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불행의 편지 (3)

“오, 잘 맞추시는군요, 사도님. 자식을 후계자로 세우자던 게 맞습니다. 사도가 없을 때는 사도의 혈통이 사도위에 앉아서 다음 사도가 올 때까지 신을 대리하자 같은 헛소리를 했다더군요.”
비브리다 추기경이 귀도 밝게 카트리야의 중얼거림을 알아듣고 대답했다.
세계가 달라도 사람 사는 세상 다 똑같은 모양이다. ‘신이 선택해서’ 사도가 법황보다 높다고 주장하는 주제에 신도 인간도 선택하지 않은 ‘사도의 후손’ 따위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종교적 권위를 가진단 말인가. 심지어 사도는 백 년에 한 번 랜덤 리필되는데. 그야말로 궤변이었다.
콘라드가 답을 맞히셨으니 사탕이라도 드릴까, 하고 사제복 허리에 매달린 주머니를 뒤적이면서 심드렁하니 덧붙였다.
“그런데 뭐, 전대 사도님도 꽤 오래 사셨거든요. 그분 손주들이 저보다 좀 나이가 많은 축일 텐데, 어른 될 때까지 전대 사도님 등쌀에 아주 기를 못 펴고 살았지요. 당시 조사 결과도 깨끗했고, 그 친구들까지는 상관없을 겝니다.”
“그렇군요. 인생 늘그막에 마음이 변해서 한번 권력을 얻어 보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루드비히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싸늘해져 있었다.
“증손주 중에 누군가가 날뛰는 걸 수도 있겠군요.”
손주들이 콘라드 추기경 세대라면 증손주는 루드비히의 세대 근처일 거다. 본인들이 움직이는 건지, 아니면 그들을 꼭두각시로 내세운 다른 자들이 부추기고 있는 건지.
이쪽도 정보가 부족하다. 널려 있는 문제는 산더미인데 모두 정보 부족으로 손을 못 쓰다니. 갑갑했다.
테이블을 손끝으로 똑똑 두드리던 루드비히가 다시 눈을 들었다.
때마침 카트리야가 두 손으로 공손히 사탕을 받아 드는 참이었다. 카트리야는 사탕 중 하나는 엘피에라에게 쥐여 주었다. 엘피에라는 여전히 넋이 나간 채 사탕을 받아 입에 넣었다.
루드비히는 카트리야에게 사근사근하게 물었다.
“사도님. 혹시 사도위 갖고 싶으십니까?”
“사양하겠습니다.”
저 사도에게 사도위를 주면 이단들을 줄줄이 낚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칼같이 거절당했다.
루드비히는 재도전해 보았다.
“사도위를 만들면 절 손끝으로 부려 먹으실 수 있을 텐데요.”
카트리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힐끗 루드비히의 눈치를 보았다.
“···그건··· 지금도 뭐···.”
추기경 둘이 나란히 웃음을 터뜨렸다.
루드비히는 잠깐 자기 행동을 반성했다. 진짜로? 내가 그 정도로 사도에게 약했단 말인가. 좀 더 강하게···. ···나갈 일이 뭐가 있어야 말이지···.
“그럼, 이단자들에게 합류할 생각은 있으십니까?”
카트리야는 조금 귀찮다는 표정으로 착실하게 대답했다.
“전 빼고 교인들끼리 해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게으름뱅이.
하지만 뭐, 사도는 앞으로도 한 십 년쯤은 더 게으름을 부릴 자격이 있었다. 그리고 이건 교단 내부의 문제이기는 했다. 언데드 대전이 벌어지기 전에 집안 정리부터 착실하게 잘 끝내놓아야 한다. 전쟁에서 등 뒤를 찔릴 수는 없다.
루드비히는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심문관 후보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저들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든 말든, 자신이 저들을 믿을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니까.
앞으로 한동안 정신없이 바빠질 것 같았다.
“그럼 그리하지요. 이단자들이 사도님의 신변에 심각한 위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한동안 외출하실 때는 반드시 엘피에라 외에 다른 성기사도 최소한 한 명 더 대동해 주십시오.”
카트리야는 그 말에 조금 웃었다.
