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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롱뇽
작품등록일 :
2024.10.0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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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2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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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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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25. 울게 하소서 (4)

DUMMY

늙은 음유시인은 새하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고백을 시작했다.

미약한 신성력으로 사람들을 치유하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니던 음유시인은 은퇴 여행에 나섰다. 그리고 어떤 숲속에서 사냥용 함정에 떨어져 피를 흘리고 있는 아이를 구했다. 어찌어찌 급한 출혈은 막아냈고, 아이의 부모가 치유 사제를 찾아 주교좌 본당으로 마차를 달릴 시간을 벌어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감사의 뜻이랍시고 음유시인에게 여자를 대접해 주었다. 자기네 마을의 창녀라면서.

숲속의 외딴집에 있던 여자는, 아니, 소녀였다. 왠지 어린 시절의 딸을 떠올리게 하는 갈색 머리의 평범한 여자아이.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어서 나가려는 음유시인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허겁지겁 옷을 벗으려고 했다. 조금 어눌한 말투로 손님을 잘못 대접하면 자기가 맞는다고, 아플 거라고, 나가지 말아 달라고 매달렸다.

그래서 음유시인은 그날 하룻밤을 그 집에서 머물렀다.

달리 할 일도 없었다. 불쾌하고 놀란 가슴에 잠도 오지 않았다. 그냥 불을 끈 집에서 달빛에 기대어 에다와 이야기를 나눴다. 경계심이 풀어진 에다가 새벽이 되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 때까지, 고작 몇 시간. 하잘것없는 이야기를 주섬주섬 주워섬겼다. 짧은 노래를 한두 곡 불렀다.

에다는 남자 어른하고 긴 이야기를 한 게 처음이라고 신기해했다. 남자 어른은 자기를 아프게 하니까 싫다고, 여자 어른은 화를 내니까 무섭다고 했다. 그래도 여자들은 먹을 걸 줘서 남자보다 좋다고 했다.

음유시인에게 딸이 있다는 말에 자기한테도 아빠가 있다고 허둥지둥 자랑을 했다.

“통행증은 그때 보여 줬습니다. 비밀이라고, 엄마가 준 보물이라면서요. 엄마를 좋아하는 사제님이 있는데 먼 곳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엄마가 먼 데 가서 사제님이랑 결혼한 뒤에 자기를 데리러 오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그럼 엄마하고 아빠가 생기니까 자기도 마을의 다른 애들처럼 살 수 있을 거라고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선 살 수 없었던 건지.

그날 에다를 처음 만난 음유시인은 잘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둠 속에서 통행증을 소중히 감싸 쥐던 모습만은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되었다. 

“그 말을 믿지 않으셨군요.”

로랑 추기경이 나지막이 말했다.

음유시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깊게 주름진 눈가에 한층 더 깊은 주름이 잡히고, 푸른 눈이 눈꺼풀에 가려졌다.

“제가 배운 건 없으나 세상 구경만은 많이 했습니다. 여행 사제가 자기 통행증을 몸에서 떼어 놓는 건 죽을 때뿐이라는 건 압니다. 혼배 성사에 몇 년이 걸릴 리도 없지요. 아이의 부친이 되어 준다던 사제님은 죽었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니 뒷배 없는 어린아이를 ‘마을 신부’로 삼은 게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아이의 어머니도 똑같은 상황을 견디다 못해서 딸을 놓고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냥 그렇게 짐작했습니다.”

마을 신부. 낯선 단어다. 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고도 남았다.

로랑 추기경이 진술 자료를 보며 다시 확인했다.

“에다의 모친에 대해서는 어떤 증언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하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근거는 없습니다. 허나 여행 사제의 통행증을 들고 유품을 전하러 가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이 대륙의 모든, 아니, 거의 모든 사제와 성기사들이 대성전까지 데려다주었을 겁니다. 성인 여성이라면 그 정도는 알았겠지요. 그런데도 그 부인은 통행증을 딸에게 주고 숨기게 했습니다. 본인조차 통행증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된 게 아니겠습니까.”

마을 전체가 공모해서 여행자들을 붙잡는다. 남자를 인질로 잡고 여자를 노예로 부린다. 남자가 죽거나 자살하면 아이를 인질로 잡는다. 여자가 달아나면 아이는 죽이거나, 다음 노예로 삼는다.

