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울지 않는 아이 (1)

다른 사람이 말을 타려다가 떨어져서 밟혔다고 하면 그러려니 할 것이다. 친한 사람이라면 많이 다쳤냐고 걱정도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다치면 그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스스로에게도 남들만큼은 친절해지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모른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한심하고, 허술하고, 얼마나 많은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하는지 모른다. 내가 얼마나 예민하고 까칠한지, 얼마나 비겁하고 치사한지 모른다. 그런 주제에 이렇게 실수 하나하나에 스스로 화를 낼 정도로 오만하다는 것도 모른다.
그러니까 ‘친절해지라’는 말 같은 걸 하는 거다. 그 사람들은 나를 모르니까.
세상에 나를 완벽하게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만, 나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지만.
나는 나처럼 하잘것없는 존재에게 친절하게 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차라리 못 탄다고 뻗댈걸. 안 한다고 고집을 피울걸. 그럼 그 많은 사람이 놀라고 기겁할 일도 없었을 텐데. 이 일이 소문이라도 나면, 이단자들이든 귀족이든, 치명적인 약점을 알게 되어서 더 불리해질 거다. 그러니까, 적어도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하자고 할걸.
왜 생각 없이 마구간에 따라갔지.
처음에 말들이 머리를 뜯어먹으려고 할 때 못하겠다고 도망칠걸. 그랬으면···.
수도 없이 반복해서 익숙한 길을 따라 빠르게 쌓인 자기혐오 위로 한 겹 한 겹 의미 없는 후회가 덧씌워질 때.
탁. 탁. 탁.
가벼운 발소리가 다가왔다.
카트리야는 움찔하고 담요를 붙잡았다.
좋아. 아파서 앉아 있다고 거짓말하는 거다. 괜찮아. 울지는 않았으니까 티는 안 날 거고, 아프니까 사람 불러달라고 하면 온 사람은 다시 갈 거고···.
순식간에 핑계를 떠올리고, 그런 짓을 했다는 데 또다시 실망했다.
비겁한 거짓말쟁이.
발소리는 카트리야 옆에서 멈추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누군가가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무심코 고개를 드는데 익숙한 백합 향이 느껴졌다.
담요를 벗으려다 말고, 카트리야는 도로 무릎에 고개를 비스듬히 기댔다.
“따라오실 건 없지 않나요.”
“···보지도 않고서 어떻게 알아보시는 겁니까?”
냄새로 안다고 대답하면 좀 변태 같겠지? 알베르토 사제한테 법황 옷에 쓰는 향을 좀 다양하게 써 달라고 눈치라도 줘야 하나 보다. 아니면 옷에 배게 하는 향하고 씻을 때 쓰는 향이라도 다른 걸로 해 달라고··· 생각해보니 더더욱 변태 같다. 남의 냄새를 맡다 못해 통제까지 하려는 변태.
카트리야는 조용히 묵비권을 행사했다.
담요 위로 머리에 가볍게 손이 얹혔다.
“울고 계시면 어깨라도 빌려드릴까 하고 따라왔지요.”
울고 싶긴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나에게도 나이와 체면이 있다. 카트리야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무릎에 이마를 파묻었다. 태연한 척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얼굴 근육이 또 나를 배신했나.
“···역시나 안 울고 계셨습니까.”
어째선지 한숨이 그 뒤를 따랐다.
···사람이 울면 달래 주어야 하지만 안 울면 달래줄 필요가 없으니까 괜찮지 않은가. 왜 한숨이지. 그럼 울었다고 할까? 담요 덮고 있으니까 안 울었던 건 티 안 날 거고.
