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군 이번만 임시동맹이다 (2)
알릭의 상단은 생각보다도 더 컸다. 물건을 실은 수레의 개수만 해도 열이 넘었으며, 말이나 인부들도 꽤 되었다. 그중 알릭은 당연히 호화로워 보이는 마차 안에 있다. 그리고 마부 외에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도보로 이동했다. 나도 마찬가지. 그리고 아이리스는 말에서.
저기 내 앞쪽에 말을 타고 가는 아이리스. 좋은 게 좋은 거니 알릭이 말을 태워준다고 했을 때 그냥 타라고 했었다. 자기 딴엔 아이리스가 예쁘니 호감 좀 얻으려는 것 같은데 이왕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기만 하라고 아이리스에게 이야기해놨다.
“하암.”
긴장감이 좀 사라졌나. 푸른 늑대 용병단 뿐만이 아니라 상단 소속 고용인들도 많았기 때문에 이만한 수 정도면 몬스터가 나와도 두려울 게 없긴 하다. 상단주 알릭이 얼마나 겁이 많은진 알겠네.
“안녕하세요.”
“아 네.”
옆에서 말을 건 여성. 밤색 머리에 양쪽을 리본으로 묶은 양갈래 머리를 하고 있다. 굉장히 순해 보이는 인상에 옷도 꽤 수수한 편이었다. 그리고 옷에 한 교단의 문양.
“저는 미네르바교 소속의 사제 멜리샤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멜리샤. 저는······ 라크입니다 라크.”
참고로 당연히 내 본명을 알려주진 않았다. 아이리스의 경우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상관없겠지만, 난 유명인이라 이름 정도는 바꿀 필요가 있었다.
“네 라크님.”
“지식의 신 미네르바님을 모시는 사제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이. 전 그저 신을 모시는 한낱 신도일 뿐인걸요.”
적당한 양의 신성력.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제였다. 나와 다른 게 있다면 모시는 신이 다르다는 것 정도. 7명의 신 중에서 나는 빛, 이 여자는 지식을 모신다.
“혹시 실례일 수도 있는데, 라크님도 사제이거나······ 그러진 않으시나요?”
“네? 제가요?”
“하는 행동이 뭔가 바르고 품격이 있어서요. 게다가 예쁜 금발이시잖아요. 그래서 처음엔 귀족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는데 격식이 있진 않으셔서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말랑해 보이는 것에 비해 생각보다 예리하네 이 여자. 멜리샤의 말대로 난 에테른교 소속의 사제. 그런데 신성력이 없으니 멜리샤도 내가 사제라고 확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등 뒤의 저주는 직접 손이 닿지 않는 이상 알 수가 없다.
“아주 예전에 수행을 잠깐 한 적이 있어요.”
“그러시구나. 어쩐지!”
멜리샤는 활짝 웃으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멜리샤는 어쩌다가 용병단에 들어간 건가요? 보통 사제가 어디 소속이 되진 않을 텐데.”
“아, 전 푸른 늑대 용병단에 잠시 고용된 거예요.”
“마법사가 있지 않나요?”
사제만 치료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방법과 정도가 차이는 있겠지만 마법사들의 치유 마법은 효과적이다.
“그렇긴 한데, 용병단 소속이신 두 명의 마법사님들 특기가 공격마법이라고 하시네요. 그래서 치유에만 신경 쓸 수 있는 저를 고용했어요.”
“돈이 필요하신 건가요? 굳이 힘든 용병단에 낄 필요는 없을 텐데.”
“에이. 쉽기만 하면 고행이 아니죠.”
스스로 험난 길을 선택해 여러 경험을 쌓는 것. 아주 이상적인 성직자의 자세였다. 나도 한때 저렇게 열심인 적도 있었지.
“고행은 언제까지 하시나요?”
“거의 끝났어요. 이번에 수도 프롬에 간다면 대신전으로 돌아갈 거예요.”
많은 종교가 있지만, 라인가르드 제국에서 가장 신도의 수가 많은 교단이 바로 미네르바교다. 따라서 교의 핵심이 되는 「대신전」이 프롬에 위치했다. 나는 아까부터 눈에 밟히는 멜리샤의 손목을 바라봤다. 평범하게 보석이 박힌 팔찌라는 장신구였으나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그 팔찌.”
“네. 넷?”
“귀해 보이네요.”
“하, 하하. 제가 무척 아끼는 거랍니다.”
화들짝 놀라며 팔을 내리며 팔찌를 가린다. 빼앗아갈 생각은 없는데.
그래도 저 반응은 한편으론 또 이해된다.
막대한 양의 신성력이 느껴지는 물건. 아마 「성물」일 것이다.
일개 사제가 들고 다니기엔 너무 과분한 물건이다. 그러나 어디에서 쫓기는 건 아닌 모양이고, 본인도 그 물건의 진위를 알고 있는 모양이니······.
이 사제, 실력은 별것 없어 보이는데 평범한 신분은 아니다.
“여기에서 쉬었다 가겠습니다!”
“앗. 도착했나 봐요.”