역시 이 세계의 사람들은 다정하고 순진하다. 아니면 자신이 너무 더러운 거겠지.
“역시 이상해.”
엘피에라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사탕을 먹고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다.
“사도가 또 강림할 거 뻔히 알면서 사도위 같은 걸 만들자고 주장했다고? 이상하지 않아? 아무리 기반을 잘 다져 놔도 다음 사도한테 넘겨야 할 텐데?”
“그걸 생각할 머리가 있는 치들이 이단자가 되겠습니까.”
루드비히는 가차 없이 대답했지만, 여기에는 엘피에라도 할 말이 있었다.
“성하, 솔직히 성하가 이단자들을 많이 봤겠습니까, 제가 많이 봤겠습니까. 걔들이 좀 멍청하고 시야가 좁긴 하지만요, 겁 많아서 제 발 뻗을 자리는 끝내주게 보는 애들이란 말이죠. 고작··· 얼마야, 30년, 40년? 그 정도 편히 살자고 이단자가 되진 않았을걸요?”
파문당했다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사도님도 그렇게 생각하죠? 어차피 다음 사도한테 넘겨줘야 하는 사도위, 굳이 만들고 싶나?”
엘피에라가 동의를 구했다.
카트리야는 눈을 내리깔았다.
엘피에라도가 자신의 동의를 구하는 건 그냥 다른 이유 없이 당황해서다. 하지만 솔직히··· 전생에 자신을 괴롭히던 얼굴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역시 요즘 환청에 시달리는 게 문제인지도 모른다.
문제가 생기거나 남에게 안 좋은 말을 해야 할 때가 되면 자신에게 그 말을 하고 오라고 등을 떠밀고, 그렇게 자신과 부딪친 상대하고는 따로 만나서 자신의 험담을 하던 사람들. 아니, 어쩌면 그들이 ‘항의 좀 하고 와라’고 말하던 건 그냥 해 본 소리이고, 그들의 말대로 그냥 자신이 성격이 모나고 이상해서 남의 말을 이상하게 알아듣고 엉뚱하게 긁어 부스럼을 만든 건지도 모른다.
그냥, 엘피에라는 전생에 자신과 그렇게 부딪친 사람들과 이미지가 비슷했다. 곤란한 일은 손 안 대고 해치우고는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까지 잘 챙기던 능력자들. 전생에 그들이 항상 부러웠고, 항상 싫었다. 그런 사람 옆에 있으면 언젠가 자신이 쓰레기가 되어 버려질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법황의 친구이니 지내다 보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기도 했는데, 전혀 다른 세계, 전혀 다른 위치가 된 지금도 좀처럼 경계심이 풀어지지 않았다.
여기에 조금씩 쌓인 피로가 더해졌다. 말을 하고 나면 분명히 후회할 걸 알면서도, 카트리야는 입을 움직였다.
“제가 권력욕이 있다면, 만들겠죠.”
늘 제 발로 함정에 뛰어드는 머저리가 또 움직였다.
“···진짜?”
“전통적인 방법을 쓰면 되잖아요.”
카트리야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웃었다.
“사도의 자손이 사도위를 물려받다가 다음 사도하고 결혼하면, 사도위는 계속 그 자손의 가족이 차지할 텐데요. 왕조라는 게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 아닌가요? 혈연으로 이어지는 천년 왕국.”
엘피에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카트리야는 덤덤히 덧붙였다.
“중간에 한두명 법황하고도 결혼하면 아주 지위가 확고해지겠네요.”
여신은 새 사도가 그렇게 이용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까지 감안해서 이 몸을 시체로 만든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이쪽이 정파고 저쪽이 이단이다. 그리고 여신은 참 많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한 것 같다. 여전히 신앙을 가질 생각은 없지만, 그 멋진 뱀은 첫인상보다 굉장히 유능한 존재였다. 또 랜덤 기도를 할 일이 있으면 좀 더 많은 걸 기대해 보도록 할까.
모욕받은 건지 상처받은 건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의 엘피에라를 보고 카트리야는 눈을 내리깔았다. 1초쯤 아주 희미한 우월감에 빠졌다가 곧바로 기분이 바닥으로 파고 내려갔다.
