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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롱뇽
작품등록일 :
2024.10.0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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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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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3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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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울지 않는 아이 (5)

DUMMY

카트리야는 옆자리를 힐끗 돌아보았다. 루드비히는 여전히 속을 읽을 수 없는 미소를 머금고 차를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뭔가 괜찮은 생각 있으신가요?”

“대성전은 사도님의 뜻을 받들 뿐입니다.”

흠. 그 말씀, 후회하지 않으시면 좋을 텐데.

카트리야는 차마 울지도 못하고 눈물을 글썽이는 어린 장인을 일으켜 세워서 조합장 옆에 앉혔다. 조합장이 레비에게도 차를 따라 주었다.

“그 뱀인형, 지금 가지고 있을까요?”

레비는 주섬주섬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어 내밀었다. 고이 간직했다더니 때가 타지 않게 주머니에 고이 넣어 두었던 모양이다. 주머니를 열어 털자 하찮은 뱀인형이 굴러 나왔다. 작업실에 굴러다니는 하얀 털실로 몸을 만들고 검은 실 매듭으로 눈을 표시했을 뿐인 손바닥만 한 인형.

카트리야는 인형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입을 닫았다.

“미안하지만, 인형은 제가 다시 가져갈게요.”

레비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얼어붙었다. 카트리야는 어린 장인을 보고 살짝 웃었다.

“사도님한테 물어봤더니 ‘내 선물을 남한테 팔겠다니 이 괘씸한 것, 도로 내놓아라.’ 하고 가져갔다, ‘이 귀중한 인형을 갖고 싶으면 나한테 직접 연락하라’고 무섭게 화를 냈다, 고 하세요. 그래도 인형을 사고 싶으면 대성전으로 저를 직접 찾아오라고 했다고요.”

“제가 사도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다시 바닥에 엎드릴 기세인 아이에게 카트리야는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주머니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화는 안 났어요. 그런데, 그만한 돈을 주고 이 인형을 사겠다는 사람이, 안 팔겠다고 하면 그냥 넘어가 줄까요?”

레비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는 조합장을 휙 돌아보았다. 조합장이 소리 없이 고개를 저으며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카트리야는 주머니를 누르며 말을 이었다.

“돈을 받고 인형을 파는 것도 방법이지만··· 소문이 나면 도둑이 들 수도 있잖아요? 제 생각에는 물건 자체가 없어졌다고 하는 게 안전할 것 같은데··· 조합장님의 의견은 어떠신지.”

조합장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 배려해 주신다면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전시할 때 귀족분들의 매입 문의에도 거절 의사를 밝혔는데 이제 와서 다른 곳에 팔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곤란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님께서 다시 거두어 가 주신다면 문제없겠지요. 저희 교육이 부족하여 사도님께 폐를 끼쳐드리게 되어 실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팔 수는 없다. 안 판다고 버텼다간 돈이 아니라 칼을 들고 찾아올 수도 있다. 아이가 당황해서 ‘사도님에게 물어본다’고 실수해 버리는 바람에 시간을 벌어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카트리야가 조합장과 알고 지낸 지는 제법 되었지만 조합장이 ‘와 달라’고 연락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글로 남길 수는 없지만 알현 신청을 넣고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쉬운 긴급한 사태일 거라고 칼레 추기경이 알려 주었다. 서두르기를 잘했다.

카트리야는 인형이 담긴 주머니를 로브 안쪽에 잘 묶어 넣으면서 아이에게 말을 붙였다.

“레비.”

“예, 사도님!”

카트리야는 여전히 얼어 있는 아이를 보고 작게 웃었다.

“돈을 많이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민했을 텐데 바로 팔지 않고 알려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이미 줬던 선물인데 다시 가져가게 되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사도님이 주신 물건을 좀 더 조심히 간수했어야 했는데···. 자랑하고 다닌 제 잘못이에요···.”

어린 장인은 시무룩한 대로 애써 기운을 내서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미안하다. 나중에 새로 인형 하나 만들어서 보내 줘야겠다.

“동생이 아프다고 했죠. 많이 아픈가요?”

