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수 아래에는 시체가

무료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로맨스

공모전참가작

도로롱뇽
작품등록일 :
2024.10.01 14:16
최근연재일 :
2025.02.17 14:00
연재수 :
99 회
조회수 :
3,829
추천수 :
433
글자수 :
505,999

작성
25.01.22 14:00
조회
22
추천
4
글자
11쪽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3)

DUMMY

엘피에라는 진지하게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1년이라도 빨리 결혼해야지. 넌 너의 원죄를 갚을 의무가 있다.”

“···왜 저한테 결혼해야 할 의무가··· 아니, 원죄는 또 뭡니까?”

“요정의 밤에 태어난 게 너의 원죄지. 정확히는, 요정의 밤에 태어났으면서 법황이 된 게 문제야. 이 법황 결격자.”

알겠냐. 루드비히는 그저 서늘한 눈으로 엘피에라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카트리야는 루드비히에게 몸을 기울이고 속삭였다.

“혹시 요정의 밤에 태어난 아이는 재수가 없다거나, 그런 미신이 이 세계에도 있나요?”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만, 엘피에라의 머릿속 세상에는 있는 게 아닐까요?”

엘피에라는 팔짱을 낀 채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카트리야를 바라보았다.

“사도님, 어린이집에서 요정의 밤하고 성탄절이 휴일이라는 건 배우셨죠?”

“예. 둘이 같은 날이고요.”

“원래는 요정의 밤 하루, 성탄절 하루, 이틀을 쉬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하루밖에 못 쉽니다.”

루드비히는 한숨을 내쉬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지막이 기도를 올린다.

엘피에라는 루드비히를 손가락질하면서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세요? 선법황 성하는 가을 단풍철에 태어나셔서 성탄절에 다 같이 단풍 구경 갔는데! 그런데 루드비히 얘는 하필 쉬는 날 태어나서 휴일이 하루 줄어들었다고요? 가엾은 백성들한테서 휴일을 빼앗아가다니, 법황이 할 일입니까? 더구나 얘는 젊어! 앞으로 30년쯤 법황이 안 바뀌면 우린 휴일을 30일 잃는 거예요. 괘씸하죠?”

······괘씸···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헷갈린다. 전생의 직장인 자아와 정상적인 판단력 사이에서 잠시 방황했지만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정상적인 판단력이 승리했다.

카트리야는 떨리는 눈으로 루드비히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게, 성하도 고의는 아니셨을 테니까···?”

“뭐, 그걸로 정상 참작은 해 주는 거죠. 자, 그래도 우리 휴일은 하루 줄었잖아요? 그런데 이럴 수가! 법황 성혼일도 공휴일입니다! 그리고 여기 미혼 법황이 하나 있네?”

······그러니까 지금.

카트리야는 조금 아득해진 상태로 질문했다.

“성하가 요정의 밤에 태어나면서 하루 줄인 휴일을 결혼해서 도로 채워 놓으라는 말씀이군요?”

“루드비히에겐 그럴 책임이 있겠지요? 내놔라, 내 휴일.”

허. 루드비히는 기도를 끝내고 고개를 들며 코웃음을 쳤다.

“휴일이 하루 늘면 좋습니까?”

“넌 안 좋냐?”

“대성전엔 휴일이 없습니다. 사도님의 호위도 휴일이라고 해서 쉴 수 있는 일이 아닐 테지요. 본인은 못 놀지만 남이 노는 것을 보고 기뻐해 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넓어지셨다니 이 법황,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다 어머니의 크나큰 은혜시지요. 사람이 심보를 고약하게 쓰면 안 됩니다, 법황 성하. 여신의 아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세요. 결혼이 1년 늦어지면 휴일도 1일 줄어듭니다. 그런 의미로 네가 결혼하는 날은 꼭 강림절 다음 첫 월요일로 하자.”

루드비히는 또다시 길게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카트리야를 돌아보며 보충 설명을 했다.

“강림절은 매년 초 1주일을 통째로 쉬거든요. 그래서 보통 사람들한테는 그다음 월요일이 새해의 첫 근무일입니다.”

