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22화
“어, 언제 왔나? 하하하.”
당황한 사내가 유모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고려단이 질 것 같다는 소문을 누가 퍼트리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만?"
양 옆구리에 손을 올리고 사내들을 째려보는 유모.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내들이 고려단이 이기지 못할 거라고 신나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오, 오핼세."
"그래. 여기저기 소문까지는······."
"오해는 무슨! 똑똑히 들었는데. 우리끼리 머리 싸매고 응원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모여서 지라고 고사를 지내고 있어?"
"아, 아니. 그게 아니고."
"됐네, 됐어! 이토류가 잘하든 말든 우리 도련님이 있는 고려단이 무조건 이길 거네!"
"그럼! 같은 마음이고 말고!"
“나 역시 그리 생각하지. 암!”
중년 남자들은 미안한 마음에 유모를 달래며 쩔쩔맸다.
그때 국숫집 주인이 그녀가 주문해 둔 국수가 든 종이봉투를 가져왔다.
“특별히 많이 담았어요. 선수들 맛있게 먹이세요. 손 부족하면 말씀하셔요. 가서 도와드릴게요.”
주인은 유모에게 신나서 말했다.
내심 사내들을 혼내는 그녀의 모습이 제법 통쾌했다.
자기도 모르게 고려단이 이길리 없다는 생각에 살짝 우울해지려던 마음을 다잡게 해준 유모가 고맙기도 했다.
일본인 선수가 한 명도 없는 고려단과.
일본인 선수만 있는 하이호의 경기.
그건 단순한 10대 아이들의 시합,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매번 지는 경기여도 소리 높여 고려단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어이쿠. 이거 선수들 먹이려고 사는 건가? 이 국수는 내가 사겠네.”
남성은 다급하게 돈을 치르고 국수를 받아, 유모 손에 쥐여주었다.
유모가 얼마나 호수를 아끼는 지 잘 아는 두 남성은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그래. 이거 가져가서 선수들 맛있게 먹이고 화 풀게. 내 미안하네."
"나도 미안하네."
한참을 사내 둘을 노려보던 유모는 그제야 조금 풀린 표정을 지었다.
"한 번만 더 그런 허튼소리 해대면. 요 입! 입을 아주!"
"암. 알고말고! 걱정하지 마시게."
"그럼, 그럼! 내 그런 허튼소리 하는 사람들을 보거든, 단단히 한 소리 함세!"
식은땀까지 흘리며 그녀를 달래는 사내들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흘렀다.
그런 그들을 흘끗 쳐다본 유모는, 내심 답변이 맘에 들었는지 피식 웃고는.
등을 돌려 국숫집을 나섰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선수들이 노력 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었다.
“하여튼 말은 쉬워!”
훈련 후 집으로 뛰어 들어오는 선수들을 보면서 얼마나 안쓰럽고 대견한지.
호수 도련님은 밤잠까지 줄여 가며, 경기를 이길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데.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에.
뭐 하나라도 더 먹이려는 상황인데.
얼마나 노력하는지 제대로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니.
밤에 그 힘든 훈련을 마치고 쪼그려 앉아, 유니폼까지 빨아 말리는 고려단 선수들이었다.
국수가 먹고 싶다는 말에, 새벽부터 닭을 푹 고아서 닭국물에 국수를 넣어 주려 국숫집에 들른거였다.
"고려단은 꼭 이길 거구만!"
유모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 저 멀리서 새벽 운동을 마치고 열심히 달려오는 고려단 선수들이 보였다.
“하느아! 두울! 세엣! 네엣!”
“하느아! 두울! 세엣! 네엣!”
가장 선두에서 선수들을 이끌며 큰 소리로 숫자를 세는 호수를 본 유모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저렇게 도련님이 건강한 거면 됐지.’
유모가 선수들 모르게 얼른 눈물을 훔쳤다.
“이모다!”
“이모님!”
유모를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는 선수들에게 유모는 이모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 뒤로 고려단 선수들은 유모를 이모라 불렀다.
“이모. 배고파요!”
“배가 등가죽에 붙었습니다.”
“오! 손에 들고 계신 건 국수?”
“이야! 국수다. 국수!”
“어제 먹고 싶다고 하길래. 호호호.”
“감사합니다!”
“제가 들겠구먼요!”
“맛있겠다!”
신난 선수들의 표정과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유모의 눈에 따스한 행복이 묻어났다.
"와. 닭이다. 닭!"
"저것 봐! 육전도 있어!"
"우와!"
한 상 가득 차려진 고급 음식들에 선수들 입이 귀에 걸렸다.
"부족하면 말하셔요. 다들 잘 먹으시니 너무 좋네요."
입에 한가득 밥을 넣고 감탄하며 먹는 선수들을 보며 흐뭇하게 말하는 유모였다.
"유모. 고마워."