“많이 아프진 않고요, 괜찮습니다! 그냥 계단을 올라가면 숨이 막혀서 쓰러지는 정도라···!”

많이 아픈 것 같은데.

레비는 눈을 반짝이면서 열심히 설명했다.

“교구 사제님이 가끔 치료해 주시기도 하고, 또 대성전에서 음식을 자주 나눠 주셔서 밥값으로 약을 좀 더 살 수도 있구요! 물론 저희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도와줘야 해서, 저희는 그렇게 음식을 그렇게 많이 받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사도 강림 예배 때나, 그럴 때는 저희한테도 음식이 오거든요. 요정의 밤에 쿠키도 나눠 줘서, 맛있었어요!”

“음, 동생은 지병이 있어요?”

동생한테도 인형하고 약을 좀 챙겨주면 좋을 것 같다.

카트리야가 묻자 레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뭐더라? 뱃속에 있을 때 언데드한테 물렸댔나?”

그건··· 쉽지 않을 텐데.

“그래서 죽었던가···?”

살아 있다면서?

카트리야는 혼란에 빠졌다. 동생의 병을 설명해 보려던 레비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같이 혼란에 빠졌다.

“언데드 중독증입니까?”

루드비히가 불쑥 입을 열었다. 시선은 조합장을 향해 있었다. 조합장이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드비히는 카트리야의 소리 없는 질문에 조용히 대답했다.

“임산부가 언데드에게 습격을 당하고 살아남은 경우, 그 뒤에 태어난 아기들은 대체로 일찍 죽거나 이유 없이 몸이 허약해집니다. 언데드킹의 저주가 영혼이 덜 자란 태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설도 있지만 확실하진 않고···.”

대륙 최고의 치유 사제는 조금 흐린 표정으로 덧붙였다.

“치료법은 모릅니다. 신성력을 넣으면 잠깐 상태가 호전되기도 하지만 효력은 사흘도 가지 않더군요. 발견된 지 십 년 정도밖에 안 된 병이라 아직 완치 사례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보통은···.”

어린 장인을 힐끗 눈짓하고 루드비히는 입을 다물었다. 보통은 천천히 죽는다는 이야기가 생략되었으리라는 정도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카트리야는 낮게 한숨을 삼켰다. 손쓸 도리 없는 병마에 시달리는 아이를 품은 가정이 어떻게 되는지는 건너건너 들어 알고 있었다.

무엇이 효과가 있을지 몰라 손 닿는 대로 좋은 음식, 깨끗한 잠자리 같은 환경을 마련해 주다가 유명한 의사와 한의사, 신약 등을 거쳐 정체불명의 민간요법, 결국에는 사이비 종교나 죽음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 어떤 가정은 중간쯤에서 버텨 내지만 어떤 가정은 나락까지 단숨에 굴러간다.

때로는 아픈 아이 하나를 위해 집안의 모든 돈을 쏟아붓다가 아이는 잃고 빚더미만 남고, 때로는 그 아이 때문에 손이 가지 못한 다른 아이가 상처받고, 때로는 아픈 아이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웃으면서 버텨내는 집은 많지 않다고 했다.

의료 보험이 있는 세상에서도 긴 병은 무서웠는데 이 세상엔 보험조차 없지.

조합장은 표정이 조금 굳은 카트리야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신성력에 계속 노출되면 상태가 좀 좋아진다고 합니다. 여기 레비네 가족들은 동생이 뱃속에 있을 때 모친이 리치에게 습격을 당한 적이 있다고, 아기를 안고 이사 왔지요.”

“맞아요, 전 기억 안 나는데 저희 집이 없어졌대요. 다른 친척들은 더 북쪽에 살거든요. 그때 동생이 뱃속에서 물렸대요. 그렇구나, 이름이 언데드 중독증이구나?”

레비는 동생의 병명을 열심히 입 안으로 되풀이했다.

“가족들이 다들 애쓴 덕분인지 레비의 동생은 언데드 중독증치고는 잔병치레가 많지 않은 편입니다. 외출은 어렵지만 손재주가 좋아서 요즘은 침대에 누워서 뜨개질로 이것저것 만들어 보는 데 재미를 붙였다고 하지요. 사도님이 유행을 만들어 주신 덕입니다.”