그런 일이 없지 않던 시대였다.

피고석의 늙은 사제는 들리지 않는 척 눈을 내리깔고 고요히 앉아 있었다. 워렌 사제 이전, 루시엔 마을을 15년 가까이 담당했던 교구 사제였다. 늙어서 은퇴했다지만 감히 법황의 소환 명령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를 노려보는 음유시인의 파란 눈에 차가운 불꽃이 타올랐다.

“저자가 상황을 몰랐다는 주장을 어찌 생각하냐고요? 삼가 답하겠습니다, 예하. 적어도 지난 10년 사이, 그 마을에 잠시라도 지내본 사람이면 절대로 그 상황을 몰랐을 수가 없습니다.”

“에다 씨가 지능이 떨어져서 본인의 상황을 몰랐다는 말에는, 동의합니까?”

다시 질문이 떨어졌다. 음유시인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절대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확신합니까?”

“확신합니다. 사람과 대화할 일이 없고 겁이 많았을 뿐이지, 그 아이는 제 손으로 집안 살림을 할 만한 능력은 있었습니다. 자신은 다른 마을 사람들하고 다른 대우를 받고 있고,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는 행동이 싫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달아날 의사도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충분하고도 남았다.

음유시인은 드라마틱한 목소리에 분노를 담아 내뱉었다.

“저 같은 외지인이 사정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만, 에다라는 소녀는 분명히 끔찍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있던 젊은 사제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건 어머니의 뜻을 어기는 부당한 일이다, 저 아이를 보호해 주거나 최소한 도망치게 해 주어야 한다고요.”

하아. 로랑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 부분에 대한 증언은 처음부터 확보되어 있었다. 이 음유시인은 성도로 돌아와 주위 사람들에게 교구 사제가 구제하지 않는 교구민을 돕는 방법을 묻고 다녔다. 그것이 교단에 거역하는 말로 들린다는 주의를 받고 더 이상 큰 소리로 말을 하지는 않게 되었지만, 적어도 언데드의 정보를 찾아다니던 엘피에라의 귀에 들어올 정도로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걱정하는 말을 꺼냈다고 한다.

“증인이 에다의 상황을 고발한 사제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워렌입니다.”

“그 사제는 뭐라고 답했습니까?”

음유시인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사람에게는 각자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내리깔렸다.

음유시인은 살짝 떨리는 두 손을 맞잡았다. 손마디가 새하얗게 변했다. 종교 재판에서 꺼내기는 무서운 말이지만, 해야 했다.

“성도에 돌아와서 저희 교구의 사제님께 고해성사를 하고 다른 분들께 상담도 했습니다만, 절반은 제 말을 믿지 않았고 나머지 절반은 사제들께서 뜻하시는 바가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교구 사제가 묵인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다, 신학도 제대로 배우지 않은 제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찾아온 기사는 말했다. 그 소녀는 결국 그곳에서 살해당했고, 시신은 이 대성전의 납골당에 쓸쓸히 머물러 있다고. 그 마을의 사제와 주민들은 그 소녀가 어떤 부당한 대우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증인도 증거도 부족해서, 그래서 그 아이의 죽음을 이대로 묻게 될지도 모른다.

그 말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음유시인을 은퇴하면서 정리할 건 다 정리했다. 얼마 남지 않은 목숨, 이단으로 몰려 대성전의 감옥에서 보내게 되어도 상관없었다. 이곳에 오지 않으면 남은 생은 죽느니만 못한 죄책감 속에 지나갈 것이다.

죽은 뒤 신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게 되느니 이 자리에 서야 했다. 몇 년 전, 제 목숨이 아까워서 그 가엾은 아이를 구해주지 않고 조용히 마을을 떠났던 죄를 이제 신께서 묻고 계셨다.

“그런 말에 물러서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누구라도 들어주실 때까지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저라도 포기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제가, 비겁하고 태만했습니다. 그래서 구할 수도 있었던 아이를 죽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부디 벌을 내려 주십시오.”

이후로도 몇 명의 증인이 오갔다. 늙은 사제의 변호 기회도 있기는 했지만, 종교 재판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교구 사제의 지리멸렬한 변명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이미 마비언의 여정이 끝난 장소와 시간대를 알게 된 비브리다 추기경이 클레멘트 교구의 옛 기록을 샅샅이 뒤진 후였다.

