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밟으면 꿈틀하기를 (4)

“자, 보세요? 안장머리를 잡고, 여기, 등자에 발을 얹어서, 여기에 무게를 싣고 이렇게! 다른 쪽 다리로 말 등을 넘기면 짠! 앉아집니다.”
엘피에라는 마구간에서 제일 순하다는 밤색 말의 위에 가볍게 올라타 보였다. 그리고 반대쪽으로 훌쩍 내려왔다. 평소엔 안장 따위 건드리지 않고 그냥 등자만 밟고도 뛰어오르지만 오늘은 나름대로 ‘초심자용 시범’이었다.
루치아가 등자 밑에 발받침을 대 주었다.
“처음에 바로 올라가기는 좀 힘드실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사도님, 일단 오늘은 이걸 오른발로 밟고 올라가서, 왼발을 등자에 넣고 저렇게 오른발을 말 엉덩이 쪽으로 넘기시면 돼요. 해 보실까요?”
카트리야는 기묘한 표정으로 엘피에라를 보고, 루치아를 보고, 발받침을 보았다. 그리고 밤색 말의 순한 눈을 잠깐 쳐다보았다. 다시 눈으로 발받침, 등자, 안장을 천천히 훑은 다음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못할 것 같은데···.”
“막상 해 보면 별로 어렵지 않아요. 자, 자, 해 보십시다.”
엘피에라가 작게 손뼉을 치며 재촉했다.
카트리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발받침에 오른발을 얹었다. 그것만으로도 긴장된다. 오며 가며 남이 탄 말을 보기는 했지만 가까이에서 본 말은 생각보다 덩치가 크고, 안장은 생각보다 높았다.
잠시 멈춰서 심호흡을 했다.
엘피에라가 고삐를 잡고 말의 콧등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해 보세요, 하고 눈으로 재촉하고 있었다.
시범에서 본 대로 안장머리를 손으로 잡고 등자에 왼발을 넣으려다가, 카트리야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루드비히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끼고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떨어지면 잡아달라고 미리 말을 할까. ···아니, 바보 같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떨어질 텐데. 이 사람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켜줘야 하는 게 아닐까.
“긴장 안 하셔도 돼요, 사도님. 우리 비엔토가 얼마나 착한데요.”
문제는 그 이름 예쁜 말이 아니야. 내가 문제라고. 하루 15시간 책상에 앉아서 20년을 보낸 사람의 몸이 얼마나 웃겨질 수 있는지 당신들 세계 사람들은 이해를 못 할 거야. 쪼잔한 신 같으니, 기왕 환생시킬 거면 건강한 몸으로 환생··· 을 시킬래도 몸을 잘 쓴 적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없었겠군요. 이해해 드립니다.
카트리야는 긴장해서 입도 뻥끗 못 한 채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기수가 긴장하면 말도 덩달아 긴장해서 위험해진다는 건 안다. 아는데. 안다고 실천이 되면 내 전생의 체육 시간이 그 꼴이었겠냐고.
울고 싶다. 하지만 내 승마 실력이 남의 목숨과 연관된다는데 억지를 쓸 수도 없다. 애가 아니니까.
카트리야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루치아가 잡아주는 등자에 왼발을 끼워 넣었다. 안장머리를 손으로 잡고, 왼발에 힘을 실으면서, 동시에 오른발을 뒤로 차면···.
사고는 순식간이었다.
카트리야의 오른발은 얌전한 말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찼고, 몸은 뒤로 튕겨 나갔다. 악력이 부족한 손은 안장머리를 놓쳤다. 등자에 끼워 넣은 왼발도 균형을 잃고 미끄러졌다. 바깥이 아니라 안으로.
옆에 있던 루치아는 튕겨 나온 카트리야에게 부딪쳐 넘어졌다.
그리고 갑자기 엉덩이를 차인 비엔토는 앞으로 뛰쳐나갔다. 엘피에라는 고삐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강제로 붙잡힌 비엔토는 멈춰 서느라 습관적으로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다. 그 발굽 아래에, 하필이면 등자에 발이 끼어 끌려온 카트리야의 머리가 멈추었다.
