긴 했습니다만, 사도님의 사생활을 침해한 점에 대해서는 늦게나마 사과드리겠습니다.”
엘피에라가 움찔하고는 루드비히를 묘한 눈길로 노려보았다. 루드비히가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신호가 오간 건지 잘 모르겠다.
카트리야는 루드비히가 자신에게 한 말에 집중하며 천천히 말을 골랐다.
“편지를 뜯어보시는 건, 상관없어요. ···그렇지만 뜯어본 걸 안 뜯은 척하면서 제 반응을 보시려는 건, 조금··· 불쾌해요.”
“그것도 사과드립니다. 저희도 이렇게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고 사도님께 접근하는 사람은 처음 보다 보니 조금 당황해서요. 혹시 사도님께서 저희에게 숨기는 어떤 불편한 일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렇게 당황하실 줄 알았다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실 시간을 드렸을 것을요.”
진심처럼 들리는 사과이긴 했다. 하지만 여전히 약간의 앙금은 남아 있었다. 입으로만 친절한 사람에게 속아 넘어가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긴 한다.
···그렇지만 루드비히에게는 한두 번쯤 속아줄 정도의 빚이 있다. 아무튼 의식주를 돌봐 주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카트리야는 편지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협박장.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협박의 대상이 루드비히일 뿐이지.
정작 위협을 받은 본인은 눈치를 못 채고 카트리야를 어린아이 어르듯이 달래고 있었다.
“전에 말씀드렸지요? 사도님이 이 대성전에서 하지 못하실 일은 없다고요. 그러니 내키지 않으시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만···. 혹시 저희가 조력할 만한 일이 있는 건이라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저희가 사도님을 제대로 보호하려면 사도님의 상황도 어느 정도 알아야 하니까요.”
그 상황 파악이 안 되어서 말을 못하는 거다.
카트리야는 자신의 생각을 열심히 곱씹어 보았다. 가능성이 없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아는 게 없어서 자신이 없다. 호들갑 같아도 역시 물어봐야 하는 게 아닐까?
대답이 없는 것을 다르게 이해했는지 루드비히는 농담을 덧붙였다.
“혹시 법황 암살단을 조직해서 제 목숨을 노리는 중이시면, 다소 돕기 난처하긴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제가 만들진 않았는데요!”
카트리야는 반사적으로 변명했다. 그리고 모두의 얼굴을 보고 뒤늦게 깨달았다. 좀 더 입을 다물고 있었어야 했다.
<황금 거위>였던가?
카트리야는 어두운 회의실에 앉아 멍하니 생각했다.
어떤 청년이 황금 거위를 손에 넣었는데 여관집 딸이 거위를 훔치려고 손을 대자 달라붙고, 그 언니가 동생을 떼려고 잡아당기자 달라붙고. 줄줄이 붙은 사람들을 보고 웃지 않는 공주님이 웃음을 터뜨려서 해피엔딩.
힐끗 눈을 돌려 보았다.
상석에 앉은 루드비히는 살벌하게 웃고 있었다. 좀비일 때 목을 뜯으려다 걸린 뒤로 저렇게 삐딱한 상태는 처음 본다. 별로 웃음을 터뜨릴 것 같지는 않다.
아니지. 수상한 편지를 엘피에라가 줍고 그걸 루드비히가 받고 내가 받고 콘라드 예하가 받고 했으니 루드비히도 바보들의 행렬에 끼어 있을 거다.
그럼 누가 웃어야 풀려나는 거지?
슬그머니 눈을 굴려 보았다. 옆에 앉은 엘피에라도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뒤쪽으로 검은 후드 달린 망토와 가면으로 온몸을 가린 불길한 사제들이 벽을 따라 줄줄이 서 있었다. 방음이 잘 된 회의실 안에 모인 사람이 서른 명은 넘는 것 같은데 얼굴을 드러낸 건 비브리다와 콘라드, 루드비히와 엘피에라, 카트리야, 딱 다섯이었다.
루드비히가 테이블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즉위하고 처음이군요. 이단 심문관 회의를 소집한 건.”
“저희도 소집된 건 실로 오랜만입니다, 성하. 다행이군요, 사도님이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할만한 분이셔서.”
비브리다 추기경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부끄럽습니다만 이 미욱한 신의 종은 아직도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비브리다 예하. 부디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루드비히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했지만, 평소보다 조금 날이 서 있었다.
당연하다. 사도에게 수상한 사람이 접근해서 확인하려고 했을 뿐인데 돌고 돌아서 갑자기 몇십 년만의 이단 심문관 회의 소집 요청이 들어왔다.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루드비히도 이단 심문관들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마지막 이단 심판은 약 35년 전이었고, 그 뒤 이단 심문소는 해체했다. 비브리다 추기경이 마지막 심문관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각각 비밀리에 후계자를 뽑아 자기 자리를 전수했다고 한다.
언젠가 이단 심문이 다시 시작될 때 법황이 이단 심문관 회의를 소집하면 각 후계자가 모인다. 안건을 들은 다음 이단 심문관이 될지 말지 판단한다. 심문관이 되려는 자들은 법황에게 신분을 밝히고, 심문관을 포기하는 자는 비브리다에게 심문관의 증표를 반납한다.
길게는 백 년, 이백년 동안 이단이 나타나지 않다 보니 생긴 제도라고, 엘피에라가 조그맣게 설명해 주었다.
회의의 진행자가 된 비브리다도 평소보다 좀 더 삐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루드비히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일단 엘피에라. 편지를 입수한 경위를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엘피에라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지금까지 몇 차례 했던 설명을 다시 반복했다. 얼굴을 가린 심문관 후보들은 그 이야기에 착실하게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도 움직이지는 않았다. 몸동작 때문에 정체를 들키는 건 피하려는 모양이다.
다음은 카트리야의 차례였다. 카트리야는 살벌한 분위기에 괜히 주눅 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편지의 짧은 문구를 설명했다.
“‘노트르담’이라는 건 저희 세계의 성전의 이름입니다. 프랑스라는 나라의 말로 ‘우리들의 귀부인’, ‘우리들의 귀한 어머니’라는 뜻이거든요. 저희 세계의 신은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저희 세계에 태어나게 한 다음, 그 아들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희생양이 되어 순교하게 했다고 합니다. 신의 아들이라도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어머니가 될 여성이 필요했기에 ‘성모’가 선택되었고, 이후 신자들이 그 성모에게 바치는 교회를 ‘노트르담 성당’이라고 불렀어요. 노트르담 성당은 여럿 있지만, 보통 ‘노트르담’이라고 하면 그중 가장 유명한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사도님 세계의 대성전일까요?”
대성전일까? 아니, 대성전에 해당하는 건 바티칸 본당이다. 노트르담 드 파리는 그냥 가장 유명한 성당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구분이 잘 안되고 그걸 설명하는 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았다.
카트리야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말을 아끼자.
비브리다는 눈을 가늘게 뜨고 편지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노트르담은 평안하냐는 질문은 대성전에 별 문제가 없냐는 암호처럼 보이기도 하는군요.”
“아니면 ‘대성전 같은 곳에서 밥은 잘 넘어가냐’는 질문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가 있으실지요?”
카트리야는 귀를 문질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루드비히의 눈치를 보면서 대답했다.
“굳이 저한테서 대성전의 정보를 알아내고 싶어 하는 지인은 달리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노트르담’이라는 이름을 알고 제게 접근하려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이 세계에 있다는 ‘신의 사도를 신으로 받들려다 실패한 이단자’가 아닐까 싶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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