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울지 않는 아이 (4)

“몸이 너무 안 움직여서 창피한데 창피해할 기력도 남지 않았어요.”
“그거 좋은 일이군요.”
낮은 웃음소리가 등을 타고 전해졌다. 카트리야는 고개를 살짝 젖혀서 베일 너머로 등 뒤에 앉은 루드비히를 올려다보았다.
“성하는 어떻게 제 뒤로 말에 올라오신 거죠?”
안장도 고삐도 잡지 않고 등자에 발을 넣더니, 먼저 올라온 카트리야에게는 손끝 하나 닿지 않고 훌쩍 올라섰다. 팔다리의 길이 차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다.
평범한 갈색 머리로 얼굴을 바꾼 루드비히는 눈을 살짝 접으며 웃었다.
“사도님도 배우면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
말끝에 웃음이 묻어 나왔다.
카트리야는 툴툴거리면서 도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뒤를 돌아보면 허리가 더 아프다. 말안장은 생각보다 높았고, 그냥 걸어가는데도 많이 흔들렸다. 이론적으로는 허벅지에 힘을 줘서 말의 몸통을 살짝 누르고 허리를 제대로 펴고 상체의 힘을 빼면 힘들지 않게 탈 수 있어야 할 텐데···. 뭐가 문제인 걸까. 역시 내 몸인가?
일단 사도님은 승마에 익숙해져야 한다 -> 사도님을 뒤에 태우면 떨어지지 않을까? -> 앞에 태우면 뒤쪽의 기수가 세계수를 누르게 된다. 황공하다 -> 어려운 문제이니 상급자가 해결하자!
그런 과정을 거쳐서 ‘법황 성하가 일과를 조금 일찍 끝내고 사도님이랑 같이 말을 타자’는 의문의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 매번 말은 바꿔서 타 달라는 주문을 붙여서.
그 결과가 이거였다. 앞쪽으로 모아 묶은 세계수 덩굴의 잎들이 말의 걸음걸이에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다.
“오늘은 이 말에도 혼자 올라타셨잖습니까. 장족의 발전이지요. 제 말이라 사도님 말보다 훨씬 큰데요.”
루드비히는 달래듯이 덧붙였지만 그것조차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등자에서 안장까지가 연습할 때에 비해 너무 길었다. 말의 안장에 오르느라 꽤 오래 바둥거려야 했다. 루드비히는 그린 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표정을 관리했지만, 그 뒤에 있던 알베르토와 에드윈은 웃음을 참는 데 실패했을 정도였다.
몸을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하는 걸 보고서 제이크가 팔운동도 추가하자고 루치아와 속닥이던 걸 생각하면 내일 훈련장에 나가기도 무섭다.
카트리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랴. 몸을 못 쓰는 내 잘못인 것을.
“성하는 다리가 너무 길어요.”
그래도 남은 앙금을 괜히 털어 보자 또다시 웃음이 돌아왔다. 루드비히는 고삐를 가볍게 당겨 길 가는 사람을 피해 말을 몰면서 가볍게 대답했다.
“제 키에 사도님의 다리 길이라면 꽤 슬픈 외양이 될 테니까요.”
물론 그건 슬프겠지. 예식용 로브를 겹겹이 갖춰 입어도 움직일 때마다 살짝 드러나는 탄탄하고 늘씬한 몸이 법황의 매력 포인트인 것을. 법황을 보러 몰려드는 여성 신도들과 그들이 바치는 헌금을 위해서 법황은 앞으로 한··· 20년쯤은 외모와 체형을 관리할 의무가 있다.
카트리야는 루드비히 뒤를 돌아보았다. 에드윈과 엘피에라가 말을 타고 따라오고 있다.
“이거 좀 민폐 아닌가요? 말이 셋이나 나란히 길거리를 지나가면.”
“직공소에선 어쩔 수 없습니다. 아예 큰길로 나가면 말이 다니는 길과 사람이 다니는 길을 구분하는 구간이 나오지만, 오늘은 이쪽이 목적이니까요. 다음번엔 큰길로 가 보지요.”
카트리야는 다시 정면을 보았다.
