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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롱뇽
작품등록일 :
2024.10.01 14:16
최근연재일 :
2025.03.2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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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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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1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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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26. 상처 받은 짐승 (1)

DUMMY

저 사람은 오늘만은 좀 미쳐 날뛸 자격이 있었다. 저 하찮은 체력이 바닥날 때까지 마음껏 괴로워할 권리가 있었다. 어려울 때 짜낸 선의가 칼날이 되어 돌아와 심장을 헤집은 오늘만큼은.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에 루치아가 또다시 화들짝 놀랐다.

엘피에라는 루치아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괜찮다. 소리를 지르고 날뛰는 와중에는 차라리 괜찮다. 미쳐 날뛸 때는 이성이 없어서 오히려 생존 본능이 힘을 발휘한다. 그러니까 보통 치명상은 생기지 않는다. 다시 조용해질 때까지는 기다려 줄 수 있었다. 

아니, 조용해져도 괜찮겠지.

엘피에라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루드비히를 힐끗 보았다. 이 녀석이 있으니까 카트리야가 홧김에 사고를 쳐도, 본인이 원하든 말든, 이 세상에 다시 끌어올 수는 있다. 그렇게 끌려온 사람이 다음번엔 더 쉽게 가는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지만 가능은 하다.

엘피에라는 루치아와 루드비히를 놓고 닫힌 침실 문에 다가갔다. 문에 손을 대고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사람을 직접 진단할 때처럼 잘 되지는 않지만, 벽 너머의 생명체의 상태 정도는 대충 파악할 수 있다. 파문 시절에 익힌 꼼수였다.

문 너머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람은 살아 있었다.

엘피에라는 손을 짚은 채 눈을 감고 낮게 읊조렸다.

“너희는 너희의 이웃을 네 몸처럼 아끼고 친절히 대하라. 너희 곁에 있는 모든 생명이 어머니의 소중한 아이이니 선의를 아끼지 말라. 너희의 기나긴 기도보다 이웃에 건넨 감자 한 알이 어머니의 눈에 더 흡족하리라.”

음유시인은 나쁘지 않았다. 동정심으로 아이에게 탈출할 방법을 알려 주었다.

사도도 나쁘지 않았다. 자신은 쓰지 못할 음식을 어린아이들에게 베풀어 주었다.

누구도 악의가 없었고 모두가 친절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는 최악이다.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건지. 어째서 이 세계는 신이 불러온 사도에게 친절하지 않은 건지, 엘피에라는 모르겠다.

어째서 선의가 비극을 부르냐는 질문에 선법황 성하가 뭐라고 답했더라.

“어머니께서는 우리의 기쁨과 행복만큼이나 고통과 슬픔 또한 어여삐 여기시니···.”

“고통에 지지 말라. 슬픔에 묻히지 말라. 고통과 슬픔까지 어머니의 발치에 바치고 나아가라.”

뒷부분은 루치아와 루드비히가 함께 읊었다. 성기사단과 전투사제단을 창립하던 때 초대 법황의 연설문이었다. 루드비히가 전투사제단을 재건한 연설에서 인용한 부분이기도 했다.

그 뒤로 몇 번이고 곱씹었다. 고통과 슬픔을 어머니에게 바치는 방법이 무엇인지, 사실은 아직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여전히 찾고 있다. 기쁨도 행복도 모두 스쳐 지나가고 잊혀지는 걸 보면 그건 어머니께 잘 바쳐진 것 같은데, 고통과 슬픔은 영혼 깊은 곳에 박혀 버렸다. 죽음을 겪고 세계를 넘어가도 영혼에서 지워지지 않는 건, 사도에게 신앙심이 없어서일까, 원래 그런 것일까. 알 수 없는 문제였다.

문 너머의 비명은 흐느낌이 되고, 헐떡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신께서 조금 더 사랑하기 쉬운 사람을 사도로 데려오셨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신을 믿지도 않고, 경계심은 강하고, 자기는 행복하다는 거짓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면서 남은 불행해질까 봐 안절부절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까지 지켜주려 하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선량한 영혼에 어울리는 강한 심지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좀 더 당당하고 해맑은 사람이었다면 편했을 텐데.

