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울지 않는 아이 (3)

잠깐 신나게 웃은 제이크는 금세 평소대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말에게 다가가서 한쪽 등자에 발을 얹고 올라섰다. 같은 쪽 손과 발로 안장을 잡고 등자를 밟은 채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모두가 물음표를 띄웠다. 엘피에라에게 잡혀 있던 말은 제이크를 힐끗 돌아보고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제이크는 자유로운 쪽 손과 발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자, 보셨죠? 마구를 제대로 채워 놨을 때는 이렇게, 성인 남자가 한쪽에만 매달려 있어도 문제없습니다. 사도님이 타실 만한 말이면 다 훈련 잘된 군마들이라, 사도님이 뭘 해도 어지간하면 안 넘어질 거고요. 그러니까 급하게 안장을 넘어갈 필요가 없어요.”
오호. 카트리야는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피에라와 루치아, 그리고 견학 겸 와 있던 친위대 기사들은 애매한 표정이 되었다. 제이크가 선배들에게 변명처럼 덧붙였다.
“한쪽에만 무게 실리면 말이 아파할까 봐 신경 쓰인다고 허겁지겁 넘어가려다 자세 무너지는 애들 많거든요.”
그런 걸 신경 쓴다고? 다들 긴가민가하는 표정이 되었지만 아무도 이의는 제기하지 않았다.
제이크는 등자 위에서 몸을 빙글 돌려 안장을 잡았다.
“그러니까 일단 등자에 발을 얹고 이렇게 일어서는 게 첫 단계. 안정적으로 올라서는 거죠. 그다음이 옆으로 다리를 차서 넘기는 건데···. 이건 한번 해 볼까요?”
제이크는 등자에서 뛰어 내렸다. 그리고 마구간 뜰의 울타리 중 낮은 쪽에 낡은 담요를 몇 겹 얹었다.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 높이를 재어 보고 담요를 넣었다 뺐다 해 보더니, 적당히 높게 쌓인 담요를 손으로 두드렸다.
“자, 사도님. 여기 바닥에서 울타리까지가 등자에서 안장 높이하고 비슷할 거예요. 이게 말이라고 생각하고 여기 서 보세요.”
카트리야는 시키는 대로 울타리 옆에 섰다. 제이크는 크게 깔린 담요 위에 작게 깔아놓은 담요를 손으로 두드렸다.
“이게 안장입니다. 여긴 말 몸통이고요. 안장 부분을 손으로 짚고, 다리를 옆으로 차서 울타리에 걸터앉는 거예요. 담요 깔았으니까 안 아플 거예요, 한번 앉아 보실까요?”
이번에도 시키는 대로 다리를 걷어찼다. 다리는 또 울타리에 부딪혔다. 기사들이 다 같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제이크만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다리 안 넘어가시네. 그럼 떨어지죠.”
동네 어르신들이 그렇게 말에서 한두 번 떨어지고 나면 슬슬 말타기는 그만두게 된다고, 제이크는 덧붙였다. 카트리야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동네 어르신과 비교당한 건 좀 슬프지만, 신체 능력은 큰 차이 없을 거다.
엘피에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안장 뒤로 다리를 못 넘긴다고? 사도님은?”
“20대인데요?”
루치아도 같이 의문을 표했다. 제이크가 쓴웃음을 지으며 뺨을 긁적였다.
“그게, 보통은 어릴 때 다치거나 해서 몸을 못 쓰는 사람들이 주로 그러긴 하는데···.”
“건강한 20대인데?”
제이크의 쓴웃음은 더더욱 깊어졌다.
“그야 선배님들이 보신 20대는 보통 어릴 때부터 말 정도는 타고 다닌 귀족들이잖아요? 아니면 기사거나. 처음 타는 사람 중엔 감이 없어서 말 걷어차는 사람 많아요.”
기사들은 여전히 의심을 떨치지 못한 표정으로 새파랗게 젊은 후배를 보고 있었다. 제이크는 헛기침을 하고 자기 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주는 유일한 청중을 바라보았다.
“자, 사도님! 안장에 쉽게 올라가는 요령은요, 일단 몸을 숙이는 겁니다.”
“숙여요?”
제이크는 서서 발을 뒤로 차는 시범을 보였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다리를 뒤로 차고, 허리를 숙이면서 다리를 뒤로 찬다. 허리를 숙일 때가 훨씬 높이 올라갔다.