“엘피에라와 루치아가 따라와서 사과한다는 걸 말리고 오느라 좀 늦었습니다. ···저까지 포함해서 다들 기사단 훈련에 익숙해서··· 조금, 대비가 안이했습니다. 사도님께서 힘들 거라고 말씀하셨을 때 좀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일단 상황을 본 다음 판단할 문제라고 생각해 버렸지요. 전부 저희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요점은, 안장에 오르는 단계에서 실패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기사단에 자원할 정도면 수습이라고 해도 카트리야만큼 몸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카트리야도 그 점은 충분히 이해했다. 사실 남의 잘못도 아니었다. 30년 학교에 근무한 체육 교사조차 ‘사람이 저렇게 몸을 못 쓸 리가 없다, 쟤 체육 수업 싫다고 요령 부리는 거다’하고 단정하게 만든 끔찍한 운동 신경이었다. 대학원과 연구소를 거치면서 퇴화하기만 한 몸은··· 솔직히 좀비일 때와 큰 차이 없는 수준밖엔 되지 않는다. 이런 몸을 상상하지 못했다고 해서 나쁜 게 아니다.
그러니까 차라리 말은 절대 못 탄다고 있는 힘껏 거절해야 했던 걸까. 그렇지만 말은 타 달라고 다들 부탁했는데. 앞으로도 필요는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혹시 담요를 벗어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도리도리.
“······그렇군요. 그럼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뭐를?
묻기도 전에 어깨와 무릎 밑에 다른 체온이 닿더니 몸이 훅 떠올랐다.
“승마를 가르치는 데는 조금 서툴렀습니다만, 그래도 환자 간호는 전문이라서요. 침실로 모시겠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단호하고, 심하게 가까웠다. 어깨에 닿은 가슴에서 목소리가 울려 나오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루드비히는 카트리야를 안아 들고 일어섰다.
나를? 통째로?! 아니, 사람을 나눠서 들 수는 없으니까 통째로 들어야... 아니아니, 잠시만!
금세 패닉에 빠진 머리로 허겁지겁 머리를 덮은 담요를 끌어내리려고 바둥거렸다. 루드비히가 어깨를 감싼 팔이 담요 뒤쪽을 눌러서 잘 벗겨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몸은 휙휙 움직였다. 루드비히는 성인 여자 하나를 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안정적인 걸음으로 복도를 움직였다.
품에 안겨 옮겨졌을 뿐인 카트리야가 악전고투 끝에 담요를 벗어냈을 때는 이미 침실 근처였다. 담요를 벗은 카트리야만 헉헉거리고, 루드비히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카트리야가 드디어 담요를 벗어낸 걸 보고 조금 삐딱하게 웃었다.
“기회를 드렸을 때 벗으실 걸 그랬지요?”
“걷느냐 안기느냐라고는 말씀 안 하셨을 텐데요!”
“그야 알고 고르면 재미가 없으니까요.”
“재미가 중요할까요?!”
“중요하고말고요.”
루드비히는 카트리야를 안은 채 몸을 숙여서, 다리 아래를 받쳤던 손으로 침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카트리야를 침대 위에 앉히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카트리야는 루드비히가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의 신발을 벗겨주는 것을 그저 버벅거리며 쳐다볼 뿐이었다.
왠지 숙련된 솜씨로 양쪽 신발을 순식간에 벗겨내고, 루드비히는 침대의 이불을 걷었다.
“자, 최소 하루는 침대에서 쉬셔야 하니 이만 누우실까요.”
“오후에 청첩장을 보러···”
“사도님은, 오늘, 쉬실 겁니다.”
루드비히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조금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서 덧붙였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환상통이 있을 겁니다. 아마 몸살도 나실 테고요. 나중에 뜨거운 물로 목욕하시고 마사지도 받으시겠지만, 일단 몸을 따뜻하게 하고 쉬셔야 합니다. 충격을 받은 상태니까요.”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침대에 드러누울 정도는 아니다. 담요를 뒤집어쓴 것도 창피해져서 그랬던 것뿐이고, 평소엔 그렇게 조심스러운 사람이 왜 허락도 없이 사람을 안아 올렸는지 항의도 하고 싶고, 신발을 벗겨주는 것도 사실 민망해서 싫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꺼내기 전에 루드비히는 카트리야의 다리를 침대 위로 휙 올리고 어깨를 눌러서 침대에 눕혀 버렸다. 그 와중에 머리는 정확히 베개에 닿는 위치였다.
