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울게 하소서 (5)

죽은 이들을 인도하는 성인의 이름을 쓰는 신의 사도는 낮게 웃으며 다가왔다.
“에다 씨를 알던 사람 중에 이 아이의 죽음을 애도해 주는 건, 음유시인님뿐이네요.”
사도는 에다의 얼굴을 손끝으로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그 손길은 명백한 애도를 담고 있었지만 신의 사도는 에다를 생전에 만난 적이 없다. 그러니 에다를 ‘알던’ 그 마을 사람들은 그 누구도 애도를 표해 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신의 사도가 이 몸에 잠시 깃들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것 때문에 말이 많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신의 사도는 자신이 처음 강림했던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돌봐주고 있는 것 같았다.
에다에게는 죽은 뒤에 비로소 친구가 생겼나 보다.
음유시인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씩, 조금씩이 부족했다. 자신이 조금만 용기를 냈더라면, 신의 사도가 조금만 일찍 강림했더라면. 마을 사람들이 조금만 더 양심적이었더라면. 모두가 조금씩 늦고 부족한 탓에 한 아이의 인생이 나락으로 굴러떨어졌다.
조금 더 이상적인 세계는 언제나 눈앞에서 사라진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희망을 좇아서 사람들은 언제나 발버둥 친다.
그런 애틋한 이야기를 노래하며 평생을 먹고살았지만, 그래도 음유시인은 이제는 모두가 행복하게 웃으며 끝나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슬프고 괴로운 현실에서 조금은 눈을 돌리고 싶었다.
그래서였다.
“괜한 희망을 주었던 걸까요···.”
신의 사도는 눈을 들어 음유시인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은 습관인 듯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음유시인은 그 해맑은 시선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깔며 낮게 읊조렸다.
“저는, 이 아이에게··· 마을 밖에 나가면 큰 마을이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클레멘트 주교구의 주교좌 본당이 그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았거든요.”
주교좌 본당. 카트리야도 기억했다. 게오르그 대주교가 머무르던 곳.
루드비히가 그곳에 들렀다가 체칠리아 기사단을 지원하러 와서 처음 만났다. 순찰하는 속도로 느긋하게, 마을을 나가서 며칠 안 되는 곳에 주교좌가 있었다. 대성전에서는 마차로는 7일. 그럼 그 마을에서 주교좌 본당은 어쩌면 멀지 않았겠다.
“네 아버지가 준 보물을 가지고 주교좌 본당의 사제님을 찾아가면 그 사제님이 아버지를 찾아줄 거라고, 말해 버렸습니다. 걸어서 보름만 가면 된다고요. 무서운 사람들을 피해서 숲속으로 가면 한 달. 딱 세 상자만 먹을 걸 챙겨서 큰길을 따라서 여행을 가면 사제님이 네 아버지를 찾아줄 거라고 말했습니다. ···제 딴에는 뭐라도 위로가 될 말을 해 주고 싶었던 건데 말입니다.”
···뭐?
카트리야의 온몸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음유시인의 목소리는 잔인할 정도로 또렷하게 귀에 내리꽂혔다.
“엄마가 오지 않아도 아빠를 만날 수 있냐고, 다른 마을의 사제님은 안 무섭냐고, 몇 번이나 물어보더군요. 그땐 기뻐하는 모습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루지 못할 희망을 괜히 알려주었나 싶어서, 그게 마음에 걸립니다. 혹시 제 말 때문에 마을을 떠나려고 하는 바람에 살해당한 건 아닌가 싶어서···. ···제 경솔한 발언을, 이 아이가 용서해 줄까요.”
음유시인은 서글픈 눈으로 에다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성호를 긋고 조그맣게 기도를 올렸다.
그 옆에서 카트리야는 그저 하얗게 굳어져 있었다.
에다의 집 지하실에 있던 보존 식량은 상자 다섯 개였다. 치즈와 육포. 소시지. 잼.
상자 3개라고 했는데 5개를 준비한 이유는 짐작이 갔다.