호수가 유모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10대 남자아이들 12명의 끼니를 만든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니까.
"아유. 아녀요! 오히려 겨우내 할 일도 없어 심심하던 차였네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웃는 유모.
그녀를 보던 호수는, 어린 호수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건지 실감이 났다.
'우리 부모님은 잘 계시려나.'
문득 그리움이 스쳤다.
얼마 전에 태어난 조카도 아직 못 봤고, 부모님과 그 흔한 여행 한 번 제대로 가지 못했다.
야구선수의 삶이 그렇다.
추석은 시합하느라, 설날은 전지훈련 가느라.
명절도 제대로 가족들과 보내기 어렵다.
이럴 줄 알았다면,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걸 하는 후회가 서렸지만.
우선 눈앞에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강한 팀을 만들고 나면 분명 뭔가 실마리가 나올 거야.'
일인으로 구성된 팀에게 절대 지지 않는 강한 야구팀.
그런 팀을 만드는 게 여기서 내가 해야 할 일이고, 내가 이곳에 온 이유다.
머릿속에 들어온 어린 호수의 미래 기억의 가장 끝은 여전히 흐릿하다.
호수는 다시 한번 결의를 다졌다.
"2시간 후에 오전 훈련할 거니까 그때까지는 푹 쉬세요! 쪽잠이라도 자두시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꼭 밥 먹을 때 그런 말을 해야 속이 후련했냐!"
"일부러 저러는 거구먼."
"그러게나 말이다."
질린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선수들.
“하여튼 호수 저거 분위기 깨는데 뭐 있다니까?”
“저도 요즘 호수형이 너무 낯섭니다.”
“점마, 연습 귀신에 씌었나.”
그 눈빛만 보면 야구의 '야' 자도 듣기 싫어할 것 같지만.
구시렁거리는 와중에도 다리 위에 살포시 놓은 글러브를 쓰다듬는 선수들이었다.
“꿈인가 싶다. 내 글러브가 있다는 게. 재호 니는 믿어지나?”
“나도 신기하구먼.”
“저도 그래요.”
밥 먹으러 올 때까지 굳이 글러브를 챙겨 온 선수들.
어릴 때 정말 갖고 싶던 걸 갖게 되면,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모두가 그렇게 글러브를 애지중지 쓰다듬었다.
호수는 그런 선수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쉴 수 있을 때 쉬어 두세요. 그리고 주장, 잠시만요. 혁수 너도."
호수는 밥을 다 먹고 선수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 주장과 혁수를 불렀다.
“호수야 왜?”
이젠 제법 살 빠진 티가 좀 나는 혁수가 해맑게 웃으며 거실로 나왔다.
주장 역시 입에 한과 하나를 물고 둘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 있는 거냐?”
그 둘을 본 호수가 조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형, 어깨요.”
“뭐?”
“응?”
호수의 말에 혁수와 영수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제 방에서 이야기할까요?”
호수는 말없이 2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형······.”
“일단, 올라가 보자.”
혁수는 영수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영수는 그런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앞서 호수의 방으로 들어갔다.
“형, 언제까지 숨기려고 했어요?”
호수는 한숨을 쉬며 주장에게 물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시치미 떼는 영수의 어색한 연기가 호수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공 받을 때 이상한 거 너도 느꼈지?”
“그게······.”
혁수 역시 호수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하. 형 어깨 돌려봐요.”
“괜찮다니까. 하하.”
어설프게 분위기를 바꾸려는 영수.
“괜찮을 리가 없는데.”
주장은 지난번 경기에서도, 갑작스러운 어깨 통증을 호소하며, 마운드에서 교체됐었다.
병원에서 단순 탈골이었고.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지만.
혁수와 피칭하는 주장의 투구자세를 보면서.
호수는 분명 뭔가 잘못된 것을 느꼈다.
몇 번 연습 동작을 살펴본 결과, 공을 릴리스하는 포인트가 조금 낮아지고.
공 끝의 회전 또한 약해진 것이 보였다.
이 시대를 살던 어린 호수의 인생 전체 기억을 가진 호수는.
기억 속 주장의 투구 동작과 확실히 다른, 어제 연습 동작을 보면서.
밤새 방법을 찾아 고민하고, 오전 수비 훈련 전에 둘을 부른 것이다.
‘선수도 빨리 보충해야 해.’
대체 선수가 없는 고려단.
그걸 아는 주장이 자신의 부상을 숨긴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내가 1회부터 던지고 싶지만.’
마음은 굴뚝 같아도, 경기는 이성적으로 운용해야 한다.
호수의 체력은 일주일 만에 선발 투수로 경기를 끝까지 끌고 갈 수준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그건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한창 크는 성장기에 워낙 운동을 안 한 몸이긴 하다.
체력 운동만 제대로 한다면 엄청나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고.