그러니까 연휴 다음날 붙는 휴일을 만들라는 주문이로군. 그래, 어차피 날짜를 골라서 정할 수 있다면 휴일에 붙여 주면 좋은 것 같다.

이번에는 직장인 자아가 이겼다. 카트리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드비히가 섭섭하다는 듯이 살짝 눈을 내리떴다.

“그렇군요···. 사도님께서도 제 평생의 반려보다는 결혼 날짜가 더 중요하신 거군요···.”

“파트너야 성하께서 알아서 잘 고르실 테니···.”

카트리야는 술잔을 집어 들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루드비히가 여자를 만난다는 소문은 못 들었다. 그럴듯한 사람도 없는 것 같다. 법황 업무와 예배 말고 남는 시간은 얼마 되지도 않지만, 그 시간도 훈련이나 휴식 정도로 쓰고 있다고 했다.

···그거 아닌가? 하루 15시간 근무해서 결혼정보회사 없이는 이성을 만날 기회조차 사라져 버린 불쌍한 전문직 같은?

그렇다면 저 잘생긴 얼굴의 유전자를 남겨 줄 사람이 없는 건가? 그건 좀 아까운 느낌이 들었다.

카트리야는 루드비히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성하는, 연애는 안 하시나요?”

“별생각 없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엘피에라가 재빨리 보고했다.

“루드비히 연애 한번 한 적 있어요. 오를레앙 공작 부인이 되신, 아주아주 끝내주는 미인이셨죠. 신이 제일 공들여 만든 남자 얼굴이 루드비히면 여자 얼굴 쪽은 공작 부인일 거라고 다들 수군거렸는데. 아, 나 솔직히 루드비히 너 법황 된 것보다 그분이랑 사귄 게 더 부러워. 지금도 부러워. 아직도 부러워! 공작 부인이 나하고 사귀어 주셨으면 난 진짜 그분 집 벽에 달라붙은 곰팡이가 되어서라도 절대로 옆에서 안 떠났다!”

“그분이 당신을 고르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게 아닐까요?”

싸우자는 거냐.

루드비히와 엘피에라는 잠깐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사이 카트리야는 무사히 되찾은 이불로 몸을 휘감고 조금 고민했다. 법황의 부인··· 법황후 정도려나. 그런 사람이 대성전에 들어오면 자신이 지내기는 불편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대성전 나가서 신자들이 선물해 준 집에서 살면 좋겠다. 미리미리 정비해 두고, 돈도 좀 벌 수 있게 해 두면 좋겠다. 슬슬 직접 구경을 갈 때도 되긴 했고.

하지만.

카트리야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운동은 싫다. 훈련도 싫다. 해야 하는 거겠지만 역시 싫다. 문자 그대로, 과장 없이, 죽을 정도로 싫었다.

“승마 싫다···.”

혼자 흘린 중얼거림을 재빠르게 알아듣고 루드비히가 부드럽게 달랬다.

“배워 보시면 재미있을 겁니다. 사도님 무리하지 않으시게, 천천히 잘 가르려 드리라고 하고, 저하고 엘피에라도 바로 옆에 붙어 있을 테니까요. 다른 체력 훈련도 필요는 하지만 일단 승마를 배우세요.”

“말타기를 안 배우고 제가 받은 저택에 방문하는 건, 괜찮을까요?”

“사도님의 뜻에 거역하고 싶지는 않지만, 차마 괜찮다고 말씀드리지 못하는 제 입장을 부디 너그러이 살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법황이 신의 사도에게 처음으로 양보해 주지 않는 게 이런 일이라니. 슬프다.

“···그럼 나중에, 승마는 배울게요. 체력 훈련은··· 그건 좀 싫지만···.”

“같이 해야지요, 사도님.”

엘피에라가 잔에 또 술을 따르면서 고개를 살짝 저었다.