그리고는 반대쪽 손으로 카트리야의 몸 너머 쪽 침대를 짚었다.
카트리야는 순간 굳어졌다.
위협적인 건 아니었다. 루드비히는 그저 침대에 걸터앉아 몸을 반쯤 숙였을 뿐이다. 밀치고 일어나려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언제나 안전거리를 유지해 주던 사람이 갑자기 이러니까···.
···조금 무섭다.
루드비히는 어째선지 길게 참았던 듯한 숨을 뱉었다. 어깨를 눌렀던 손에 잠깐 힘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잘생긴 얼굴이 조금 일그러져 있었다.
“왜 안 우십니까.”
이해가 가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것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루드비히는 묘한 표정이 되었다.
아침에 나갈 때 커튼을 쳐 놓고 나가서 방은 살짝 어두웠다. 그래서 그늘진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카트리야는 그 표정을 잘 읽어낼 수가 없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울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속이, 상한 것 같다.
“저희의 판단 착오 때문에 죽을 뻔하셨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말에 밟히셨잖습니까. 팔이 부러지고, 발을 삐고, 바닥에 끌리셨습니다. 그런데 왜 소리를 지르지도, 울지도 않으십니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랬을 뿐인데 왜 이 남자가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다시는 말에 안 탈 거라고, 왜 나한테 이런 걸 시키냐고 화를 내셔야지요. 이제 무서워서 싫다고. 왜 날 제대로 지켜주지 않냐고 따지셔야지요.”
“···무섭지는, 않아요.”
이해가 가지 않는 말들이 스쳐 지나가는 사이에서 겨우 잡아낸 대답은 그거였다.
무서운 건 말이 아니다. 밟히는 게 아니다. 무서운 건 또 내 한심한 꼴을 남에게 보이는 것뿐이다.
이 몸으로 말에 타기 어렵다는 걸 이해시킬 생각을 하면 아득하고, 그걸 이해시킬 때까지 몇 번을 말에서 떨어져야 하고, 그게 기사들에게 얼마나 우스워 보일지를 생각하면 끔찍하다. 우울해서 복도에 주저앉을 정도로 싫다.
그렇지만 말에 타는 건 무섭지 않았다. 아픈 것도 싫긴 하지만 무섭지 않다.
말에 타 보겠다고 내가 결정했다. 남들은 몰랐지만, 자신만은 자신이 다칠 거라는 걸 예상하고서 내린 결정이었다. 그야 머리를 밟힐 뻔할 줄은 몰랐지만, 다리 하나는 부러질 수도 있겠다는 각오를 하고서.
그런데 누구한테 왜 화를 낸단 말인가. 지켜주다니, 그 짧은 순간에 도대체 누가 뭘 할 수 있었다고.
조금 흐트러진 은발 몇 가닥이 카트리야의 얼굴 옆으로 흘러내렸다. 루드비히는 카트리야의 얼굴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왜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으십니까.”
그건.
···그건, 그러니까. ···내가, 화를 잘 못 내는 성격이라···. 당황하면 늘 말문이 막히고, 논리적으로 조리 있게 말을 하지 못해서···. 그러니까···.
루드비히의 단단한 손끝이 눈가를 살짝 건드렸다.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가 묘하게 흐려져 있는 기분이었다.
“아직도 저희가 사도님께 믿음을 드리지 못하였습니까? 저희가 사도님의 아픔을 이용하지 않을 거라고 믿기는 어려우실까요?”
“···거짓말 아니에요.”
이상하다. 아까부터 뭔가 대화가 맞지 않았다. 요즘 루드비히하고는 말이 꽤 잘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느끼는 이 어색한 감각에 또다시 불안이 밀려왔다. 주위 사람들과 자신은 섞일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은 불안감. 괴리감. 외로움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다급한 감각이다. 저들 속에 섞이지 못하면 도태되어 버린다는 위기감.
“저는, 성하를 믿어요.”
어째선지 루드비히는 더욱 복잡한 표정이 되더니 고개를 숙였다. 이마에 따스한 입김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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