하지만 엘피에라는 사도에게 아주 큰 빚을 졌다. 자신을 다시 대성전에 오게 해 주었다. 친구들을 위협할 수도 있는 언데드의 동향을 마음껏 헤집고 다니게 해 주었다. 심지어는 대성전이 갑갑하게 느껴질 때면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게 해 주었다. 무엇 하나 포기하지 않은 채 잃었던 것을 모두 되찾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루드비히가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보게 해 주었다. 오래도록 마음에 얹힌 짐을 내려 주었다.

그러니 엘피에라는 기꺼이 사도의 편이 되어줄 생각이었다.

어느 정도 진정되어 끊기는 호흡을 들으며, 엘피에라는 낮게 지시했다.

“루드비히, 넌 가서 네 할 일 해.”

“뭐?”

“필요하면 부를 테니까 가서 일 보시란 말입니다, 성하. 이쪽은 이제 괜찮을 것 같으니까.”

루드비히는 침실 문과 엘피에라를 번갈아 보았다. 엘피에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사도님이 애도 아니고 이렇게 우르르 몰려 있으면 진정할 것도 진정을 못 해요. 알면서 그러시나.”

“그래도 사도님은···”

“일이 손에 안 잡히면 혼자 기도라도 하든가. 오늘 말고 내일··· 아무튼, 날이 밝으면. 넌 그때 와.”

루드비히가 들어가서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을 늘어놓으면, 차분하게 끈기 있게 달래주면 사도도 진정할 거다. 하지만 지금 사도에게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사도가 죄책감과 분노로 미쳐 날뛰다 탈진한 지금은, 그 질척질척하고 무거운 마음을 숨기는 게 아니라 풀어줄 것이 필요했다.

루드비히는 차마 쥐여주지 못할 칼을 엘피에라는 쥐여줄 수 있다. 

알베르토가 눈치를 보면서 루드비히를 잡아끌었다. 루드비히는 몇 번이나 불안한 듯이 돌아보면서도 결국 보좌에게 끌려갔다.

남자들이 그렇게 사라지고, 엘피에라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다음 문을 열었다.

방안은 예상대로 난장판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신의 사도는···. 침대 옆의 어둠 속에 이불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슬라임 같다. 엘피에라는 루치아에게 대기하라고 손짓을 하고 문을 닫았다.

“엘피에라입니다.”

“나가세요.”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또렷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에 선명하게 날이 서 있었다.

엘피에라는 그 말을 무시하고 방 안을 가로질렀다. 전신거울과 화장대의 거울이 부서져 있었다. 바닥에 나뒹구는 의자는 발로 차 올려서 똑바로 세우고, 굴러다니는 물컵과 쿠션을 넘어갔다.

그 와중에 협탁 위의 책들은 가지런히 쌓여 있고 잉크병도 멀쩡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바닥 카펫은 이미 피에 젖어 버렸는데 그 위에 잉크까지 뿌리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책도 망치지 않았다. 자기 얼굴을 비추는 물건은 부숴 버렸지만 그 외엔 수복 불가능한 것 따위 아무것도 없었다.

미쳐 날뛰는 와중에도 이렇게 뒤처리를 생각하는 인간이 되려면, 제 살은 가르면서 대성전의 비품은 지켜주는 사람이 되려면, 도대체 무슨 삶을 어떻게 살아야 했던 것일까. 이렇게까지 영혼이 병들어 버리려면.

이불 덩어리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엘피에라는 그 앞에, 유리가 없는 곳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루드비히한테 위로받고 싶으시면, 불러올까요?”

대답이 없었다.

그렇지. 역시 엘피에라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사도님은 잘못이 없다고 말하면 위로가 되실까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도님은 그저 마을 사람들에게 선의를 베풀었을 뿐이다, 알았더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실수였다, 그런 말이 도움이 되실까요?”

“몰랐으면 다인가요?”

가차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같이 복수하시겠습니까?”

움찔.

“워렌 사제가 남아 있는 거 아시죠. 그쪽을 처벌할 증거는 오늘 낮의 그 늙은 사제보다 훨씬 빈약하다는 것도. 그래서 자백을 유도해야 하는데, 제 담당이거든요. 사도님도 같이 하시겠습니까? 지난번에 말해 보니 권위주의적이고 선민 정신에 찌든 멍청이라서, 이 땅에서 가장 고귀하고 선택받은 존재가 몇 마디만 찔러 주면 바로 흔들릴 것 같던데요.”

