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수 아래에는 시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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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도로롱뇽
작품등록일 :
2024.10.01 14:16
최근연재일 :
2025.02.1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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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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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밟으면 꿈틀하기를 (1)

DUMMY

“교리 공부는 싫으신가요?”

“말씀드렸잖습니까, 전 육체파라고. 그래도 사제 서임 받느라 기본은 했는데··· 연구까지 하는 건 좀···.”

루드비히는 조금 아득한 눈으로 중얼거리면서 술잔 두 개를 한 손으로 집어 들었다. 응접실로 갈까도 싶었지만, 응접실 정도면 추기경들이 난입할 수도 있다. 침실이 딱 좋았다.

멋대로 침실 구석의 협탁에 술잔과 술병을 내려놓았다. 카트리야가 그에게서 먼 쪽의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전히 이불을 휘감고 있는 모습이 달팽이 같아서 조금 귀엽다.

루드비히는 맞은편의 의자를 카트리야의 대각선으로 끌어오고 커튼을 열어서 달빛을 들였다. 침실 안이 제법 환해졌다.

“엘피에라는 많이 불편하십니까?”

으음. 카트리야는 이불을 휘감으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엘피에라 경의 잘못은 아닌데···. ···전생에, 절 괴롭힌··· 혔다고, 제가 생각하는 사람하고, 좀 비슷해요. 그래서 자꾸 그때 생각이 나서···.”

“호위는 교체할까요?”

루드비히의 질문은 바로 나왔다. 카트리야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에 담긴 의문을 눈치챘는지 루드비히는 듣지 않은 질문에 부드럽게 대답해 주었다.

“엘피에라의 파문을 빠르게 취소시켜 주신 걸로 이미 충분히 도움은 주셨습니다. 엘피에라를 사도님 호위로 두면 저희야 편하지만, 저희의 편의보다는 사도님이 우선이지요. 불편하시다면 다른 호위를 찾아보겠습니다. 뭣하면 루치아 사제라도 빼내 오지요, 뭐.”

루치아의 출세욕을 생각하면 조금 애매하다.

카트리야는 이불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고민했다. 불편은 하다. 하지만 불편할 이유가 없는데 불편한 거고, 이건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어차피 낯선 사람 중에도 예전 삶을 연상시키는 사람들은 있을 테니, 평생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않을 게 아니라면 연습은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엘피에라는 괜찮은 연습 상대였다. 선을 넘으면 바로 말려줄 사람들이 주위에 있고, 자신의 지위가 확실히 높아서 여차하면 얼마든지 쳐낼 수 있다. 쓸데없는 연상 작용을 빼고 생각하면 자신이 한때 동경했던 모습에 가까우니까 호감을 느낄 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피에라 경은··· 저한테 기분 상하지 않았을까요···.”

루드비히는 술병을 따면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게요?”

···단 한마디로 매우 많은 무언가가 전달되었다.

잔에 술을 따르면서 루드비히는 낮게 웃었다.

“사도님은 엘피에라의 가벼운 소리를 흘려 넘기지 않고 쓸데없이 날카로운 대꾸를 했다거나, 어쩌면 전생에 싫었던 사람에게 하고 싶었던 화풀이를 애먼 사람에게 해 버렸다, 뭐 그런 걸로 반성하고 계신 모양입니다만.”

정확하다.

“엘피에라는 그 정도로 말해 주지 않으면 오히려 상황 판단이 안 될 겁니다.”

카트리야는 엘피에라의 표정을 떠올려 보았다. 당황하고 놀라고, 조금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그렇다면 어디에 화가 났단 말인가.

루드비히는 카트리야 앞으로 술잔을 밀어주고, 예복의 단추를 몇 개 풀면서 의자에 걸터앉아 술잔을 들어 올렸다. 살짝 벌어지는 예복 틈새로 얇은 이너 셔츠와 반듯한 목덜미가 드러났다.

술잔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루드비히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 녀석은 독실한 신자라고 했잖습니까. 가끔 사도님께 무례하기는 하지만, 신의 사도님이 더없이 귀하신 분이란 걸 모르진 않습니다. 그런 분이 본인을 무슨···. ···교배용 짐승처럼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 화가 좀 날 수도 있지요. ···저도 그렇고요.”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인 말에 카트리야는 좀 더 주눅이 들었다.

“···성하도, 화나셨나요?”

“조금은요. 다른 사람에게 상처 입는 걸로 모자라 본인 손으로 본인을 상처 내시면 그걸 어찌 감당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감당하지 못했으니 전생에 죽은 게 아니겠나.