똑똑하고 멋있는 음유시인 할아버지는 3개면 되지만 나는 멍청하니까 좀 더 많이 준비해야지. 난 바보라서 길을 잃을지도 모르니까. 음식이 썩을지도 모르니까. 그럼 굶다가 아빠를 못 만나게 될 테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혹시 좀 남으면 아빠랑 나눠 먹으면 되니까.
그런 생각으로 넉넉하게 모았을 것이다. 5개보다 많이 들고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걸 다 모으고 얼마나 기뻤을까.
이제 이걸 들고 큰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그럼 나한테도 아빠가 생길 거라고. 엄마도 같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이제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얼마나, 얼마나 행복했을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가족을 찾으러 가려고, 이제는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 자신을 강간하고 학대하는 사람들에게 매달려서 아등바등 모았을 그 식량을.
그걸 내가 어떻게 했던가.
내가, 내가 감히 그 귀한 식량을 어떻게 했던가.
굶어 죽어도 에다의 비상식량에 손끝 하나 댈 자격이 없는 것들에게,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새끼들한테, 내가 그걸 줘 버렸다.
에다는 좀비니까 음식 따위 필요 없다고. 어린애들도 있으니까 나눠 줘야지, 하고 멋대로 가져다줘 버렸다. 그런 놈들한테. 그들이 에다의 식량으로 만드는 스튜 냄새가 동굴 바깥까지 새어 나오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구역질이 났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내가 또, 또 무슨 주제넘은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침대에서 눈을 뜨는 순간 그 모든 생각이 머릿속을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카트리야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납골당에서 어떻게 나와서 어떻게 여기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침대에서 발을 내리는 그 짧은 순간에 눈물이 흘러넘쳤다. 숨이 막혔다.
신이시여.
이 세계의 신아.
무능한 신, 자기 법황도 지키지 못하는 이 빌어먹게 한심한 신아.
왜 네 아이를 죽도록 놔둔 걸로도 모자라서 죽은 뒤에까지 모욕해야 했는데. 왜 그 모욕에 나를 써야 했어. 대체 왜. 내가 내 세상에서 한 짓으로 부족해서? 내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해서 날 죽인 걸로도 부족했어? 그래서, 그래서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까지 죽이라고 불러왔어?
에다가 뭘 잘못했는데. 뭐가 나빴는데.
그냥 태어났을 뿐이잖아, 힘껏 살았을 뿐이잖아. 왜 잘못한 인간들은 살려두고 잘못 하나 없는 사람만 괴롭히고 죽이는 건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도대체 왜 세상은 언제나 그렇게 생겨먹었고 도대체 왜 착한 사람들이 고통받아야 하고 도대체 왜 도대체 왜 도대체 왜 도대체 왜 선량한 사람부터 죽어야 하는 건데, 도대체 왜!!
이딴 세상을 도대체 왜 만들어서, 왜 고통받을 사람을 계속 만들어 내는 건데.
신이 다정하다면 이럴 리가 없다. 이럴 수는 없다.
신의 사도를 내려보내서 가장 처음으로 하게 만든 일이, 에다가 살고 싶어서 모은 음식을 그 아이를 죽인 사람들한테 나눠주는 일이라고?
네가 그러고도 신이야?
전신거울에 새하얀 모습이 비쳤다. 창백한 얼굴과 하얀 잠옷. 그리고 어둠을 빨아들인 듯 새카맣게 보이는 머리카락과 그곳에 피어나는 하얀 꽃망울들.
징그러웠다. 저 모습으로 징징거리던 셰이프 쉬프터를 볼 때처럼 징그러웠다.
전생으로도 모자라 이번 생까지, 저것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가. 왜 저런 생물이 존재해야 하는데.
어째서, 살고 싶어 발버둥 치는 사람은 죽는데 죽고 싶어 발버둥 치는 사람이 살아 있나.
왜 내가 살고 에다가 죽는단 말인가.