마침 해도 거의 다 저물었다. 아무리 잘 닦였더라도 주변이 온통 숲인 길을 한밤중에 다닌다면 여러 가지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이쯤에서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
.
.
나는 푸른 늑대 용병단이 친 천막 쪽에서 쉬기로 했다. 상단 쪽 사람들하고 친해질 이유도 없었고, 편한 쪽을 고르자면 개방적인 용병들이 훨씬 좋았다.
“이분은 라크님이에요. 라크님. 이분은 용병단의 단장이신 트리판님이에요.”
“잠시 신세 좀 지겠습니다.”
“하핫. 우리가 하는 거야 같이 걸어주는 게 다인데 뭘.”
거친 턱수염의 사내 트리판은 호쾌하게 내게 악수를 청했다. 갑작스럽게 동행했으나 아무런 거리낌 없이 환대해주는 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편히 쉬게. 이쪽이 남자 쪽. 저쪽이 여자 쪽이나 이따가 여자 동료분이 오면 오늘 밤은 여기에서 자면 된다고 알려주게.”
하룻밤 지낼 곳을 친절히 설명해준 트리판은 주변 지형을 확인해보고 와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마침 아이리스도 이쪽으로 다가온다.
“벌써 친해진 거야?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
“그냥 인사한 거야. 오늘밤 잠은 넌 저쪽에서 자면 된다네.”
“흐음. 같이 자는 건 어렸을 때 어머니 이후 처음이니 조금 긴장되네.”
돈이 없진 않으니 어제 여관에서 묵을 땐 각방을 썼었다.
“그보다 늦었네?”
행렬이 멈추고 바로 올 줄 알았는데 천막을 칠 때까지 알릭과 그 옆의 비서와 무슨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던 것 같다.
“아니 그냥. 돼지 인간이 같이 식사라도 하자고 너무 추근거리더라.”
“헉.”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멜리샤가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대놓고 의뢰 중에 고용주 욕을 하는 건 처음 듣는 일이라 당황한 게 보인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용병단원들이 전부였고, 아이리스의 말이 마냥 재밌기만 한지 소리 없이 웃는다.
“얘는 누구야?”
“미네르바교의 사제이시래.”
“사제인 건 알아.”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여자니 경계부터 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네르바교의 사제 멜리샤라고 해요.”
“아. 그래. 뭐.”
아직 누군가에게 경어를 쓰는 게 익숙하지 않은 아이리스. 게다가 딱히 친해지고 싶지도 않은 것 같았다. 내가 대신 이름을 알려준다.
“아이리스라고 부르면 돼요.”
“네. 아이리스 님!”
“그래.”
여전히 딱딱하다. 멜리샤는 서먹함을 풀고 싶었는지 괜히 분위기를 띄우려고 노력했다.
“그럼 함께 식사나 하실래요? 마침 용병단의 조리 담당 분들이 식사 준비를 마친 것 같네요.”
“오. 우리도 먹어도 되는 건가요?”
“네. 어차피 식량은 항상 춘분하고, 모두 좋으신 분들이라 괜찮을 거예요!”
멜리샤의 안내를 받으며 용병들이 조리하고 있는 장작 불 앞에 도착했다. 어디에선가 벌써 잡아왔는지 토끼 고기를 해체해 불 위에 노릇노릇하게 굽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선 간단히 수프를 휘젓는 중이다.
“앉아계시면 금방 해드릴게요.”
여자 남자 각각 한 명씩 조리 담당을 맡았구나. 여자 쪽은 수프부터 국자로 떠서 배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고기가 다 구워지자 남자 쪼은 주변에서 얻은 나뭇가지를 꽂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투박하지만 담백하고 영양 넘치는 음식이라 꽤 마음에 들었다.
아이리스도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며 먹는다.
“······뭐.”
“그냥 본 거야.”
음식을 안 가리는 건 알겠지만 자꾸 봐도 익숙하진 않았다. 멜리샤가 금방 식사를 끝냈는지 어느새 또 아이리스에게 다가왔다.
“저희 음식은 입에 잘 맞으세요?”
“네가 한 것처럼 물어본다?”
“실, 실례했습니다.”
“맞는 말이긴 하네요.”
고기를 구워준 남자가 고기를 씹다가 폭소를 터뜨렸다. 아이리스는 왜 웃는 건지 모르는 눈빛이었고, 멜리샤는 부끄러운지 머리를 긁적인다.
“하하하하! 저 아가씨 재미있네.”
단장 트리판도 서로 자꾸 엇나가는 아이리스와 멜리샤의 상황이 그저 재밌는지 수염을 씰룩거리며 웃었다. 나쁘게 말하면 사회성이 없는 아이리스지만, 악의도 없으니 그냥 귀여워 보이기만 했다.
아이리스의 정체를 안다면 전혀 그렇진 않을 테지.
뭐······ 떳떳하지 않은 건 나도 포함인가.
“아이리스양. 여기에 있나? 오, 여기 있었군.”
살 찐 목소리로 아이리스를 부르는 누군가. 상단주 알릭이었다.
“전속 요리사가 이번에 지금 막 맛있는 요리를 했는데 와서 같이 먹지 않겠나?”