몸 만드는 운동이라면 자다가도 술술 말할 수 있는 호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 만에 선발급, 게다가 완투한다는 건 무리였다.
“가동 범위 좀 확인할게요. 조금이라도 아프면 바로 말해주세요.”
“알겠다.”
호수는 주장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고 팔을 살살 들어 올렸다.
야구만 15년을 한 호수였다.
어깨 상태 체크는 조금의 이상만 느껴져도, 무의식적으로 하던 거다.
호수는 천천히 주장의 오른팔을 올리며 가동 범위를 체크했다.
“아!”
어느 정도 팔을 들어 올리자, 주장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소리가 튀어나왔다.
‘문제가 있긴 한데.’
그나마 다행인 건.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해 보이지 않다는 점이다.
아파본 사람은 안다.
공을 던질 수 없는 수준의 고통은, 참는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다.
영수의 표정을 예리하게 살피며 가동 범위를 확인한 호수는.
생각보다 가동 범위가 나쁘지 않은 것을 보고 안심했다.
그래도 고통을 참고 연습한 건 변함없는 사실.
“언제부터 아팠어?”
호수는 자신도 모르게 어린 나이임을 잊고.
투수 대 투수로써.
안타까운 마음에 영수에게 반말로 물었다.
“한숨 자면 낫는다.”
영수는 애써 어깨를 주무르며 호수의 시선을 피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이 증상이 어떻게 며칠 쉰다고 사라져.”
“주장······.”
걱정하듯 바라보는 호수와 혁수를 향해 주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잠깐 아픈 거다. 금방 나을 거고.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마라.”
쉬게 하고 싶지만, 선발이 없다.
“이건 치료해야 나아요. 치료하면 금방 괜찮아져요. 말 안 할 테니까. 대신 무조건 치료받으세요. 비용은 걱정하지 말고.”
돈 쓸 때는 조심해서 써야 한다.
자칫하면 잘난 척처럼 보일 수도 있다.
호수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돈 많다고 잘난 척하는 게 아니고, 정말 이기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고려단을 생각해서라도. 앞으로 야구 인생을 생각해서라도, 치료 꼭 받으세요.”
평소 말이 거의 없고, 나서길 좋아하지 않던 나였다.
그런 내가 갑자기 이토류를 이길 방법을 찾았다며, 경기에 어떻게든 이기려는 모습을 보인다.
주장에겐 내가 아주 낯설 것이다.
“딱 3회. 길어도 그 이상은, 형이 하겠다고 해도 절대 못 던지게 할 거예요.”
영수는 미안한 얼굴로 호수를 쳐다봤다.
“그런데 3회까지는 형 없이 절대 못 이겨요. 우리가 이렇게 새벽 밤낮 없이 훈련하는 데 질 수도 있단 뜻이에요.”
“······.”
“그러니까. 치료, 무조건 받아요. 알았죠?”
주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장의 어깨가 며칠 동안 얼마나 좋아질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전혀 치료를 안 받던 것보단 나아질 거다.
그리고.
계속 던져야 한다는 부담 없이 3회만 던진다고 생각하며 공을 던지면.
당연히 완투를 생각할 때보다 부담은 줄어들게 된다.
어린 호수의 기억에 의하면.
그날따라 어깨 통증이 없던 주장은, 3회까지 무실점 호투를 펼쳤지만.
4회부터 균형이 조금씩 무너지면서.
4회 3점, 5회 4점을 내주며 7실점을 하고 만다.
평소 사용하던 자세에서 통증을 느끼니 팔꿈치를 더 비틀어 던지면서 제구가 불안정해 볼넷도 유난히 많이 나왔다.
미래의 기억 속 주장은 5회까지 7실점을 한 뒤, 어깨의 엄청난 통증을 호소하며 교체됐었다.
슬픈 건.
‘그때도 난 안 올라갔지.’
다급히 병호가 투수가 되고 호수는 1루 수비를 봤었다.
'참나. 후보 선수 서럽네.'
덕분에 경기 내용이 더 자세히 기억에 남아있긴 하지만.
생각할수록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이해는 했다.
공 몇 개 던지면 숨을 헐떡이는 체력을 가진 애였으니까.
‘아니 이렇게 벤치에만 있으면서 왜 그렇게 야구를 좋아한 거야.’
뭐. 괜찮다.
이제부터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 그만이다.
4회와 5회에서 7실점을 막고 이길 확률을 높일 거다.
수비는 지난주부터 연습한 탓에 그래도 조금씩 자세가 나오기 시작했다.
'타격만 조금 더 받쳐주면.'
그렇게 되면 정말 해볼 만하다.
아니.
‘무조건 이긴다.’
호수는 속으로 강한 열의를 다졌다.
이곳에 온 이유이자, 돌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길.
<일인 팀에게 절대 지지 않는 강한 야구팀을 만든다.>
주어진 목표를 이뤄내고 길을 찾을 거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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