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영혼이 가는 곳 (1)

“조합장님.”
조합장이 조금 풀어졌던 자세를 바로잡으며 카트리야를 바라보았다. 카트리야는 담담히 말했다.
“내일 지나서 언제 한가하실 때 대성전 재경소에 들러 주세요. 저쪽이 부른 인형 값, 쳐 드리겠습니다.”
큽. 곁에 있던 대성전 지출 서류 최종 결재자가 갑자기 사레에 들렸다.
카트리야는 그쪽은 외면했다. 뭐. 왜. 대성전은 사도님의 뜻을 받드시겠다며.
“저쪽 제시가대로 사는 건 좀 그러니까··· 조합장님 재량에 맡기겠습니다. 저쪽보다 한 10%? 안 되도 5% 정도는 더 받아내셔도 괜찮을 거예요.”
“괜찮··· 으시겠습니까?”
조합장이 카트리야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떨리는 눈은 또 루드비히 쪽을 힐끗 보았다.
카트리야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문질렀다. 역시 들킨 거지.
“어떻게 알아보셨어요?”
조합장은 마른세수를 하고 루드비히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성하. 보는 눈이 있어 제대로 예를 갖추지 못하였나이다.”
루드비히는 손목의 아티팩트를 확인하고 찻잔에 남은 찻물로 얼굴을 확인했다. 외모 변경은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데 중간부터 조합장은 그의 정체를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루드비히도 어느 부분에서 걸렸는지 조금 신경이 쓰였다.
조합장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두 사람을 보고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저희야 귀족분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때로는 신분을 숨기고 오시는 분도 있지만, 그런 분을 진짜로 평민 대하듯 할 수도 없으니··· 미행하시는 귀족분들을 알아보는 건 나름대로 목숨이 걸린 문제지요. ···성하께서 신분을 숨기실 생각이면, 사도님의 호위 기사가 물러날 때 같이 물러나 주셨으면 좋았을 겁니다. 귀족 여성의 호위 기사가 여성과 단둘이 남기는 남성은 보통 가족이나 약혼자뿐이니까요.”
어쩐지 호위 기사한테 자리를 권하고 차를 내주더라니.
루드비히는 깊이 반성했다. 여자를 호위해 본 경험이 없어서 생각을 못 했다. 누군가 한 명이 카트리야 옆에 남는다면 당연히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조합장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긴가민가했습니다만, 사도님께서 인형의 처분에 관해 먼저 성하의 의견을 물으셔서···.”
모르는 척하기엔 너무 수상했던 모양이다. 카트리야도 반성했다. 호위는 투명 인간 취급을 하라고 헤이즐도 샐비어도 몇번이나 잔소리를 했지만 아무래도 몸에 배지 않는다.
루드비히는 쓴웃음을 지으며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내고 카트리야를 돌아보았다. 눈에 살짝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인형값은, 사도님 예산에서 지출하는 겁니까?”
“일단은요···? 대성전에서 내시면 인형은 드릴게요.”
으음. 루드비히는 살짝 미간을 구기면서 턱을 쓸어내렸다. 이번 분기 남는 예산이 있었던가. 다음 분기로 넘겨야 하나. 찾아보면 어딘가에서 발굴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칼레 추기경과 상의해야 하는 큰 금액이라 잘 모르겠다.
“사도님 예산이라도 이런 데 쓰면 칼레 예하가 잔소리를 할 텐데요.”
“그 부분에는 대비책이 있습니다. 요는 쓴 만큼 벌면 되는 거죠?”
루드비히는 고개를 갸웃했다. 재경소에서는 그렇지만··· 카트리야의 인형이 그렇게까지 비싸게 팔리지는 않을 텐데. 무슨 방법이 있는 걸까.
조합장이 카트리야를 향해 살짝 몸을 틀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제안에는 감사드립니다만 인형값은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이의 실수를 관대히 용서해 주시고 아이를 지켜 주시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은혜지요. 이 기회에 레비도 배워야지요, 장인이 자신의 물건을 지키려면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요.”
“저쪽이 금액을 제시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제시했는데 무료로 받는 건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제가 이 세계에 익숙지 않아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물건을 함부로 건네주었는 걸요. 그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생각해 주셔도 무방합니다. 저 가족도 지금이야 아쉽다로 끝내지만 동생의 치료비가 계속 들면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조합장이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는 이내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카트리야는 잠시 기다렸다가 조합장이 별말을 하지 않자 다시 말을 이었다.
“저희 세계에 ‘공짜보다 비싼 건 없다’는 말이 있거든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돈으로 해결하게 해 주세요. 단, 현금으로 내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루드비히가 옆에서 가볍게 무릎을 손끝으로 다독였다. 잘 말했다고 칭찬해 주는 것 같다.
조합장도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레비의 이름으로 대성전에 계좌를 열고 필요할 때 본인만 찾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 두겠습니다. 입단속도 다시 한번 교육해 놓도록 하지요.”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섬세하신 사도님을 보내 주신 데 대해 어머니께 감사드립니다.”
조합장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표정과 자세를 관찰하던 루드비히는 조용히 찻잔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조합장께서도 비슷한 일로 고생하신 적이 있는 모양입니다.”
조합장은 잠깐 법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젊은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원래 소꿉친구와 같이 방직공이 되었는데, 제 친구가 정말 손재주가 좋았지요. 그 친구가 어느 귀족분의 특별 주문을 받아 만들던 물건이 공방 후원자인 다른 분의 눈에 띄어서···. ···다행히 주문해 주신 분은 기한을 연장해 줄 테니 물건만 주면 저희의 잘못은 불문에 부치겠다고 해 주셨습니다. 다 같이 서둘러서 작업을 했습니다만···. 새 물건을 완성하기 직전에, 친구가 강도를 당해서 말입니다. 목숨엔 지장이 없지만, 장인의 생명인 손이 망가졌지요.”
