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23화
호수와 주장, 혁수가 방에서 밀회하던 시각.
준목이 피곤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생기 있는 눈빛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야쿠타에게 얻어낼 것들을 계약서로 만들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검토에 검토를 거쳐.
완성된 결과물을 옷 안에 넣고 집에 오는 길이었다.
“아이고오. 얼굴이 그새 반쪽이 되셨네. 또 잠 안 주무셨죠!”
유모가 현관으로 들어서는 준목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아. 호수는?”
예전 같으면 며칠씩도 집에 들어오지 않던 준목이었지만.
요즘은 하루에 한 번은 꼭 호수의 얼굴을 보기 위해 집에 들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지만.
우호적인 호수 덕에, 준목은 표현하고 싶던 마음을 더 자주 티 내는 중이었다.
“가방은 별 이야기 없고?”
“안 그래도 메고 들어오는 건 봤는데. 아무 말 없던데요.”
조금 기대하는 표정으로 묻는 준목에게 일부러 장난치듯 말한 유모는.
그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시무룩해지는 걸 보면서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방에 올라가셨는데, 금방 내려오실 거여요. 아침은요?”
“창수랑 먹고 왔어. 어멈.”
“창수도 안 본 지 오래됐네. 한 번 데려오셔요. 맛있는 거 해줄 테니.”
유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준목이 말을 이었다.
“어멈 나 서재에 있을게.”
호수가 혹시 본인을 찾을까 봐 굳이 어디 있을 거라고 말해주는 준목이었다.
유모는 요즘 두 부자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냉기가 돌던 사이가.
물론.
호수의 일방적인 밀어내기였지만.
어쨌든 그런 사이가 제법 좋아져 보는 사람이 미소 짓게 만드는 날이 잦아졌다.
“보세요. 야구 허락해 주니까 얼마나 좋아요.”
유모가 눈을 찡긋하며 준목에게 말했다.
준목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유모에게 윙크로 답했다.
서로 기분 좋은 미소를 주고받다, 갑자기 할 말이 떠오른 듯 서재 문 앞에 멈춰 선 준목이 입을 열었다.
“아. 그거 말이야.”
그는 ‘그거’라는 말을 꺼내며 목소리를 낮췄다.
장부를 그렇게 표현한 걸 단번에 알아챈 유모가 준목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나한테 있다고 말했어. 끝까지 모르쇠로 우기길래."
준목의 안위가 걱정이었던 유모는 웬만하면 간접적으로 야쿠타를 이용하길 바랐지만.
결국 늘 그랬듯이, 그는 전면전을 선택한 것이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어멈의 수심 가득한 얼굴을 본 준목이 밝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어멈. 하하하."
그녀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야쿠타가 언제 준목을 공격해 올지, 어떤 식으로 공격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비열함의 표본인 그를 상대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잔뜩 걱정을 안고 있는 유모를 보며 준목이 말했다.
“아마 곧 나한테 돈 빌리러 올 거야. 그건 빌려주려고. 어차피 어디로 갈지 아니까. 일단, 야쿠타가 그 자리에 잘 있어야 쓸 데가 많잖아. 그리고 값을 제대로 쳐서 다시 돌려 받아야지.”
준목은 야쿠타의 약점을 강하게 쥐고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이 다 그려질 때까진, 야쿠타는 꽤 필요한 퍼즐이었으니까.
유모는 준목의 눈빛을 보며 하고 싶은 말을 아꼈다.
“저도 도울 일 있으면 도울게요. 그리고 제발 몸조심하셔요. 아셨죠?”
집에 두는 것도.
준목이 가지고 다니는 것도 불안한 이중장부.
심지어 그걸 도구로 야쿠타를 이용할 생각이라니.
예상은 했지만.
그게 현실이 되니 유모도 내심 걱정이 앞섰지만.
준목의 성격을 잘 아는 탓에.
말을 아낀 것이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괜찮아. 어멈.”
준목이 갑자기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재밌는 기억을 떠올리는 표정을 지었다.
“실력이 엄청난 경호원 하나 뽑았거든.”
걱정이 잔뜩 찬 유모에게 장난기 가득한 해맑은 웃음을 짓는 준목.
“그래도······.”
여전히 걱정을 놓지 못하는 유모.
“진짜야. 얼마나 날쌘지, 사람 눈에 보이지도 않아. 슉슉슉. 하하하.”
