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 시작 - 2
사람들은 현재를 '포스트 게이트 시대'라 부른다.
10년 전, 세계 곳곳에 갑작스레 나타난 게이트들.
그 안에는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던 몬스터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세계 각 정부에서 이 게이트의 출입을 막아놓았다.
하지만...
"크아아악!!"
"캬아악!!"
게이트가 생성된 지 일주일이 지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게이트에 존재하던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일정 시간 내에 게이트를 토벌하지 않는다면 몬스터들이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오던 것이었다.
이후로 헌터들은 게이트를 토벌하게 되었다.
최광훈은 그 혼란 속에서 대한민국의 게이트를 가장 먼저 토벌한 1세대 헌터였다.
'처음 등장한 SSS랭크 헌터였으니.'
헌터들은 강함을 토대로 D랭크부터 S랭크까지 정해졌다.
하지만 최광훈은 게이트가 처음 생겼을 당시 35살 나이에 세계 최초로 SSS랭크를 받았다.
"진짜 최... 최광훈 헌터님 맞으신가요?"
"하하. 네. 맞습니다."
"최전선에서 은퇴하고 헌터 사업에 전념하겠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래. 최광훈이 은퇴한 지도 벌써 3년 정도 지났다.
갑작스러운 SSS랭크의 은퇴에 처음에는 전 세계가 술렁였다.
하지만 은퇴 후에도 길드에 남아서 헌터 사업을 이어가겠다는 그의 의지를 결국에는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현장에 나와서 감회가 새롭네요. 실전 감각도 되찾을 겸 후배들과 함께하게 됐습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사진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같이 찍어요."
퍽!
내가 부랴부랴 핸드폰을 꺼내고 있을 때, 어디선가 커다란 손이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 뭐지?"
뭐에 맞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빠른 속도.
무엇보다 머리가 깨질 정도로 엄청나게 아팠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니 곽마권이 인상을 쓴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야! 놀러왔냐? 힐러 주제에 게으름 피우고 말이야."
"아..."
너무나 황당한 마음에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곽마권이 성격 더럽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초면인 공대원 뒤통수를 다짜고짜 후려치다니.
이 바닥에서 일하면서 본 적도 당한 적도 없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권씨. 힐러분한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희는 게이트에서 생사를 함께할 전우 아닙니까?"
"하! 전우요? 저놈은 그냥 힐 포션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에요.
버스나 타는 주제에 고마운 줄도 모를 걸요?"
"민혁씨. 제가 대신 사과 드릴게요."
곽마권이 유명한 것은 그의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인성이 안 좋기로 소문난 것.
곽마권은 인하무인한 언행으로 악명을 떨쳤다.
만약 곽마권이 조금이라도 어중간한 실력이었으면 분명 이 바닥에서 매장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더러운 인성은 안타깝게도 엄청난 실력에 묻히고 말았다.
'아쉬운 사람이 기어야지... 어쩌겠냐.'
곽마권은 세계권 순위 안에 드는 탱커였다.
탱커의 실력에 따라 공략 난이도가 급감하는 만큼 곽마권은 여러 길드에서 모셔가려고 애를 썼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기에 곽마권을 부를 때는 항상 엄청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나는 얼얼한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안경을 쓴 남자에게 다가가 서류봉투를 건넸다.
"혹시 서류 여기다가 제출하면 될까요?"
"아. 네. 안녕하세요. 최민혁씨 맞으신가요?"
"아 넵."
"네. 저는 이번 공대 담당관입니다.
일단 서류 주시고요. 설명은 사장님한테 들으셨지요?"
"네. 대충."
남자는 내가 건넨 서류를 대충 스윽 보고는 서류철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사장님은 랭크를 조작한 서류로 우리를 비싼 가격에 팔아넘기는 것에 성공했다.
사실 서류에 나온 헌터 자격증의 번호를 조회하기만 해도 내 랭크가 나올 텐데.
어떻게 매번 이렇게 감쪽같이 속이는 건지 아무리 물어봐도 영업비밀이라며 알려주지 않았다.