“사도님 몸에 근육도 없고 자세도 어중간해서 기초 훈련 없이 말 타면 어차피 오래든 빠르게든 타기는 힘드실걸요? 말 위에서 버티는 것도 근력이 최소한은 필요하니까. 괜찮아요, 다들 온갖 연습생 다 받아 봐서 어지간한 실수에는 눈 하나 까딱 안 하고 다 알아서들 처리해 주니까.”

그리고 카트리야가 낙마로 목이 부러지더라도 루드비히와 엘피에라 둘이 있으면 살려낼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이 세계의 감각으로는 ‘어떤 사고도 일어날 수 없는 안전한 훈련’에 들어가는 거겠지만···. 역시 목이나 뼈가 부러지는 건 싫을 것 같은데.

카트리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치자마자 회복한다고 해도 사고는 사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상 사고는 반드시 일어날 예정이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실 텐데요.”

“단조롭고 무료한 성전 생활에 신선한 기쁨을 주신다면 무한한 영광 아니겠습니까.”

루드비히는 카트리야의 속도 모르고 오늘도 한없이 다정했다. 카트리야는 사람들에게 보이게 될 추태를 생각하며 그저 이불에 파묻혀 버렸지만, ‘신선한 기쁨’에서 엘피에라는 또다시 엉뚱한 화제를 떠올렸다.

“맞아, 루드비히! 나 네 뱀 보고 싶어!”

“···어느 뱀, 말입니까?”

“대성전에 장식했다는 보석뱀. 나 그거 아직도 구경 못 했는데, 보여줘. 사도님이 엄청 열심히 만드셨다며.”

열심히 만들었다. 잠을 아껴가면서. 그리고 여러 장인의 도움을 받아서 아주 멋진 털실 신상이 된 뱀은 한동안 대성전에 전시해 두었다가 다시 법황 침실로 들어갔다.

성소에 넣은 작은 뱀은 사적인 물건이라 보여줄 수 없지만, 전시했던 큰 뱀 정도는 보여줄 수 있다.

“나중에 제 침실에 알아서 들어가서 알아서 보시지요.”

“좋았어! 그럼 보석뱀 말고 다른 뱀은 또 뭔데? 어디 있어? 그것도 보여주는 거지?”

“성소에 넣어 둔 거라 안 됩니다.”

“쳇, 쫌생이.”

“법황 모독죄 진짜 한번 적용해 드릴까요?”

시시껄렁한 주제로 시시껄렁한 잡담과 말싸움이 몇 번 더 반복되었다.

그리고 루드비히는 카트리야에게 종교 미술 이야기를 들었다. 인간의 맨눈으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낱알에 경전을 적어 내려가는 사람. 값비싼 최고급 원단 바탕에 황금 가루를 뿌려서 만들어진 신의 형상과 말씀. 작게는 호두알에, 크게는 배가 가까이 닿을 수 없는 까마득히 높은 강가의 절벽에 새겨진 크고 작은 신의 모습들. 바닷속에, 도시 아래에 묻힌 잊혀진 도시와 인간이 오르기도 힘든 산꼭대기에 지어진 거대한 도시. 동굴 속에 숨겨진 거대한 신전.

오직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자신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신에게 바치겠다는 이유 하나로 인간의 한계와 예술의 한계를 초월해 왔던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루드비히는 그것에 조금은 안심했다. 그 세계에서도 이 세계에서도 ‘믿는다’는 행위 자체는 다르지 않다. 믿음이 사도에게 오직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정도면 지금은 충분했다. 그리고 이 세계도 좀 더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면 그런 멋진 예술품이 많이 생겨나 있기를 조금 기대해 보았다.


사도는 본인 말대로 그들이 상상했던 이상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먹지 마! 안 돼! 내 머리! 내 잎사귀!!”

때아닌 비명이 마구간에 울려 퍼졌다. 엘피에라가 카트리야의 머리카락에 입질을 하려는 말을 급히 붙잡아서 밀어내고, 루드비히가 카트리야를 안전한 곳까지 끌어냈다. 카트리야는 울상이 되어 머리카락을 꾹 눌렀다.

엘피에라는 말의 얼굴을 손으로 가볍게 때렸다.