근처 마을의 성전 일지에서 마비언의 방문 기록이 나왔다.

<여행 사제 마비언, 귀향 중. 운명의 여성을 만나 정착하기로 했고, 귀여운 딸까지 한꺼번에 생김. 대성전에서 법황 성하께 혼배 성사를 청할 예정. 부디 어머니께서 사랑하는 베스와 아기 에다의 앞날을 축복해 주시기를. 둘 다 대성전을 좋아하게 되기를. 다음 예정 숙박지, 루시엔 성전.>

낡은 종이 위, 기쁨에 취해 춤추는 글씨가 되려 보는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이루어지지 않은 기도는 마비언이 루시엔으로 이동했다는 증거였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루시엔 교구의 성전 일지를 크레센트 수도원에 보낸 결과, 성전 일지가 조작된 흔적을 찾아냈다. 교구 사제가 지운 글씨를 복구하자 마비언의 방문 기록이 나왔다.

늙은 은퇴 사제에게는 동료 사제를 보호하지 않은 죄, 여행 사제를 다음 마을로 무사히 보낼 의무를 방기한 죄, 종교 재판에서 거짓 증언을 한 죄, 교구민 학대와 방치, 심지어는 신성력 시험 결과 조작까지 온갖 죄목이 선고되었다. 파문 및 종신 노역형이었다. 콘라드 추기경이 지난 20년간 루시엔 마을 근방에서 나온 신원 불명의 시신들을 모조리 수사하고 나서 추가 죄목이 발견되는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단서 조항까지 붙은 선고였다.

유사한 죄를 지은 후임 사제는 다른 날 재판을 진행하기로 했다.


음유시인은 에다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짧게 기도를 올렸다.

목깃을 높이 세운 사제복을 입고 두 손을 조용히 배 위에 얹은 채 누워 있는 모습은, 이렇게 말하면 미안하지만, 편해 보였다. 꽃다발과 작은 인형들에 둘러싸인 시신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행복해 보였다.

생전에 이렇게 이 아이에게 마음을 써 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이 아이도 이 차가운 납골당에 누워 있지 않고 저 바깥의 햇살 아래에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날, 그 뒤에, 자신이 조금만 용기를 냈더라면.

그렇게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고작 하룻밤 이야기를 나눈 상대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쓰이는 건 역시 딸과 비슷해 보여서일까.

음유시인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옷깃으로 슥슥 문질렀다. 늙으니 눈물이 많아져서 큰일이다.

“감사합니다.”

등 뒤에서 차분한 인사가 들려왔다.

음유시인은 흠칫 놀라서 돌아섰다. 납골당 입구에 긴 베일을 쓴 사제가 서 있었다.

···아니.

사제의 비스듬한 뒤쪽에 선 붉은 머리의 여기사가 눈에 익었다. 자신에게 증언을 해 달라고 찾아왔던 기사였다. 성전의 사제를 믿지 않았다고 이단으로 몰리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사제들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걸 증언해 달라고 호소했던 사람. 저 사람이 그 유명한 ‘탕녀 엘피에라’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엘피에라가 호위할 여자라면.

음유시인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죄인이 신의 사도를 뵙습니다.”



작가의말

다음... 바라건대 하나... 최대 두 편 정도까지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만...

우울 지수가 상당히 높은 편이 될 예정입니다.

답답한 게 싫으시다면 묵혀뒀다 읽으시는 걸 추천합니다. 쓰는 저도 우울하거든요.

이렇... 이렇게까지 괴롭힐 예정은 아니었는데... 제가 어디서부터 잘못 짠 거죠... 수습이 안 되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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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69 성잔화
    작성일
    25.02.14 14:04
    No. 1

    이야기라는게 그렇죠.
    꼭 기획하지 않은 방향으로 튈때가 있단말이죠.

    아이고.... 에다야...... 누군가 좀더 뻗어줄 손이 있었더라면....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5 n7******..
    작성일
    25.02.14 16:53
    No. 2

    그래도 해결되어 가는 과정이니 잘 읽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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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26. 상처 받은 짐승 (4) +2 25.02.23 20 4 11쪽
101 26. 상처 받은 짐승 (3) +2 25.02.21 18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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