루드비히가 말을 하면 가슴이 울리는 게 느껴져서 뭔가 좀 민망했다. 앞뒤로 나란히 앉은 자세도 민망했다. 하지만 몸이 닿지 않게 조심하자는 생각은 대성전의 담장을 넘을 때쯤에 빠르게 폐기했다. 조심도 조심할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냥 잘생긴 남자가 백허그를 해 주니 운이 좋다고 생각··· 하기엔 역시 좀 민망하다···.
“갈기 쥐어뜯으시면 안 됩니다.”
루드비히가 주의를 주었다. 무심코 갈기를 휘감으려던 손을 도로 안장에 얌전히 얹고 카트리야는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 않아.
옆 골목에서 튀어나온 어린아이가 뭔지 모를 환호성을 지르면서 길거리를 가로질렀다.
루드비히는 잠깐 말을 세웠다가 다시 천천히 말을 걷게 했다.
···역시 전혀 알 수 없다. 말머리를 돌릴 때와 세울 때는 뭐가 달랐던 거지. 운전을 가르쳐 준다고 해서 조수석에 앉았는데 운전자가 뭘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런 기분이었다.
언젠가 가르쳐 주겠지. 포기하고서 카트리야는 사람들의 머리를 훑어보았다.
“오늘은 사람이 많네.”
거리가 가까워서 중얼거리기만 해도 말이 잘 전해졌다. 등 뒤에서 루드비히가 대답했다.
“어제 낮에 희사령 대상자 명단을 발표했거든요. 파문 철회가 결정된 사람들의 가족이나 지인들이 꽤 즐거워하고 있을 겁니다. 대성전에 참회 여행을 오는 사람도 있을 거고요.”
참회 여행···. 거대한 십자가를 짊어지고 목에는 밧줄을 걸고 맨발로 걸어오는 걸까? 아니면 오체투지나 삼보일배? 여름이니 비만 안 오면 괜찮으려나. 오는 길 내내 씻지 않기나 쉴 새 없이 기도하기 같은 걸 하는 여행일지도 모른다.
카트리야의 상상은 알지 못한 채 루드비히는 느긋이 말을 이었다.
“정식 철회 선고와 면죄 성사는 따로 있지만 명단에 들어가면 파문 철회는 확정이니까, 교단의 식전에 참석하는 것 외에는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선고를 따로 하는 건 글을 못 읽는 사람이나 소식이 느린 사람이 자기가 철회 대상인 걸 알도록 소식 들을 시간을 주는 절차라서요.”
“면죄 성사는 성하가 하시나요?”
“신청하면 하지요.”
말꼬리에 작은 한숨이 따라붙었다. 면죄 성사를 하기 싫은 건가, 아니면 파문 철회에서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었던 건가. 알 수 없었다.
평소 걷던 것보다는 빠르지만 달리는 것보다는 느린 속도로 말을 몰아서, 일행은 방직 조합에 도착했다.
루드비히가 내려간 다음 카트리야는 안장 위에서 다리를 접어 보았지만, 등자에 발이 닿지 않았다. 안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발을 허공에 더듬거리는 모습을 보고 루드비히는 가볍게 웃었다.
“실례할까요?”
커다란 손이 허리를 붙잡고는 가볍게 들어 올렸다. 카트리야의 몸이 훅 떠오르더니 바닥에 두 발이 얌전히 닿았다. 편하다. 이래서 제이크가 ‘내릴 때는 도움을 받자’고 했던 모양이다.
말들이 서는 소리를 듣고 방직 조합의 문이 열렸다. 그간 얼굴이 익숙해진 수습 아이가 달려 나와 말고삐를 받았다.
“어서 오세요! 사도님! 오늘은 예쁜 말 타고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조합장님하고 약속이 있는데.”
“예,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호위 기사님도 같이 들어가시나요?”
“그 기사님만 들어가고 우리 둘은 바깥에서 기다릴 거야. 말도 우리가 볼 테니 신경 쓸 거 없어.”
엘피에라가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늘 걸어와서 몰랐는데 손님이 말을 타고 오면 수습이 말도 봐주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카트리야는 루드비히와 함께 방직 조합으로 들어갔다. 작업실에 남아 작업을 하던 직공 몇몇과 인사를 하며 안쪽 응접실로 들어가자 조합장이 일을 정리하며 일어섰다. 카트리야와 루드비히에게 자리를 권하고 차를 대접한다.