“으이그!”
찰싹.
유모는 오늘따라 철없이 까부는 준목의 등짝을 세게 한 대 때렸다.
“아! 아파, 유모!”
“여적 철이 안 들었고만요! 아휴!”
못 말린다는 듯이 휙 돌아서 가는 어멈을 보며 준목은 살짝 미소 지었다.
그 사이 계단을 내려오던 호수와 눈이 마주친 준목은 사나이의 비밀을 지켰다는 듯.
비장한 표정으로 유모를 가리킨 뒤.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시그널을 눈치챈 호수가 준목을 보고 씨익 웃어 보였다.
서재 안.
준목과 호수는 서로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아버지.”
“호수야.”
동시에 입을 연 둘.
“아, 아버지 먼저 말씀하세요.”
“아니. 호수 너 먼저 말해라.”
“아버지부터 말씀하세요.”
“그래. 그럼, 나부터 하마.”
결국 더 궁금한 게 많은 준목이 먼저 발언권을 가져갔다.
“어떻게 된 거냐.”
“아, 그거요.”
짧은 말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준목은 야쿠타에게 가기 직전에.
호수와 전화를 한 통 더 했었다.
준목이 전화를 받자마자, 호수는 대뜸 지금 야쿠타를 찾아가냐고 물었고.
준목은 그렇다고 말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의 안위가 걱정된다며, 호수는 한참 뜸 들이다 결국, 준목에게 야구공의 존재를 밝혔었다.
“유모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해서 비밀은 지켰다만.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냐?”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했다.
전화로 호수가 오른쪽 어깨를 조심하라고 했을 때,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무언가 준목의 어깨를 툭툭 쳤었다.
놀라서 주변을 살펴보는데, 갑자기 눈앞에 바람이 일었다.
무언가 빠르게 지나간 것이다.
그 상황에 놀랄새도 없이 거의 동시에, 자신의 손등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톡톡 쳤다.
마치 눈앞을 빠르게 지나갔던 게 자신이라는 듯 존재를 알린 무언가, 그건 바로 투명 공이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데, 내 손을 가볍게 톡톡 치기도 하고. 눈앞을 빠르게 지나가기도 하고 말이다.”
호수는 그게 야쿠타 옆에서 계속 있을 거고.
준목이 위험에 처하면 바로 공격할 거라고 했었다.
덕분에 그는 야쿠타를 만나러 가서도 든든함을 느꼈다.
아무리 긴장감 넘치는 상황이었어도, 공의 존재는 잊을 수 없었다.
한 번씩 자신의 어깨나 손을 톡톡 건드리며 존재를 계속 인식시켰으니까.
“저도 아직 알아가는 중이라 다 알진 못하지만.”
호수는 투명 공을 갖게 된 경위와.
지금까지 자신이 알아낸 것들을 준목에게 설명했다.
“······네 말대로면. 지금 호수 네 손에 그 공이 있다는 말이겠구나?”
“예.”
“그 공은 너의 말이면 아무리 먼 곳도 순식간에 간다는 거고.”
“그 거리가 정확히 어디까지 인지는 아직 확인 못 했어요. 떠올릴 사람이 없어서.”
“그 말은. 머릿속으로 그 사람을 떠올리기만 하면, 공이 바로 그 사람에게 간다는 의미인 게냐?”
“예.”
“허허허.”
“공은 물건이나, 사람을 지킬 수 있다고 했거든요.”
“누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호수에게 되묻는 준목.
그를 보며, 순간 고양이가 알려줬다고 말할 뻔한 호수는 급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아. 하하. 제가요. 제가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냥 그런 것 같아요. 아하하.”
고양이가 알려줬다는 것도, 스스로 그냥 알게 됐다는 것도, 어느 것이든 이유로 들자면 이상한 상황.
어쨌든 굳이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차라리 그냥 알게 됐다는 게, 그나마 더 자연스럽다고 호수는 생각했다.
“어쨌든. 공은 계속 아버지랑 장부 주변에 있을 거예요.”
호수는 당분간 투명 공으로 준목과 장부를 지킬 생각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야쿠타 그자도, 내가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르니, 조심하는 분위기구나.”
강약약강인 야쿠타는.
일단 준목에게 ‘약’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회를 노려 분명 다시 ‘강’이 되려 할 것을 호수도, 준목도 모르지 않았다.