“안타깝지만 기사님들처럼 멋있게 타는 건 일단 포기하자구요. 말 목을 끌어안는 기분으로 이렇게 엎드리는 거예요. 그럼 다리를 조금만 들면 무릎이 안장 위로 올라갈 겁니다. 그렇죠?”
제이크는 카트리야가 손을 짚을 자리를 하나하나 찍어 주었다. 카트리야는 시키는 대로 한 손은 안장 대용 담요 끝에, 한 손은 말 목 대용 담요 근처에 짚고 상반신을 숙였다. 울타리는 허벅지 정도의 높이였다. 몸을 숙이면 무릎을 허리 높이로 끌어올려 울타리 위에 얹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제이크는 실례합니다, 하고 울타리에 닿은 무릎 약간 위쪽의 옆다리를 살며시 짚었다.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여기를 기준으로 삼아서, 무릎만 그대로 펴세요. 발 조심!”
무릎을 펴다가 발등이 울타리에 걸렸다. 반대쪽으로 넘어가려던 몸은 발이 붙잡히자 균형을 잃었다. 하마터면 울타리 너머로 고꾸라질 뻔했지만 제이크가 빠르게 어깨를 붙잡아서 원래 자리로 밀어주었다. 여전히 손으로는 무릎 위쪽을 살짝 누르고 있었다.
“아시겠죠? 이게 진짜 말등이면, 이렇게 떨어지면 머리부터 땅으로 떨어져서 크게 다칩니다. 조심하셔야 해요. 제대로 앉을 때까지 팔에 힘 풀지 말고, 팔로 조금 밀어서 허리 위쪽은 살짝 세워 놓는 겁니다. 그래야 확 안 넘어가요. 자, 다시 한번. 여기 고정하고, 팔 숙이지 말고, 발은 바깥으로 둥그렇게 올려 차면서, 무릎을 폅니다!”
세세한 지시를 소리 없이 따라 읊으면서 카트리야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펴 보았다. 이번엔 안 걸렸다. 그리고 울타리 너머로 무릎과 발이 나가 버리자 자연스럽게 다리가 내려가면서 울타리에 걸터앉게 되었다.
오오, 이런 감각이군! 울타리지만 성공했어!
카트리야는 잠깐 감탄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세를 머릿속으로 되새겨보다가 인상을 썼다.
“···이거··· 좀 꼴사납지 않은가요···?”
하하하하. 제이크는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말 등에 달라붙어서 버벅거리는 느낌으로 올라가게 되니까 차마 꼴사납지 않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게··· 점점 속도가 빨라지면 아주 꼴사납지는 않아요. 다른 기사들처럼 발 넘겨서 휙 걸터 앉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니까 어쩔 수 없죠. 사도님은 일단 급하시다면서요.”
단장을 통해 제이크에게 내려온 법황의 요청 사항은 분명했다. 사도가 최대한 빨리 혼자서 말에 오르게 가르칠 것. 아무 말이나 잡아 올라탈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다양한 말에 안정적으로 오르는 방법을 익히게 할 것.
그러니 제이크도 최대한 사고가 덜 나는 기승법을 알려주고 있었다.
카트리야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담요를 내려다보았다.
괜찮은가? 주위에 기사와 전투 사제밖에 없어서 이렇게 타는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겠다. 기사들의 반응을 보면 아무래도 뭔가··· 상당히··· 체면을 구기는 방식인 것 같은데···. 내게 구길 체면이 남아 있던가.
제이크는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서 반대편의 잔디 위에 내려섰다.
“자, 마저 갈까요? 이번엔 말에서 내리는 연습입니다.”
올라올 때의 반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카트리야는 이번엔 시키기 전에 움직여 보았다. 오른 다리에 힘을 주어서 조금 엉덩이를 띄우고 왼쪽 다리를 접는다. 발목을 울타리에 걸고,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여서 내려섰다.
울타리를 무사히 넘어온 왼발은 바닥을 콱 내리찍었다. 풀 위를 디뎠는데도 발목이 저릿저릿했다.
카트리야는 낮게 신음을 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앉아 있다가 일어나는데 발도 간수 못하는 거 실화냐···.