“야 임마, 밥 굶었냐? 왜 남의 머리에 난 잎을 먹으려고 해, 저거 먹는 거 아니다? 저거 세계수다? 너네 먹으라고 머리에 풀 심고 온 거 아니라고.”

푸르릉. 히힝. 여기저기서 말들이 대답하듯이 투레질했다.

“먹는다기보다는 신기해서 구경을 하고 싶었던 거겠죠. 말들은 영리하니까.”

루드비히는 한숨을 섞어 중얼거렸다. 소중한 머리카락을 붙잡고 말들을 경계심 어린 눈으로 노려보는 카트리야를 달래고, 호기심에 기웃거리는 말들도 달래고, 양쪽을 다시 인사시키는 데까지 한참 시간이 걸렸다. 정확히는 말들이 카트리야에게 적응하고 세계수에 고개를 들이밀지 않을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마구 채우는 법은 의외로 빠르게 배워서 다시 희망이 생겼고.

안장 오르기에서 다시 절망에 빠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67 성잔화
    작성일
    25.01.22 14:13
    No. 1

    종교 예술도 지금 이름만 읊으면 사람들이 아! 할만한 유명하고 대단한 예술이 많지요.
    일단 옛날의 유명 예술가들은 어지간하면 다 종교 예술을 했었고...
    왜 다비드 상이나 최후의 심판 이런것도 다 종교 예술 아니겠습니까.
    뭔가를 믿고 거기에 마음을 바쳐서 뭔가를 해낸다는 것도 대단한거같아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4 n7******..
    작성일
    25.01.22 17:49
    No. 2

    스테인드글라스만 해도 멋지죠.
    맞아요 안장 올라가기 무섭고 어렵고 힘들어요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세계수 아래에는 시체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주기 공지 24.10.09 72 0 -
99 26. 상처 받은 짐승 (1) +2 25.02.17 5 1 11쪽
98 25. 울게 하소서 (5) +2 25.02.16 12 2 11쪽
97 25. 울게 하소서 (4) +2 25.02.14 14 2 11쪽
96 25. 울게 하소서 (3) +2 25.02.12 14 2 11쪽
95 25. 울게 하소서 (2) +2 25.02.10 18 3 11쪽
94 25. 울게 하소서 (1) +2 25.02.09 18 3 11쪽
93 24. 영혼이 가는 곳 (4) +2 25.02.07 23 3 11쪽
92 24. 영혼이 가는 곳 (3) +2 25.02.05 20 5 11쪽
91 24. 영혼이 가는 곳 (2) +2 25.02.03 18 3 11쪽
90 24. 영혼이 가는 곳 (1) +2 25.02.02 18 4 11쪽
89 23. 울지 않는 아이 (5) +1 25.01.31 19 4 11쪽
88 23. 울지 않는 아이 (4) +2 25.01.30 19 4 11쪽
87 23. 울지 않는 아이 (3) +2 25.01.29 20 4 11쪽
86 23. 울지 않는 아이 (2) +2 25.01.27 18 4 11쪽
85 23. 울지 않는 아이 (1) +2 25.01.26 22 4 11쪽
84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4) +2 25.01.24 23 4 11쪽
»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3) +2 25.01.22 23 4 11쪽
82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2) +2 25.01.20 24 4 11쪽
81 22. 밟으면 꿈틀하기를 (1) +1 25.01.19 21 3 11쪽
80 21. 불행의 편지 (3) +2 25.01.17 25 5 11쪽
79 21. 불행의 편지 (2) +2 25.01.15 26 4 11쪽
78 21. 불행의 편지 (1) +2 25.01.13 25 4 11쪽
77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4) +2 25.01.12 22 4 11쪽
76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3) +2 25.01.10 29 4 11쪽
75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2) +2 25.01.08 28 4 11쪽
74 20.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1) +1 25.01.06 27 4 11쪽
73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5) +2 25.01.05 27 4 11쪽
72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4) +2 25.01.03 28 4 11쪽
71 19. 믿음은 시련으로 강해지는가 (3) +1 25.01.01 30 4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