나는 정말, 왜 인간이 이렇게 생겨먹은 것일까. 왜 애먼 데 화풀이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한심하기는.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웅크려 있던 카트리야는 고개를 들었다.
똑똑똑.
또다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눈물을 훔치면서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창문은 커튼에 가려져서 방 안은 어둡기만 했다.
다시 창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불을 온몸에 휘감은 채 침대에서 내려와서 커튼을 열어보았다.
달빛이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가운데 조그마한 그림자가 졌다. 창문 위쪽에서 내려온 하얀 손이 창문을 살짝 두드리고는 살랑살랑 인사를 했다. 호러 영화에 나올 것 같은 광경이다.
하지만 낯익은 손이었다.
창문을 열자 선선한 밤공기가 침실 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딱히 놀랍지 않게도, 루드비히가 열린 창틀 위로 훌쩍 내려섰다. 도대체 위쪽의 어디에 매달려 있다가 내려서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놀라운 건 루드비히가 연회용 복장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이단 심문관 회의가 끝나고 어딘가의 파티까지 들렀다가 돌아온 모양이다. 부지런한 사람 같으니.
창틀에 우아하게 균형을 잡고 한쪽 무릎을 꿇은 루드비히는 가슴에 손을 대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좋은 밤입니다, 사도님. 제가 실례해도 괜찮을까요?”
푸른 달빛과 검은 밤하늘이 배경이라선지, 익숙해진 줄 알았던 미모가 도로 부담스러웠다.
연회용 예복이 저렇게 잘 어울려서 얼굴이 반짝반짝 빛난다면 법황복의 디자인을 조금 손봐도 좋지 않을까. 예배에 참여하는 여성 신도가 더 늘어날 텐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카트리야는 뒤로 물러섰다. 루드비히는 방으로 미끄러져 들어와서 창문을 닫았다.
이불을 휘감은 카트리야를 보고 조금 웃고는, 손을 내밀어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닦았다.
“사도님은 좀, 자학을 하는 경향이 있으시군요.”
루드비히도 사도와 엘피에라가 여전히 서먹서먹한 건 알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건 조금씩 회복하던 사도가 처음으로 가시를 드러낸 게 엘피에라라는 정도려나. 아니, 그 태연한 대꾸가 ‘가시를 드러낸’ 행동이라는 걸 모르고 넘어가는 사람도 많았을 거다. 보통 소심한 사람은 만만한 사람을 골라내서 괴롭히곤 하는데 이 사도는 상대를 고르는 취향이 독특했다. 그러니 전생에도 여기저기 부딪치며 다녔을 테지.
하지만 사도가 벌써 ‘내가 이렇게 고약한 인간이고 너희를 괴롭히는데 이래도 날 안 버릴 거냐’하고 날뛰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면 루드비히의 계산보다는 회복하는 속도가 빨랐다. 그건 좀 짜증은 나도 괜찮은 일이었다.
“···자학이 아니라 근성이 썩어빠진 거예요.”
“진짜 썩어빠진 사람은 그런 소리 안 합니다.”
루드비히는 방에서 챙겨온 술병을 흔들면서 술잔을 찾아 움직였다. 카트리야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이불을 휘감은 채 그를 졸졸졸 따라왔다.
“이단 심문관들이 충성 맹세를 하러 오거나 그러는 거 아닌가요?”
“오늘 당장 오진 않을 겁니다. 비브리다 예하가 저한테 교리서를 잔뜩 가져다주셨거든요. 이제라도 공부 좀 하라고.”
정말로, 과장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허리 높이까지 책을 쌓아 놓고 갔다.
바쁘게 연회에 가서 시달리다 돌아온 루드비히는 그 책들을 노려보다가 그냥 튀기로 했다. 신학생일 때도 교리 수업은 종종 튀었다. 설마 비브리다 추기경도 이제 와서 자신이 자발적으로 그 책들을 다 볼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 책의 높이를 다시 떠올리고 루드비히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회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것을.”
“그래서 저한테 한소리 하러 오신 건가요?”
“아뇨, 그냥 사도님 침실에 숨으면 안 잡힐 것 같았습니다. 저 좀 숨겨 주시지요.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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