카트리야는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루드비히가 손을 내밀어 이불 위로 빠져나온 세계수 덩굴들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긴 손가락이 덩굴을 쓸어내리자 잎사귀들이 반가운 듯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제가 예하들처럼 사도님 등을 후려치진 못하겠지만, 부디 자중해 주세요. 이 땅에서 가장 귀하신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저희가 많이 슬픕니다. 사도님은 그저 사도님을 좀 더 편히 모시지 못하는 저희의 무능만 탓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내 기분이 우울하니 너희 잘못이다, 라고 화풀이를 해야 한다는 건가.

루드비히는 손가락에 세계수 덩굴을 감아 보면서 가볍게 덧붙였다.

“엘피에라는 사도님이 시비를 걸었다는 생각은 절대로 없을 테지만···. 사도님 마음이 불편하시다면, 뭐, 내가 좀 예민했다, 한마디 정도 해 주시지요. 딱히 권장하진 않습니다. 뭔진 모르겠는데 일단 황공합니다, 수준의 대답이 돌아와서 속이 터지실걸요.”

그렇단 말인가. ···그래도 엘피에라가 돌아오면 일단 사과는 하자. 어린애도 아니고 용기를 내 봐야지.

카트리야는 속으로 다짐했다. 얹혀있던 짐이 조금 내려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때마침 루드비히가 덩굴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렸다. 손바닥을 위로 내밀고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을 보고 카트리야는 반사적으로 그 손에 자신의 손목을 얹었다.

이젠 익숙한 루드비히의 신성력이 손목을 타고 몸 안으로 퍼져나갔다. 죽도록 목이 마를 때 찬물을 마시면 물이 온몸에 스며드는 듯한 기분이 드는, 딱 그 느낌이었다. 다른 신성력도 괜찮지만 루드비히의 신성력은 유난히 청량한 느낌이라 진찰을 받든 치료를 받든 기분이 좋았다.

루드비히는 약간 서늘한 손목을 감싸 쥐고 서걱서걱한 몸을 찬찬히 진찰해 보았다. 엘피에라에게 날을 세운 것도 그렇지만, 얼마 전에 루치아도 ‘사도가 가끔 이유 없이 귀를 막는다’는 보고를 올린 적이 있었다. 머리카락의 잎사귀는 떨어지거나 색이 변한 건 없지만 살짝 물기가 부족한 느낌이고, 꽃망울은 수가 늘어났지만 피어날 낌새는 없었다. 어딘가 상태가 좋지 않은데 놓쳤는지도 모른다.

중간에 잠깐 눈을 들어 확인하자 카트리야는 이불에 휘감긴 채로 습관처럼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있었다.

신성력을 쓸 때면 늘 저런 표정이다. 기분이 좋은데 그걸 무의식중에 숨기려는 듯한 표정. 저 표정이 조금 유혹적이라고 말하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지금은 말고 나중에, 좀 더 사도의 기분이 밝아지면 한번 말해 보고 싶다.

몸을 구석구석 살펴본 후 루드비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로하셨군요.”

신성력이 거두어지는 것을 기다리던 카트리야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과로? 제가 뭘 했다고요?”

하지만 몸 상태가 그렇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해도 피로가 쌓인 상태였다. 어째선지 많이 억울해하는 카트리야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진 후, 루드비히는 최종 진단을 내렸다.

“하는 일 없는 과로로군요. 이건 심각한 문제네요.”

“어느 부분이요?”

“지금 일과가 힘들지 않고 일을 줄이고 싶지도 않은데 피로하시다면, 문제는 하나입니다. 체력 부족이지요.”

체력···?

카트리야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루드비히는 일부러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어 보였다.

“이건 약으로도 신성력으로도 치료를 할 수가 없는 문제라서요. 치료법은 딱 하나입니다만··· 사도님이 그리 달가워하시진 않을 듯한데···.”

“···설마··· 운동··· 인가요?”

“그렇습니다.”

예상대로 카트리야는 싫어하는 표정이 되었다.

루드비히의 기억 속에서 카트리야는 몸을 제대로 쓴 적이 없었다. 좀비일 때는 시체라서 몸이 둔했고, 사도는···. ···종종 길을 잃고, 가끔 책 몇 권을 낑낑대며 옮기고, 어린이집에서 애들이 놀자고 매달리면 못 들은 척 도망 다니고···. 뭔가 활력 있게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요전날 엘피에라에게서 도망갈 때 달리는 모습을 딱 한 번 보았다. 금세 잡힌 걸 봐서는 발도 느리겠지.

틈만 나면 방에 틀어박히는 사도가 운동을 좋아할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이 체력을 늘리려면 운동이라는 걸 할 수밖에 없다.

루드비히는 카트리야에게 가볍게 제안했다.

“그런 의미로, 혹시 승마를 배워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말을 타면 도시 바깥에 나가볼 수도 있으니까요. 성기사들이 사도님이 마음에 들어 하실 만한 얌전한 녀석들을 찍어 두었는데, 한번 살펴라도 봐주시면 다들 기뻐할 겁니다.”