그리고 어린 장인 한 명이 응접실에 들어왔다. 제일 처음 공방에 놀러 왔을 때 카트리야가 뱀 인형을 만들어 주었던 아이였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방에 들어와서 문을 닫자마자 맨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사도님! 불경한 저를 용서해 주세요!”
······무슨···?
차를 입에 대려다 굳어진 카트리야는 찻잔 너머로 눈만 굴려서 조합장을 보았다. 조합장이 헛기침을 했다.
“레비, 일어나서 제대로 말씀 아뢰거라.”
어린 장인은 그래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린 채 더듬더듬 자신이 지은 ‘죄’를 말했다.
레비라는 이 장인에게는 몸이 아픈 동생이 있다. 부모님의 벌이만으로는 동생의 약값을 대기가 어려워서 레비도 일찍부터 조합에 들어와서 직공으로 일을 시작했다. 조합장님의 배려 덕분이다. 요전 날 황공하게도 사도님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 뱀 인형도 선물로 받아서, 동생 침대 머리맡에, 동생하고 같은 방에 자니까, 머리맡에 고이 모셔 두었다. 뱀 인형을 전시하는 동안 방직 공방에 손님도 늘었고, 요정의 밤에 밤새 만든 뱀 인형들도 다 잘 팔려서, 사실 뱀보다 나뭇잎 장식이 더 많이 팔리긴 했는데, 아무튼 보너스가 두둑이 나왔다, 덕분에 새 이불을 지어서 동생이 기뻐했고 몸도 좀 나아졌다, 전부 어머니와 사도님의 은혜시다.
그런데 그만.
“사, 사도님이 손수 만드신 인형을, 팔아줄 수 없겠냐고, 사람이 찾아와서···. 제가, 돈에 눈이 어두워서, 사도님의 은혜도 모르고···!”
팔았나 보군. 턱을 고이고 이야기를 듣던 카트리야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레비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들었다.
“사도님께 허락을 구하겠다고 말을 해 버렸어요···!!”
······그걸로 끝인가?
어느 부분이 사과해야 하는 부분인지 잘 모르겠다. 카트리야가 잠깐 벙쪄 있는데 루드비히가 몸을 숙이고 귓가에 속삭였다.
“사도님이 승낙하시면 사도님의 선물을 파는 게 되고, 거절하시면 사도님이 저 아이를 난처하게 만든 꼴이 되니까 어떻게 해도 사도님께 폐를 끼칩니다. 원래 본인이 에둘러 거절해야 합니다.”
음··· 인간관계는 어렵군.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는지 루드비히는 추가로 속삭였다.
“조합의 직공은 절대 실수하면 안 되는 부분이라서요.”
아, 그런가. 직공이 말을 잘못 전해서 의뢰인들끼리 부딪치면 곤란하긴 하겠다.
카트리야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린 직공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얼마나 부르던가요?”
조합장과 루드비히의 눈초리가 조금 싸늘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레비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더듬더듬 금액을 말했다.
거절하기엔 지나치게 큰 금액이었다. 무려 평민 4인 가족의 반년 치 생활비다.
카트리야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자신이 대성전에서 처리하던 회계 서류들과 청탁용 서신들을 떠올려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금액이 너무 크다.
신의 사도에게 손수 인형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해 오는 귀족은 없지 않았다. 추기경들과 상의해서 황족을 포함한 몇몇에게는 ‘늘 초대를 거절해서 미안하다’는 편지와 함께 작은 인형을 만들어 보내 주었다. 법황의 생일 선물 급의 인형을 부탁한 쪽은 일단 대기 명단에 올렸다. 그 정도로 유행이었고 재료도 흔했다. 인형의 원가가 얼마고, 만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모두가 안다. 귀족들이 제시하는 금액은 보통 관대한 헌금 수준이었다.
그런데 저 말도 안 되는 금액으로 굳이 ‘최초의 인형’을, 대성전조차 양보한 그 뱀을 사겠다면, 독실한 신앙심 이상의 이유가 필요하다. 왠지 엘피에라에게 접근한 이단자와 연결되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저 아이가 인형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위험하다.
카트리야가 잠깐 고민을 하는 사이에도 레비의 얼굴은 시시각각 파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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