“괜찮아.”
알릭은 용병단원들이 먹고 있던 음식을 보아하곤 코웃음친다.
“쯧쯧. 이렇게 아름다운 레이디에게 조리도 제대로 안 된 고기나 이런 구정물 같은 음식을 먹이다니.”
알릭이 막대기로 겨우 지탱해놓은 수프통을 걷어찬다. 다리 자체에 무게가 나갔는지 통이 엎어진다.
“상단주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어이쿠. 넘어갈 줄은 몰랐네. 자.”
상단주는 금화 하나를 주머니에서 꺼내 땅바닥에 툭 던졌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됐지?’라고 트리판에게 한 마디만 남기며 다시 아이리스에게 말을 건다.
“아이리스양. 와서 식사나 함께 하지.”
“이제 배불러.”
“이런 하찮은 음식을 먹어서 어떻게 배를 채우나?”
“배 다 채웠다고.”
“정 배가 부르다면 와서 후식으로 디저트라도 먹는 건 어떤가?”
“됐다고 돼지야.”
“헉!”
이번엔 알릭이 보는 앞에서 똑똑히 전했다. 멜리샤는 이번에도 숨을 집어삼켰고, 용병들은 또 웃는다. 물론 대놓고 웃진 않으면서.
“뭐, 뭐······라고? 나, 나보고 돼지라고 한 건가?”
“응. 콧수염 돼지.”
부르르 떨리는 콧수염.
“이 여자가 보자보자 하니까! 좋게 말하려고 해도 안 되겠군!”
“알릭 님.”
“뭐야!”
안경을 낀 주황 꽁지머리 여성.
알릭의 비서이다.
“인부 하나가 어디라도 아픈지 쓰러졌습니다.”
“쓰러져? 아니, 이 중요한 상단길 중에 쓰러져? 그럴 거였으면 애초에 참여하지 말았어야지!”
“어떻게 할까요?”
그녀는 알릭의 화풀이가 한두 번은 아닌지 표정 하나 안 바뀌었다.
“맡은 일을 못 하게 되었으니 이번 수당은 없는 거지. 대충 짐을 실은 수레 위에 올려! 그 비용은 따로 또 받을 테니 알아두도록 일러둬.”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반발이 있을 겁니다.”
“반발이라니. 계약대로 안 한 주제에 무슨 반발이야?”
“그리고 물이 부족하다고들 합니다. 물 한 병은 너무 적다고······.”
“물 비싼 줄 모르고 그걸 다 벌써 마신 거야? 모두 정신머리 썩어빠졌군. 내가 직접 가서 일러둬야겠어. 그리고 그 놈, 싫다면 그냥 버리고 갈 테니 알아서 오라지!”
이번에도 씩씩대면서 자리를 뜬다. 아이리스에겐 손해를 보더라도 말 조금이라도 더 걸고 싶어 하면서 고용인들에겐 아주 인색하네. 이런 괴팍함에 대해서 용병단원들 전원 아는지 알릭이 떠나고 나서야 한숨을 푹 쉰다.
“저래서 우리끼리 따로 물을 조달하고 음식도 직접 요리해 먹는 거야.”
트리판은 땅에 놓인 금화를 집었다.
“그래도 아가씨 덕분에 횡재했어. 하하핫!”
“꺄하핫! 맞아. 프롬에 도착하면 바로 나누자고.”
원래라면 저걸 주지도 않을 테지만, 아마 아이리스 앞에서 돈자랑을 하고 싶은 목적이었을 것이다. 기분 나쁜 건 기분 나쁜 거고, 이득은 이득이었다.
“하하하. 아가씨 덕도 있으니 가면 이 금화를 쪼갠 거 떼어주지.”
“괜찮아.”
“뭐? 돈 주는 데에도 싫다는 사람은 처음 보네.”
아이리스는 이번에도 정중하게 거절했다. 트리판은 그저 또 웃긴지 껄껄거렸다.
“그나저나 인부들도 물 좀 마시게 해줘야겠어. 아까 둘러보니 이곳 주변에 맑은 개울가가 있었거든.”
“단장. 우리가 떠올까?”
“나도 소화할 겸 갔다 올게!”
“가서 그릇도 좀 씻어야겠다. 이번 담당은 누구지?”
“트리판 단장 차례 아니야?”
“난 최근에 했다 이녀석들아!”
용병들은 다시 활기차게 재잘거리며 저녁 식사를 마무리했다. 아이리스는 그런 그들이 신기한지 물끄러미 구경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린다. 알릭과 그 비서가 사라진 쪽.
“이대로 지켜보기만 할 거야?”
“네? 지켜보다니요?”
멜리샤가 머리를 갸우뚱했다. 어차피 멜리샤에게가 아닌 내게 건넨 말이었기 때문에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난 내 무릎 위를 툭툭 두들기며 눈을 감는다. 사실 내 능력 밖의 일이라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눈에 띄기도 싫었고.
내 옆의 사제 멜리샤조차도 아직 눈치 못 챈 마기의 향이 코끝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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