제이크는 팔짱을 끼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의외로 내려올 때 다리 길이를 잘 못 잡더라구요. 실제로 말에서 내릴 때는 왼발은 오른발 아래로 훨씬 더 내려오잖아요? 그래서 지금 사도님처럼 바닥을 힘껏 찍거나 반대로 헛디뎌서 구르게 되는데요. 보통은 올라갈 때보다 이렇게 내려올 때 많이 다칩니다. 발목 삐는 애들 많아요. 등자에 발 빠져서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고요.”
카트리야는 힐끗 제이크의 눈치를 보았다. 딱히 비웃거나 어이없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냥 이런 사람도 있는 거지, 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넘기고 있다. 나머지 기사들은 조금 황당해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제이크가 태연한 덕에 덜 민망했다.
제이크는 바닥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뭐, 사도님이면 아마 내려올 때는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니까 제대로 내려오는 부분은 일단 미룰까요? 우선 울타리에 제대로 걸터앉고 내려오는 연습을 하고, 그게 잘 되면 진짜 말로 해 보시자구요. 그리고 추가로.”
제이크는 안뜰 구석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두 개 가져왔다. 그것을 울타리 옆에 기대어 흔들리지 않게 쌓아 올리고, 뒷짐을 진 채 나무 상자에 올라섰다가 내려왔다. 두세번 반복해서 보여주고, 카트리야를 상자 앞에 세웠다.
“등자 높이에 한 발로 올라가는 데 익숙해지는 훈련입니다.”
사실 말은 한 마리인데 타겠다는 애들이 열 명쯤 될 때 시간 끌 겸 시키는 훈련이었다.
“사도님은 올라갈 때 등자에 왼발 걸치시죠? 그러니까 상자에 올라갈 때도 왼발 먼저 올리고 오른발을 끌어 올려요. 내려올 때는 왼발 먼저 내리니까 왼발부터 내려옵니다. 루치아 사제님, 옆에 와서 받쳐 주세요.”
대체 뭘 받쳐? 루치아는 당황해하면서도 일단 다가왔다.
카트리야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자신의 허벅지 높이 정도 되는 상자에 뒷짐을 지고 올라섰다. 다리에 힘을 주며 몸을 끌어올리는 순간 몸이 뒤로 휘청했다. 루치아와 제이크가 양쪽에서 등을 받쳐서 상자 위로 밀어 올려 주었다.
똑바로 서고 나자 식은땀이 난다.
카트리야는 상자 위에 선 채 조금 떨리는 눈으로 제이크를 돌아보았다.
“이건···?”
나한테는 무리가 아닐까요?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제이크는 기운차게 손뼉을 치며 응원했다.
“괜찮아, 처음이라 그래요. 다리에 힘이 부족한 건데, 요령 붙으면 다 커버됩니다. 허리 위쪽만 살짝 앞으로 숙여서 무게중심 앞으로 실어 주시구요, 이건 등자처럼 흔들리지도 않아서 더 쉽습니다! 자, 할 수 있습니다! 사도님! 오십 번! 딱 오십 번만 연습해 봅시다! 그다음엔 울타리에 올라앉기도 오십 번 반복하구요, 루치아 님, 기초 훈련 때 사방 발차기 연습하는 거 있죠? 그것도 한 번 돌려주세요!”
오십? 10회 3세트도 아니고 스트레이트로 50?! 그리고 뭘 연습을 더 시킨다고?!!
카트리야가 항의를 하기도 전에 제이크는 루치아에게 카트리야를 맡기고 떠나갔다. 카트리야는 루치아에게 매달렸다.
“잠시만요, 루치아 씨, 너무 높은데? 상자 하나만 빼면 안 되나?”
익숙한 훈련 메뉴를 이해한 루치아는 밝게 웃어 보였다.
“그럼 등자 연습이 안 되잖아요, 오늘은 두 개로 해 봐요. 괜찮아요, 사도님 다리 길이랑 딱 맞아요, 높지 않아요! 할 수 있다! 오십 번 금방이다!”
왜 이 세계까지 와서 헬스 트레이너 말투를 들어야 하는 거지?!
잘한다, 잘한다, 영혼 없는 응원을 받으며 카트리야는 눈물을 삼켰다. 운동 따위, 운동 따위···!
- 작가의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아마 내일도 하나쯤 덤으로 올라옵니다.
새해 기념 & 옆 사이트 관작 100 (미리) 기념... 비축분은 없지만... 연휴 끝나면 관작 100이 되어도 연참을 할 수 없으므로 김칫국을...!!
꾸준한 관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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