'하긴. 이렇게 대충 검사하는데 걸릴 리가 없지.'
서류를 제출하고 아까 못 찍은 최광훈과의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다시 슬쩍 가보았다.
하지만 최광훈은 어디 갔는지 없고 웬 예쁘장한 여자가 잔뜩 비음을 섞은 목소리를 내며 곽마권을 안고 있었다.
"오빵~ 공대원들 다 왔대~ 여기서 뭐해~"
"어~ 유리야."
"우와! 오빠! 오늘도 너무 멋있다~ 오늘도 오빠가 캐리해줘~"
"허허. 그럼 다 모였다니 우리도 준비하러 가보자.
뭐 나는 준비 따위는 필요도 없지만."
곽마권은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갔다.
'뭐야. 저 여자는?'
190이 넘는 곽마권과 살포시 안겨 있는 여자는 마치 미녀와 야수 같은 분위기였다.
여자는 노출이 꽤 있는 복장을 입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헌터는 아니고 곽마권의 애인인 듯했다.
"아까 나한테는 놀러왔느니 어쨌느니 하면서 지는 게이트에 여친을 데리고 와?"
"여친은 아니고 저희 공대의 딜러입니다."
"으악!"
혼자 조그맣게 중얼거린 것에 누군가 대답을 하자 나는 화들짝 놀랐다.
뒤를 돌아보니 실눈을 뜨고 있는 듯한 한 남자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민이라고 합니다. 이번 공대에 용병으로 참석한 딜러입니다."
"아 네. 최민혁입니다. 저도 용병으로 참석한 힐러입니다."
나는 김민이라는 사람과 어색하게 악수했다.
슬쩍 보이는 단검으로 볼 때, 아마 어쌔신 계열 직업인 듯했다.
"민혁씨. 정말 이상하지 않나요?"
"네? 뭐가요?"
김민은 턱을 만지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공대 구성원들 말이에요..."
"공대 구성원들이 왜요?"
설마 은퇴한 최광훈 때문인가?
김민을 슬쩍 보았지만 그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모르시면 됐어요."
"뭡니까? 말하려면 끝까지..."
"어이! 거기 두놈! 빨리 와! 출발할 거다!"
그때 곽마권이 가래 낀 돼지가 멱따는 소리로 고함을 쳤다.
개 같은 놈. 이번 공대가 끝나면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녀석이다.
나는 투덜대며 게이트 앞으로 갔다.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는 거대한 게이트 앞에 모인 공대원은 나까지 8명이었다.
"반갑습니다. 이번 공대장을 맡게 된 최광훈입니다."
최광훈은 사람들 앞에 서서 다음 입을 열었다.
공대원들이 박수를 쳤다.
"이번 공대가 급하게 형성되어서 용병 분들이 좀 많습니다."
최광훈은 국내 최고의 길드, 쓰리문에 소속되어 있었다.
쓰리문은 소수 정예의 느낌이 강한 길드였기에, 주요 자리에 헌터들을 파견하고 나머지는 용병으로 채우기로 유명했다.
"그럼, 다들 초면인데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소개부터 할까요?"
최광훈은 꾸벅 인사를 한 뒤에 곽마권을 쳐다보았다.
곽마권은 굉장히 하기 싫은 눈초리로 최광훈을 쳐다보았다.
'천하의 곽마권도 최광훈 앞에서는 꼼짝 못하는 군.'
그럴 수밖에. 힐밖에 못하는 힐러와는 달리 딜러들은 랭크 하나하나가 차이가 굉장히 컸다.
하물며 S랭크와 SSS랭크의 차이는 천지차이.
최광훈이 아무리 최전선에서 은퇴했더라도 곽마권 정도는 한손으로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곽마권이다. 이번에 부공대장을 맡았지.
그리고 뒤지면 시체는 버리고 올 거니까 알아서 살던지 뒤지시던지."
곽마권에 이어서 아까 보았던 곽마권 애인인지 하는 여자가 앞으로 나왔다.
"안녕하세요~ 이유리에요~ C랭크 소환사지만 딜은 자신 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뭐? C랭크??'
