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46화
“숙소에?”
호수의 눈이 커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이 씨 아저씨가 있었기 때문.
“오늘 내가 갔던 그 숙소 말하는거야? 쌀 저장고 근처에 있던 거기?”
투명 공이 호수의 말에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아저씨가 거기 왜?”
그러다 문득 생각 하나가 그쳤다.
“아! 아버지가.”
어린 호수의 기억 속에 아버지와 이 씨 아저씨가 같이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딱 한 번뿐인 기억.
연결고리라면 그게 다였기 때문에.
호수는 아버지가 이 씨 아저씨를 거기에 데려다 놓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잘 됐어.”
그는 어차피 만났어야 할 이 씨 아저씨를 내일 훈련 후에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일이 잘 진행되는 기분.
호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방은 어떻게 지낼만 하십니까? 허허허.”
준목이 이 씨에게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요. 감사합니다. 고려단 선수들이 몇 시에 온다고 하셨죠?”
“유산소가 새벽 5시 반에 시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허허허.”
“그렇군요.”
“예. 그리고 아침 먹고 잠시 쉬었다가 오전 훈련으로 수비 연습을 할 겁니다. 그리고 점심 먹고 또 잠시 쉬었다가 오후 운동으로 타격 훈련을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예? 오전 훈련에, 오후 훈련까지 한다고요?”
“하하하.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녁에 모여서 전술 훈련, 작전 훈련을 한다는데. 경기가 없는 겨울엔 어떤 훈련을 할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허허허.”
준목은 내심 뿌듯해하며 말하는 그를 입을 살짝 벌리고 쳐다봤다.
“그걸 매일 올겨울 내내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허허. 그런다고 하네요. 호수가.”
말로만 들어도 뭔가 꽉 찬 일정.
이 씨는 놀라며 물었다.
“대단하죠? 훈련하는 거 직접 보시면 더 놀라실 겁니다. 허허허.”
말로만 들을 때는 그저 힘들겠다 수준이지만.
실제로 훈련하는 걸 본 사람들은 이 씨 아저씨처럼 놀라거나 대단하다 느끼는 것을 넘어 경악했다.
평소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는 준목의 경호원 창수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이번에 하이호도 이겼던 거 아닙니까. 하하하.”
준목은 자연스레 자식 자랑으로 넘어가 신나서 이야기를 꺼냈다.
이 씨 아저씨는 그의 말을 경청하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5시 반이면 운동을 시작한다는 거지?’
이 씨는 속으로 호수를 보러 갈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준목의 아들을 보러가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가 미래에서 온 건지 확인하고 싶어서.
‘알아볼수록 맞는 것 같단 말이지.’
처음엔 그저 준목의 ‘대박’이라는 표현 하나에 집착하듯 호수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었다.
작은 실마리 하나로 집요하게 알아내며 연구할 수 밖에 없는 이 씨에게 그 정도 정보는 커다란 떡밥과도 같았으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알아볼수록.
그가 이 시대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 말투와 단어를 익숙하게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시대가 비슷하다면. 가능성은 있다.’
이 씨는 어쩌면 자기의 아내가 다시 돌아간 미래와 호수가 온 미래가 비슷할 수 있다는 예측을 했다.
그게 가능하다면.
분명 다시 돌아갈 호수에게 자기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아내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거면 된다. 그거면.’
“그래서 야구를 연습할 공간도 만들어주게 된 겁니다. 하하하.”
여전히 준목은 호수를 자랑하기 바빴고.
이 씨는 마치 이야기를 경청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씨의 눈빛이 빛났다.
**
다음 날 새벽.
익숙하게 마당에 줄을 선 선수들과 처음이라 어색하지만, 열정을 가득한 표정을 지은 신입들 까지.
모두 모여 두 줄로 줄을 섰다.
얼굴엔 피곤이 서렸지만, 눈빛은 빛났다.
“다들 준비 됐지?”
“네!”
“네!”
“그래, 가자.”
“네!”
“네!”
호수 옆에 선 영수의 말에 선수들이 씩씩하게 답했다.
“어? 웃터골로 안 갑니까?”
영수와 호수 바로 뒤에서 뛰는 병호가 물었다.
“오늘부터는 다른 곳에서 훈련한다.”
호수에게 어느 정도 내용을 전해 들은 주장은 앞을 보고 달리며 병호에게 말했다.
“우리가 연습할 다른 곳이 있기는 한겨?”
재호가 의아한 듯 물었지만, 주장은 그저 고개만 가볍게 끄덕일 뿐이었다.
달려가는 길이 웃터골이 아닌 방향인 것만 빼면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는 유산소 운동이었다.
“가보면 알겠지, 뭐어.”
“그러니까요.”
병호가 재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모든 걸 다 말해주진 않지만.
늘 호수의 행동엔 이유가 있었다.
그간의 신뢰로 그를 전적으로 믿는 그들은 굳이 많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금방 알게 될 테니까.
살을 에는 듯한 찬 바람을 얼굴에 정면으로 맞으며 고려단이 힘차게 소리쳤다.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한참 달리던 선수들이 한 장소 앞에 우두커니 멈춰섰다.