조합장의 시선은 카트리야를 스쳐 루드비히에게 향했다.

카트리야는 왠지 익숙한 소외감을 느꼈다. 본인에게 아부하는 게 민망해서 나온 시선 처리가 아니다. 언젠가부터 조합장이 자신이 아니라 루드비히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그렇든 말든, 동생 자랑을 할 기회가 생기자 레비는 인형을 잃은 아픔을 잊고 기운을 되찾았다.

“제가 가르쳐줘서요, 제 동생도 종일 뜨개질 하고 있어요! 요전 날 가르쳐 주신 장바구니 만드는 거, 그걸로 동생이 바구니를 만들었거든요. 옆집 아주머니가 장조림이랑 바꿔 주셨다고, 동생이 엄청 자랑했어요.”

장바구니 뜨기는 카트리야가 알려 주고 방직 조합에서 공개한 도안이었다. 일반인도 부업으로 용돈벌이 정도는 할 수 있다. 레비의 동생도 침대에서 종일 장바구니를 만든다, 장바구니 말고 목도리나 방석도 잘 뜬다고 레비는 자랑을 풀어놓았다.

어른들은 잠시 맞장구를 치며 아이의 기분이 풀리기를 기다려 주었다.

“레비가 아직 무늬뜨기를 배우지 못해서 말입니다. 동생한테 가르치지도 못하니 동생도 무늬 없는 물건만 만든다더군요. 안타깝지요?”

적당한 타이밍에 조합장이 옆에서 한마디를 거들었다. 레비는 조금 부루퉁한 표정으로 너무 어렵게 가르쳐줘서 그렇다고 조그맣게 툴툴거리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카트리야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너무 오래 잡아두면 방해겠네요. 무늬뜨기를 빨리 배워야 동생한테도 가르쳐 주지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레비.”

이만 나가 보라는 눈치에 레비가 벌떡 일어났다.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아이를 보고 카트리야는 문득 질문을 던졌다.

“레비 씨는, 행복한가요?”

“네!”

레비는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동생이 좀 더 건강해지면 좋겠지만 그것 말고는 너무 좋아요. 일도 재미있고, 선배님들도 다들 잘해 주시고, 요즘 날씨도 좋고, 대성전 종소리도 예쁘고요! 그리고 동생은, 법황 성하가 계시니까 괜찮아요!”

괜찮은가? 치료 못 한다는데?

카트리야는 조금 의문을 품었다. 레비는 기운차게 말을 이었다.

“법황 성하는 어머니께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언데드 병도 곧 없어지고 동생도 건강해져서 같이 놀 수 있을 거예요. 저희 부모님이 항상 그러거든요. 저하고 제 동생은 기적을 일으킨 성하하고 세계수를 기르는 신의 사도님이 같이 계신 축복받은 시대에 태어났다, 신께서 가까이에서 지켜보실 테니 다 괜찮을 거라고요. 그러니까 전 다 괜찮고, 매일 행복해요!”

그리고 아이는 더없이 예의 바른 인사를 남기고 응접실을 나섰다.

카트리야는 이젠 식어버린 찻잔의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축복받은 시대라.

“달팽이는 나무 위에 있고 주님은 하늘에 계시니 온누리는 평화롭다··· 던가.”

그런 시가 있었다. <빨강머리 앤>의 프리퀄에서 앤이 노래하던.

법황은 대성전에 있고 어머니는 하늘에 계시니 이 세계는 평화로우려나?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계의 신께선 저를 불러 오는 것보다 급하게 해야 할 일이 많으셨던 것 같은데 말이죠. 달래 주어야 했던 아이들이 너무 많으신데.”

푸념처럼 흘리는 말에 루드비히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가 보기엔 카트리야도 ‘달래 주어야 하는 아이’이지만 본인은 지금 나간 어린 장인이나 에다를 두고 하는 말일 거다.

“사도님께서 저 아이들을 달래 주시게 될지도 모르지요?”

“울지 못하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는 건 멋진 어른만 할 수 있는 일이랍니다. 전 웃자라서 글렀어요.”

농담처럼 건넨 말에 카트리야는 한숨처럼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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