말발굽은 땅에 부딪힐 때 머리를 감싼 카트리야의 왼팔을 밟아 눌렀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엘피에라가 거칠게 고삐를 찍어 누름과 거의 동시에 루드비히가 달려와서 카트리야를 말발굽 밑에서 빼냈다. 비엔토는 더 움직이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다시 발을 굴렀다. 발굽은 이번에는 땅바닥을 밟았다.
“사도님!”
구경하던 기사들까지 우르르 달려왔다. 한 명이 등자에 끼인 카트리야의 발을 빼내고, 나머지는 엘피에라를 도와 비엔토를 주저앉혔다. 넘어졌던 루치아가 일어나서 루드비히와 함께 카트리야를 승마장 바깥으로 끌어냈다.
루드비히는 빠르게 카트리야의 몸을 진단했다. 그 짧은 순간, 단 한 방에 왼팔이 부러졌다. 카트리야가 미리 머리를 감싸지 않았다면 팔이 아니라 두개골이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기사들에게 비엔토를 넘겨 준 엘피에라가 달려왔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와, 이거, 사도님, 팔···”
비명도 신음도 없이, 카트리야는 이를 악물고 거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밟힐 때 짧게 비명을 지른 것이 끝이었다. 부러진 팔도 멀쩡한 팔도, 등자에 끼어 삔 발목도,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저 몸을 웅크리고 헉헉거렸다.
그게 어떤 환자들이 보이는 모습인지를 뻔히 알기 때문에 루드비히는 또다시 속이 타들어 갔다.
“왼팔 골절, 발목 염좌··· 바닥에 쓸린 데 말고 또 다친 곳은?”
엘피에라가 달려와서 빠르게 진단했다. 녹색 눈이 머리카락을 훑어보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루드비히는 카트리야의 뺨을 손끝으로 가볍게 건드렸다. 카트리야가 조금 더 헉헉거리다가 눈을 떴다. 눈이 조금 흐려져 있기는 하지만 동공은 무사하고, 반응도 했다. 역시 머리는 다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습관적으로 훈련복의 주머니를 더듬었다가 혀를 찼다. 전장도 아니고 훈련장이다. 진통제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엘피에라를 보자 그쪽도 고개를 살짝 저었다.
둘 다 환자에게 진통제 줄 시간에 완치시켜 버리는 데 익숙한 인간들이다.
엘피에라가 짧게 한숨을 쉬고 카트리야에게 말했다.
“자, 사도님. 미안한데 우리 여기서 바로 치료합시다. 뼈 부러진 거라 치료할 때 좀 아플 거야. 근데 진통제 오는 거 기다리느니 우리가 치료하는 게 더 빨라. 그러니까 지금 그냥 치료할게?”
카트리야는 흐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고개를 움직이려다 부러진 팔을 건드린 모양이다.
엘피에라가 손을 빙글 돌려 보였다. 똑바로 눕히자는 제안이었지만 루드비히는 고개를 저었다. 눕히려고 움직이면 또 팔을 아프게 만들 거다. 골절상 치료에 한나절 걸리는 초보 치유 사제도 아니고, 쓸데없는 고통을 줄 이유가 없었다.
눈을 들어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을 살펴보고 루드비히는 루치아를 손짓으로 불렀다. 루치아가 급히 옆에 무릎을 꿇자 나지막이 명령했다.
“사도님은 괜찮을 테니 전부 물러나라고 하십시오. 다친 모습 남에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으실 겁니다.”
루치아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기사들에게 달려갔다. 기사들이 돌아서는 모습을 확인하고, 루드비히는 엘피에라에게 발목을 턱으로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 자신은 카트리야의 손목과 팔꿈치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죄송합니다, 좀 아플 겁니다.”
흑. 비명처럼 숨을 들이쉬고, 카트리야가 이를 악물었다. 신성력을 몸 안에 밀어 넣어서 부러진 부위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아래쪽에서 성호를 그리고 기도를 올린 엘피에라도 발목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낮은 기도 소리가 겹쳤다.