“이게 뭐여?”
“다른 곳에서 연습한다던 게 여기라고?”
“어마어마하게 커 보이는데?”
“들어가시죠.”
호수는 쌀 저장고에 잠긴 자물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와!”
“우와!”
그 뒤를 따라 들어온 선수들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굳이 비밀은 아니었지만.
어제 봤음에도 혹여나 하는 마음에 말을 아꼈던 혁수와 철만이 신나서 여기저기 선수들에게 설명했다.
“저 그물이 건물 전체에 있는 건 왜 그런 겁니까아?”
“공 이래 막 쳐도 건물 벽에 안 닿게 하려고 호수 아버지가 그물로 다 두르신거라 카드라.”
“아! 그렇습니까아! 정말 대단합니다!”
“여기 바닥 보면 달릴 수 있게 다 선도 그려주셨어요.”
“우, 우와···. 정말 달리기 좋게 선이 다 그려져 있네···!”
“진짜 멋지지?”
“진짜 멋집니다아!”
“너, 너무··· 멋져요!”
“또 둘이 존댓말 쓴다.”
혁수는 어제 소개 이후 말을 놓기로 했던 훈이와 진박이 자기에게 높임말을 쓰자 서운한 얼굴로 지적했다.
훈이가 깜박했다는 듯 미안한 표정을 하며, 더 기어들어 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미안! 너무 멋져···!”
“진짜 너무 멋지다아!”
진박 역시 말을 고쳤다.
“봐봐. 저거는 타격 연습할 때 공 던져 주는 사람이 다치지 않게 하는 장비인데······.”
선수들은 저마다 연습장 안을 이리저리 살피며 놀라기 바빴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호수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선수들에게 외쳤다.
“어차피 이제 매일 올 겁니다. 구경은 매일 조금씩 하시고. 지금은 하던 거 마저 하시죠. 땀 식으면 고뿔 걸립니다.”
그가 대열에서 흩어진 선수들을 불러 모으자, 선수들은 다시 대열로 합류했다.
“가볍게 10바퀴 뛰고, 단거리 장거리 달리기 한 다음 근력 운동 순으로 갑니다.”
“자, 잠깐. 10바퀴? 웃터골도 5바퀴씩 뛰었잖아.”
혁수가 놀라 물었다.
“웃터골 보다 좁아.”
“거의 비슷해 보이는데······?”
“그때랑 똑같이 해서는 이기기만 하는 팀은 못 하지. 두 배, 세 배, 아니 열 배는 더 해야지. 최소.”
“최소 열······배?”
훈련에 있어 절대 빈말은 하지 않는 호수 성격을 아는 선수들이 급격히 말을 줄였다.
괜히 말을 더 보탰다가 맞는 말 폭격에 휘말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
“준비해라.”
주장이 분위기를 다잡으며 선수들을 집중시켰다.
“간다.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난방이 전혀 안 되는 저장고 안이 선수들의 열기로 채워졌다.
“우, 우웩!”
“우,우읍!”
생각보다 고된 기초 체력 훈련에 선수들은 돌아가면서 헛구역질했다.
“······어떻게 전보다 더 힘든 훈련이 있을 수 있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멍하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병호를 보며 영훈이 물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게, 오늘은 첫날이라 그나마 다른 날보다 쉬엄쉬엄하는 거래요. 형.”
“도대체 그런 훈련은 어디서 알아 오는 거야.”
“그러니까요.”
둘은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양옆으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앞줄에 앉은 영수와 재호도 상황은 마찬가지.
“속이 울렁거리는구먼. 하도 달렸다 멈췄다 달렸다 멈췄다 반복했더니.”
재호가 평소보다 훨씬 강도 높은 유산소 운동에 넋을 놓고 말했다.
“나도 죽겠다. 죽겠어. ······근데 호수 녀석. 어째 체력이 더 좋아진 것 같지 않냐?”
“나만 느낀 게 아니구먼?”
주장인 영수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같으면 저 멀리 안 보이는데 가서 한참 속을 게웠을 녀석이. 오히려 오늘은 우리보다 멀쩡해 보인다.”
“그러게 말여. 다들 앉을 힘도 없는데. 저기 보라고. 벌써 다른 운동 할 준비 하고 있잖여.”
둘의 말을 듣고 있던 병호와 영훈도 자연스레 대화에 합류했다.
“가만 보니까 살도 제법 붙은 거 같은데요? 몸도 커진 것 같고.”
“그러네. 호수 형 뒤태가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언제 체력이 저렇게 좋아진 거지?”
“혼자 또 따로 운동을 한 모양이지?”
“그랬나봐요.”
"대단하다."
"대단하네요."
"대단하구먼."
"훈련이 익숙해 지는 날이 오긴 하겠죠?"
영훈의 악의 없는 질문에 선수들은 아무런 답도 해줄 수 없었다.
그런 날은 오지 않을걸 모두 알고 있었으니까.
"자, 다들 푹 쉬셨죠? 모이세요. 몸 식으면 고뿔걸립니다!"
선수들은 서로 한 번씩 시선을 주고받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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