승마라.

술잔을 감싸 쥐면서 카트리야는 고민에 빠졌다. 사실··· 귀찮다. 진짜로 과로라면 좀 더 방 안에서 굴러다니게 해 주면 좋겠다. 솔직히 별 필요성은 못 느끼지만···. 글쎄, 세계수를 건강하게 기르려면 체력을 좀 붙여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토양이 건강해야 작물이 잘 자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체력이 필요하긴 하다.

그리고 진짜로 이단자나 귀족이나 뭐 그런 사람들이 자신을 노린다면···.

카트리야는 힐끗 루드비히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길에서 저를 납치하려는 범죄자들을 만났다 쳐요. 혹시 제가 전 신경 쓰지 마시라고 하면···?”

루드비히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영업용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사도님의 뜻을 받들어 최대한 신경 쓰지 않고 구하겠습니다.”

카트리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렇겠지···. 이건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호위들의 목숨이 걸리는 문제였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여차할 때 말을 타고 도망칠 수 있어야 한다. 그걸 귀찮다고 회피하면 안 된다. 하지만.

“···배우는, 건 괜찮은데··· 아마 못 배울 거예요···.”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잘···?”

“저는 몸 쓰는 일은 제대로 하는 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루드비히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확인했다.

“목숨이 위험해지면 도망칠 능력은··· 있으실까요···?”

“···친구 아니랄까 봐 엘피에라 경하고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대답을 들어야 아느냐고, 카트리야는 오랜만에 눈으로 의사를 전달해 보았다.

하아. 루드비히는 남은 술을 단번에 비운 다음 술잔을 내려놓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위기가 닥치면 없던 힘도 짜내서 움직인다. 하지만 사도는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지 않다. 아마 생존 본능이 바닥 언저리를 맴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와중에 신체적인 능력까지 떨어지면, 적이 습격해 왔을 때 그냥 멍하니 서 있다가 납치당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

루드비히는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진지한 표정으로 카트리야에게 다가앉았다. 카트리야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최대한 유혹적으로 들리게 말해 보았다.

“승마 배우는 김에 수습 기사들하고 체력 훈련도 같이 하시죠. 제가 스케줄은 조절해 놓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뭐에든 고개를 끄덕여주는 대부분의 여자와 달리, 안타깝게도 카트리야는 손을 빼내며 이불 속에 좀 더 깊이 파묻혀 버렸다. 역시 얼굴 공격이 잘 안 먹힌다.

루드비히는 카트리야의 이불을 도로 잡아당겼다.

“사도님. 바로 지금이 법황으로서 신의 사도께 단호하게 반기를 들 때인 것 같습니다. 하시지요,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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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26. 상처 받은 짐승 (1) +2 25.02.17 5 1 11쪽
98 25. 울게 하소서 (5) +2 25.02.16 12 2 11쪽
97 25. 울게 하소서 (4) +2 25.02.14 14 2 11쪽
96 25. 울게 하소서 (3) +2 25.02.12 14 2 11쪽
95 25. 울게 하소서 (2) +2 25.02.10 18 3 11쪽
94 25. 울게 하소서 (1) +2 25.02.09 18 3 11쪽
93 24. 영혼이 가는 곳 (4) +2 25.02.07 23 3 11쪽
92 24. 영혼이 가는 곳 (3) +2 25.02.05 20 5 11쪽
91 24. 영혼이 가는 곳 (2) +2 25.02.03 18 3 11쪽
90 24. 영혼이 가는 곳 (1) +2 25.02.02 18 4 11쪽
89 23. 울지 않는 아이 (5) +1 25.01.31 19 4 11쪽
88 23. 울지 않는 아이 (4) +2 25.01.30 19 4 11쪽
87 23. 울지 않는 아이 (3) +2 25.01.29 20 4 11쪽
86 23. 울지 않는 아이 (2) +2 25.01.27 18 4 11쪽
85 23. 울지 않는 아이 (1) +2 25.01.26 22 4 11쪽
84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4) +2 25.01.24 23 4 11쪽
83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3) +2 25.01.22 23 4 11쪽
82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2) +2 25.01.20 25 4 11쪽
»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1) +1 25.01.19 22 3 11쪽
80 21. 불행의 편지 (3) +2 25.01.17 25 5 11쪽
79 21. 불행의 편지 (2) +2 25.01.15 26 4 11쪽
78 21. 불행의 편지 (1) +2 25.01.13 25 4 11쪽
77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4) +2 25.01.12 22 4 11쪽
76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3) +2 25.01.10 29 4 11쪽
75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2) +2 25.01.08 28 4 11쪽
74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1) +1 25.01.06 27 4 11쪽
73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5) +2 25.01.05 27 4 11쪽
72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4) +2 25.01.03 28 4 11쪽
71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3) +1 25.01.01 30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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