그러니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소원에 귀를 기울이는 신 따위 없다.
이곳의 신도 똑같다. 누구도 구해 주지 않는다. 인간에게 신성력을 내려준 뒤에는 그냥 지켜만 보고 있는 무책임한 신 따위.
그딴 신 따위.
필요 없으니까, 그러니까.
돌려보내 줘.
거울을 떠밀었다. 바닥에 쓰러진 거울이 깨졌다. 유리 조각이 튀어 다리에 빨간 금이 생기고, 피가 흘렀다. 카트리야는 부서진 유리 조각을 노려보았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에다가 죽어서 그 몸에 내가 들어갔다면, 반대로 내가 죽으면? 에다의 영혼이 이 몸에 들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세계수의 화분을 관리해야 하고, 여신은 아마 다른 영혼을 데려올 힘이 없을 거다.
그렇게 되면 내가 에다한테 저지른 잘못을 만회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도, 더는 누구에게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으면. 그럼 충분한 게 아닐까. 내가 살아 있기만 해도 언데드는 성전 도시를 노리고 이단자들이 호시탐탐 빈틈을 엿본다는데.
내가 없으면 모든 게 더 나아지는 게 아닐까.
살아봤자 내가 하는 짓이라고는, 고작. 고작 선량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개 같은 짓거리뿐인데. 그딴 짓을 더 할 기회 따위 필요 없으니까.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사람 같은 구석이 남아 있을 때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아직 내가 죽은 걸 슬퍼해 줄 사람이 있을 때 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유리 조각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피가 흘렀다. 이걸로 손목을 베면 된다. 하지만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누가 올지도 모르니까 빠르게, 한 번에 잘···.
혈관을 찾으려고 달빛에 팔을 비추다가, 새하얀 달빛을 보고 문득 떠올랐다.
루드비히가 있다.
손목에 유리를 댄 채 카트리야는 움직임을 멈췄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사람. 또다시 이상한 데서 허우적거리면 함께 있어 주겠다고 친절하게 약속한 사람. 그 친절을 좀 더 가치 있는 사람에게 써야 하는데 자신에게 낭비하는 사람.
여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이는 나를 부활시킬 수 있다. 이런 식으로는 죽을 수 없다.
그럼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는 거지.
손에 힘이 풀려서 손목을 베였다. 얕은 상처에 피가 맺혔다. 그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그럼 내가 에다한테 한 짓은, 이젠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거다.
상처받은 짐승의 비명이 들렸다.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기다리던 엘피에라는 눈을 떴다. 납골당에서 음유시인을 배웅한 뒤 그대로 의식을 잃은 카트리야를 옮겨오고 딱 반나절이었다.
안절부절못하던 루치아 사제가 카트리야의 방문으로 튀어 가려는 것을 붙잡았다. 그리고 반대쪽 손으로, 마찬가지로 침실로 들어가려는 법황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가만히 있으랬지.”
“그래도, 사도님이!!”
루치아는 말로만 항의했지만, 루드비히가 팔목을 떼어내려는 손에는 진심으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잘못하면 손목이 부러질 것 같다.
제법 방음이 잘 되는 침실의 문 너머로까지 들려오는 절규. 무언가를 때려 부수는 소리. 그에 섞여들리는 울음 섞인 비명. 제대로 된 말조차 되지 못한 짐승 같은 소리에는 죄책감과 분노가 가득했다.
의식을 되찾은 사도가 미친 듯이 날뛰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손에 잡히는 온갖 물건을 집어 던지고, 때려 부수고, 울부짖으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다.
그래도 엘피에라는 방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붙잡았다. 가라앉은 눈이 사도의 침실 문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너희가 들어가면 마음껏 울 수도 없잖아.”
사도에겐 마음껏 소리 지르고 눈물 흘릴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울지 못하는 사람이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저지른 잔인한 실수를 사과할 방법조차 없어서, 그저 자기 자신을 상처입힐 수밖에 없는 요령 없는 사람에게 애도할 시간은 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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