“예. 그래도 계속 아버지 근처에 둘게요. 안 보여도 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한 번씩 궁금하면 있냐고 물어보세요. 말도 알아듣는 것 같아요.”
“그래?”
“예.”
호수의 말에 준목은 의심 반, 기대 반의 표정으로 작게 속삭였다.
“큼흠.······있나?”
아주 작은 소리였음에도.
순간.
호수 손에 있던 공이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준목의 근처로 날아갔다.
톡톡.
그리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치며 존재를 알렸다.
“정말이구나!”
준목은 놀란 눈으로 호수를 바라봤다.
'이게 되네.'
그 모습은 본 순간, 호수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고양이가 처음 호수에게 공에 대해 알려줬을 때.
공은 물건이나 사람을 지킬 수 있다고 했었다.
지킨다는 건.
일회성일 수 없다.
그 말은.
호수가 없는 곳에서도 대상을 지킬 수 있다는 의미.
한 번에 몇 개까지 가능할지.
그게 어떤 식으로 할 수 있는지는 준목과 하나하나 해보면서 알아갈 생각이었다.
그래도 혼자 며칠 동안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며, 여러 기능을 알아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공과 대상의 연결.
어제 오후 훈련 도중.
호수는 본인의 글러브를 지키라고 공에게 명령한 뒤.
혁수에게 글러브를 좀 가져다 달라고 했었다.
별생각 없이 글러브를 집으려고 혁수가 손을 내밀자.
투명 공은 순식간에 혁수의 눈앞을 지나가며, 그를 뒤로 물러나게 했었다.
그 강도나 속도 역시 호수가 조정할 수 있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행여 혁수가 다칠까 최대한 살살 움직이라는 명령을 그대로 들었으니까.
그래서인지 혁수는 눈앞에 벌레가 지나갔나 하는 정도로 넘어갔었다.
공의 움직임이 보이는 호수는 굳이 여러 번 반복하지 않아도.
어떤 식으로 물건을 지킬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사람도 연결이 될 것 같았는데. 역시.’
호수는 물건과 다르게 사람은 본인이 허락하면, 공의 능력을 같이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공의 존재를 알고 있는 아버지에게.
조금 유치하긴 하지만, 공에게 말을 걸어보라고 했던 거다.
‘그럼 혹시, 생각으로 움직이는 것도 가능하시려나?’
호수의 경우는 생각만으로 공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도 가능한지 궁금했던 호수는 준목에게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속으로 생각하면서 한번 불러보실래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한 준목은.
최대한 공을 부르는 데 집중하며 속으로 여러 차례 불렀다.
‘공아, 있냐? 올래? 없니? 와보겠니? 와 주세요. 오시겠어요?’
하지만.
간절한 준목의 부름에도, 투명 공은 호수의 손을 떠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호수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움직이는 아버지를 보며 생각했다.
‘생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건 나만 가능한 것 같네.’
좀 더 확인이 필요하지만.
공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그걸 속으로 조종할 수 있는 것도, 지킬 대상을 정하는 것도.
호수 본인만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공의 기능을 어느 정도 알아챈 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 정도면. 대박이지.’
고양이도 공에게 아직 더 많은 능력이 있을지 모른다고 한 상황.
호수는 계속 실험을 해볼 생각이었다.
‘어디 설명서 없나.’
블로그 글을 검색할 수도 없고.
직접 하나하나 기능을 알아가다 보니.
설명서가 절실히 필요했다.
‘고양이처럼, 저 공하고 대화만 통해도.’
말도 안 되는 일.
호수는 그런 생각을 한 것이 못내 어이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한참을 웅얼거리다 포기한 준목이 눈을 떴다.
“생각만 해서는 아무래도 안 되는 모양이다.”
“그러게요. 아 그리고 아버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호수가 본론을 꺼냈다.
“영수 형이 많이 아파요······.”
슬픈 표정을 짓는 호수를 보는 준목의 표정이 몹시 애매해졌다.
‘······마주칠 때마다 돈 들어갈 일이 생기네. 허허.’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호수를 보는 준목.
‘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돈 얼른 불려서, 선수들 관리는 제 돈으로 할 테니까. 당분간만 부탁드립니다.’
여전히 어색한 얼굴로 슬픈 연기를 하는 호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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