여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려 나왔다. 자기 손목을 만지작거리는 손끝도 떨리고 있었다.
“마무리 작업은 그 친구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 결국 조합은 계약을 이행하지 못했습니다. 그 친구의 재산 대부분에 조합의 비상금까지 털어 위약금은 간신히 맞췄지만 조합엔 빚이 생겼고, 이후 귀족들의 주문은 끊겨 버렸지요. 당연합니다. 조합은 신용이 생명이니까요. 빈털터리가 된 제 친구는 죄책감과 절망감 때문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저는, 그 뒤에 조합의 빚을 갚을 겸 외부로 파견을 나왔다가 돌고 돌아 성도까지 오게 되었지요. 지금은 조합장씩이나 하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이런 일이 생기면 조금 등골이 서늘할 때가 있습니다.”
“고향의 치안이 그리 좋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생각보다는 괜찮은 곳이었습니다. 제 친구가 강도를 당한 게 거의 20년 만에 생긴 사건이었지 뭡니까.”
조합장도 루드비히도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의심은 짐작이 갔다. 아름다운 물건을 만든 장인이 똑같은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만들어 주지 못하게 죽이거나 몸을 망가뜨린 이야기는 카트리야도 익숙했다.
조합장은 짧게 기도를 중얼거리고 눈을 들었다. 조금 지친 얼굴로 웃어 보인다.
“그 친구야 크게 지은 죄는 없으니, 지금은 어머니 곁에서 재료값 걱정 없이 늙지도 않고 저 좋아하는 천짜기나 신나게 하고 있겠지요. 어쩌면 다른 취미가 생겼을지도 모르고요. 저처럼 회계 장부를 붙잡고 쩔쩔맬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부럽기도 합니다.”
“친구분의 영혼에 어머니의 가호가 함께하시기를.”
루드비히는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성호를 그렸다. 조합장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법황 성하께서 직접 말씀을 주시다니 분에 넘치는 영광이군요. 제 친구를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역시 친구를 대신해서 조금 은혜를 갚아 볼까요.”
조합장은 장부들 속에서 편지 봉투를 꺼내서 두 사람 앞으로 내밀었다. 루드비히가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봉투를 집어 내용물을 펼쳤다. 한눈에 내용을 훑어보고 루드비히는 조합장을 보았다.
“괜찮습니까?”
레비에게 인형을 팔라고 찾아온 남자 두 명의 외모와 특징, 그들이 찾아온 시간대, 평민가에 들어와서 움직인 동선까지 전부 정리되어 있었다.
조합장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법황도 농민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대성전과 전쟁터에서만 자랐다. 평민과 빈민들이 낯선 사람을 얼마나 경계하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는지는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추기경들에 비하면 아직 한참 젊다는 걸 이럴 때 느낀다.
“조합에서 정체불명의 귀족 의뢰인을 확인하느라 이웃에게 몰래 정보를 모으는 정도는 다들 익숙하지요. 대부분 입을 다물어주기도 하고요. 다들 생각나는 대로 대답한 거라 앞뒤가 안 맞는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만, 조사에 착수하실 때 참고 정도는 되실 겁니다. 단, 성하의 사람들이 찾아가서 정보를 확인하신다면 아무도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 없고 그런 사람은 본 적 없을 겁니다.”
루드비히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봉투에 다시 넣어 품에 갈무리했다.
“성전 도시는 그래도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대성전의 신뢰도가 아직도 그 정도라니, 반성이 되는군요. 정진하겠습니다.”
“성도는 훌륭한 곳입니다, 성하. 그저 저희는, 뭐랄까요, 덩치 큰 말들 발치를 돌아다니는 쥐새끼 같은 존재들이라서요. 말들이 생각 없이 지나가기만 해도 저희는 밟혀 죽습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는 법이지요.”
“원망은 안 되시나요?”
오랜만에 카트리야가 입을 열었다. 조합장은 카트리야를 돌아보았다.
신의 사도는 진지한 표정으로 조합장을 보고 있었다.
“친구분을 잃은 것이나, 레비가 아무 잘못도 없이 위험해진 거나, 그렇게 경계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나···. 그런 건, 억울하지 않으신가요? 신께서 돌봐 주셔야 했는데 게으르셨다거나···?”
조합장은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신의 사도라도 법황 앞에서 하실 말씀이 아닐 텐데.
하지만 법황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도님은 늘 그렇듯 꿍꿍이 하나 없는 맑은 눈으로 조합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자면.
“억울하던 때도 있었지요.”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친구를 그렇게 어이없이 잃고 분노에 휩싸여 잠조차 이루지 못한 날도 있었다. 그 뒤로도 높으신 분들의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접할 때마다 울분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도 그런 날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사도님. 신께서 저희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저희에게 좋은 일만 생기도록 해 주시는 분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신께서 계시지 않으셨으면, 저희의 인생은 얼마나 비참했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카트리야는 당연히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인생은 신이 있든 없든 비참했으니까.
“귀족이든 평민이든, 그분께서는 저희를 지켜보고, 저희가 겪는 모든 일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제 고향에서는 감히 입에 담지 못하는 친구의 이름도, 그 사람의 짧은 인생도, 그 황당한 죽음도, 그분은 전부 기억하고 돌보아 주시겠지요. 그조차 없는 인생이란 얼마나 헛되겠습니까.”
- 작가의말
끼이이야아악!! 1시 57분에 예약 걸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이런저런 사태로 백수가 되었다가 2주 전부터 갑자기 수습+알바로 주7일을 일하고 있습니다.(1주 출근하고 1주 쉬었지요. 하하.)
조만간... 한번쯤 지각해도 너그러이 이해를...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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