이유리는 무려 C랭크 소환사였다.
A랭크 게이트에 C랭크 딜러를 데리고 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헌터는 랭크에 따라 그 능력 차이가 심했기에 딜러의 랭크는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심지어 힐러인 나조차도 A랭크로 맞춰왔으니.
'분명 곽마권 빽으로 들어왔겠지.'
뭐. 부공대장이 공대원을 고르는 권한 정도는 당연히 있었다.
그러니 저렇게 비위도 좋게 달라붙으면 콩고물은 나온다는 뜻이었다.
'나도 예쁜 여자로 태어났으면 저렇게 빌붙어서 A랭크 게이트도 가고 그랬을 텐데.'
"저희 쓰리문 길드에서는 이렇게 3명이 나왔습니다. 이제 용병 분들 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최광훈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김민. S랭크 어쌔신입니다. 길드는 없고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어요."
아까 나와 인사했던 실눈의 남자가 말했다.
역시 뭔가 세 보인다 했더니 엄청나게 높은 등급의 딜러였다.
'S랭크 둘에 SSS랭크 한 명이면, 뭐 내가 나설 일도 별로 없겠네.'
그러니 저 이유리인가 뭔가 하는 여자도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안녕하세요. 저는 최민혁. A랭크 힐러입니다."
나는 A랭크가 아닌 게 들킬까 봐 재빠르게 인사했다.
매번 B랭크 힐러로 속이고 공대에 들어가긴 했지만 A랭크 힐러라고 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다행인지, 사람들은 나한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쩝쩝. 저는 박연우. 핏불 길드의 A랭크 격투가입니다!"
굉장히 뚱뚱한 박연우가 인사했다.
마치 동글동글한 공 같이 살이 쪘는데 심지어 키까지 커서 멀리서 보면 큰 곰이나 멧돼지로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처음 봤을 때부터 끊임없이 주머니에서 초코바나 사탕을 꺼내 먹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시한 길드 소속 김현재입니다. B랭크 버퍼입니다."
반대로 김현재는 엄청나게 똑똑한 회사원처럼 보였다.
마치 정장 같은 단정한 갑옷 차림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김현재는 랭크가 제일 낮은(실제로는 나와 낙하산으로 들어온 이유리가 제일 낮지만) B랭크였는데, 버퍼의 경우 낮은 랭크에도 효율이 좋아서 게이트 등급보다 한두 단계 낮은 버퍼도 공대에 들어오곤 했기에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이제 한 명 남았네.'
마지막 차례는 한마디도 안 하고 조용하게 있던 외국인 여자였다.
파란 눈의 긴 노란 머리를 가진 굉장히 예쁜 여자였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낯이 익은 거 같기도 한데...'
나는 여자의 얼굴을 보고 이름을 생각해내려 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여자의 이름을 생각해내려 할 때, 여자는 간단하게 목례하며 말했다.
"케이트. SSS랭크. 거너."
"뭐? 케이트??"
나는 화들짝 놀라 케이트를 쳐다보았다.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공대장인 최광훈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김민을 제외한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케이트를 쳐다보았다.
이유리는 입을 틀어막고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있었고, 곽마권조차 케이트의 합류를 몰랐는 듯이 놀라 고함을 질렀다.
케이트 미쉘.
3년 전, 20살에 SSS랭크를 달성한 전 세계 최연소 SSS랭크 헌터.
영국의 유일한 SSS랭크 헌터이지만 최근에는 길드를 탈퇴하고 프리랜서 헌터로 활동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다는 것은....'
SSS랭크가 둘에 S랭크가 둘.
A랭크 게이트가 아무리 클리어하기 어렵다고 해도 S랭크 헌터 둘만 있어도 충분히 클리어할 수 있는 난이도다.
확실히 A랭크 게이트를 토벌하기에 이 멤버는 너무 과했다.
한 명 한 명의 몸값을 생각했을 때, 이 정도 멤버를 모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이 게이트...'
나는 게이트를 쳐다보았다.
'정체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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