어쩌면 신의 사도가 이렇게 약한 존재라는 걸 눈치채고,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덤빌 수도 있다. 그것도 나쁘지 않다. 죽은 에다에 대한 방치는 큰 죄가 아니지만 산 카트리야에 대한 모욕은 아주 큰 죄에 들어가니까. 사도가 괜한 부담을 받지 않도록 포기했던 방안을 엘피에라는 다시 꺼내 들었다.

“사도님이 워렌을 공격해 주시면, 제가 뒷작업 받아서 아주 깔끔하게 처리해 드리죠. 어떤가요.”

엘피에라는 이불 덩어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정도면 사도님이 에다 씨한테 저지른 실수, 만회할 기회가 되지 않을까요?”

“···고작 그런 걸로요.”

이불에 눈이 생겼다. 엘피에라는 낮게 웃었다. 자신이 이렇게 말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고작 그것 말고 더 해 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아무리 정성껏 매장해줘도, 장례식을 치러 줘도, 죽은 사람이 알기나 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사람을 죽인 것들이 두 발 뻗고 자지는 못하게 만들어 줘야지요. 안 그런가요? 이제 와서 루시엔 마을을 전부 불태울 수는 없으니까.”

“안 될까요?”

악에 받친 눈빛이 강렬했다. 모두가 친절하고 착하다고 평가하던 신의 사도는 날카로운 적의를 그대로 드러내며 물었다.

“저한테 신의 계시가 내렸다고 하면, 당신들은 신의 계시를 따라 줄 거죠?”

“···신의 계시를 위조하시겠다는 말씀이신지?”

이불이 조금 흘러내렸다. 꽃망울이 맺힌 세계수 덩굴을 보란 듯이 드러내고 신의 사도는 낮게 읊었다.

“자신들이 학대하여 죽인 자의 식량으로 제 배를 채운 수치를 모르는 이들을 용서하지 말라. 저 아이의 삶은 그들이 이미 오래전에 앗았느니 그들에게 아이의 희망을 삼킬 자격이 없느니라. 그 희망으로 늘린 생명은 연장되는 일이 없게 하라.”

비명을 질러서 살짝 갈라진 목소리. 울음 때문에 목이 막혀 이상하게 나오는 목소리로, 사도는 웃었다.

엘피에라마저 순간 오싹할 정도로 무언가 ‘다른 존재’의 말처럼 들렸다. 진짜로 언데드의 사도가 아닌 건 맞는 것인가. 인간을 죽이고 파멸시키려는 자가 아니긴 한가. 폐기했던 가설이 또다시 불쑥 튀어나왔다.

갈색 눈은 희미한 광기를 머금고 아름답게 웃었다.

“저희 세계의 신도 구원할 수 없는 마을은 물에 담그고 화산 폭발로 덮어 버리고 산사태로 파묻고 그랬어요. 이 세계의 신이 때마침 내려가 있는 사도한테 나 대신 수고 좀 하라고 계시를 내린대도 이상하진 않죠.”

그걸 판단할 능력이 너희에게 있느냐고, 배배 꼬인 목소리가 비웃었다.

엘피에라는 입술을 삐딱하게 치켜올렸다.

솔직히 말하면, 없다. 개인에게 내리는 신의 계시의 진위는 일일이 판단하기 어려웠다. 신앙을 가진 자들이 신의 계시를 위조할 일은 없지만, 불신자라면 그 정도는 해치울 수 있겠지. 감히 신의 사도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데 그걸 의심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갈라진 목소리는 달콤하게 속삭였다.

“암세포는 조기에 잘라내야 주위에 퍼지지 않아요. 저런 병든 자들을 선량한 신자들 사이에 풀어놓으면 피해는 결국 선량한 자들이 받겠죠. 그런 것들을 처단해 주는 것도 신의 사제들이 할 일···.”

갑자기 눈빛이 훅 꺼졌다. 그리고 사도는 또다시 이불에 파묻혔다.

잠시 후 이불덩어리가 웅얼거렸다.

“아니야. 그건 신의 사제가 할 일은 아니에요. 당신들은 죄인을 용서하고 또 용서해 줘야 하는 사람들이야. 이상한 데로 빠지면 안 돼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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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95 n7******..
    작성일
    25.02.17 14:21
    No. 1

    똑똑해서 많은 것을 알고 너무 착해서 아파하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9 성잔화
    작성일
    25.02.17 15:03
    No. 2

    선의로 행한 일이 이렇게 돌아오니 마음아플 따름이죠.
    그와는 별개로 그 쓰레기들은 벌을 좀 받아야한다고 생각해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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