신성력으로 하는 치료는 기적이다. 일반 의사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몸이 낫도록 돕지만, 신성력은 약 없이도 몸을 정상 상태로 교정하고 치유 속도를 가속화한다. 그래서 골절상을 치료하면 몸 안의 뼈가 움직여서 제자리에 붙어 버렸다. 부작용 없이 원상 복귀라는 점에서는 기적이지만, 아프다. 뼈가 움직이니까.
루치아가 옆에서 안절부절하다가 카트리야의 손을 잡아 주었다. 한순간 손을 쳐내려던 카트리야는 이내 손마디가 새하얗게 되도록 루치아의 손에 매달렸다.
발목 염좌를 치료하던 엘피에라의 눈이 점점 동그래졌다. 기도하느라 입술을 달싹거리면서도 엘피에라는 흔들리는 눈으로 루드비히를 쳐다보았다.
야, 이거 원래 이래···?
온 얼굴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루드비히는 고개를 까딱했다.
와 씨, 왜 이렇게 신성력 많이 들어.
엘피에라는 인상을 쓰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발목 염좌를 치료했다. 그래봤자 본인 신성력엔 큰 영향도 안 미칠 텐데 엄살이 심하다. 루드비히는 예상했던 대로 신성력을 게걸스럽게 잡아먹는 골절을 조심스럽게 치료했다.
치료는, 치유소의 치유 사제들이 보면 감동할 정도로 빠르게 끝났다. 그러고도 카트리야의 숨이 제대로 가라앉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통증 때문인지 충격 때문인지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루치아가 담요와 물을 가져와서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루드비히는 치료가 끝난 몸을 안아 일으켜서 바닥에 앉혔다. 카트리야는 담요로 몸을 감쌀 때까지는 얌전했지만, 물을 입에 대주자 고개를 피했다. 얼굴이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
그것을 본인도 깨달았는지 담요에 얼굴을 숨기려다가 움찔했다.
“신성 마법으로는 치료를 해도 잠시 환상통이 남습니다. 다친 곳은 반나절 정도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덤으로 온몸이 갑자기 긴장해서 근육통도 조금 생길 거다.
루드비히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좀 더 조심해서 지켜볼 것을 그랬다. 그래도 몸을 부대껴야 하니 여자들끼리 하는 게 편할 줄 알았고, 승마도 아니고 말에 오르기만 하는 정도라 위험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설마 안장에 앉으려다 말을 걷어차서 제 발로 떨어질 줄은. 그리고 그때 불운이 겹치고 겹쳐서 이런 대형 사고가 터질 줄은 몰랐다. 몸 쓰는 일은 제대로 못 한다던 말은 진짜로 핑계도 겸손도 과장도 아니었나 보다.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오늘은 이만 들어가 봐도 될까요.”
카트리야는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축을 받아 일어나서 발을 몇 번 디뎌 보고, 따라오겠다는 루치아에게 괜찮다고 사양하고, 담요를 휘감은 채 조금 절뚝이면서 승마장을 떠났다.
몸이 안쪽에서부터 덜덜 떨려왔다. 속이 메슥거렸다.
대성전의 영빈관 건물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카트리야는 발을 멈췄다. 천천히 벽에 등을 기댔다. 아직 오전이라 제대로 달궈지지 않은 석조 건물의 벽은 딱 기분 좋을 정도로 서늘했다.
등을 댄 채 주르륵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세워 얼굴을 파묻고, 담요를 그 위에 덮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난 왜 이렇게 멍청하지. 왜 아직도 제대로 할 줄 아는 일이 없지. 못할 거 뻔히 알면 가만히 있기나 할 것이지 왜 이렇게 머저리처럼 굴어. 아침부터 사람들 식겁하게 만들고 뭐 하는 짓이야.
하지만 건방진 생각이다. 뭔가를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극소수에 자신이 들어간다는 기대는 오만이다. 평범한 다른 사람들처럼 실수에 실수를 거듭하면서 배워 나가야 하는 건데. 그게 당연한데. 더구나 자신은 실수를 하다 하다 못해 결국 사회에서 떨려 나와 죽어버린 부적응자다.
그런데 왜 매번 실수할 때마다 이렇게 창피하고, 이렇게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실수를 안 할 가능성이라도 있었다는 것처럼. 주제넘게.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