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 시작 - 4

치이익
히드라의 입에서 나온 독이 박연우의 몸에 스며들었다.
"으악!!!"
박연우는 고통으로 비명을 질렀다.
맹독이 몸에 스며든 이상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물론 나 같은 힐러가 없는 경우에는 말이다.
"힐링!"
나는 재빨리 힐링 스킬을 시전했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은 다양한 상태이상을 건다.
그중 가장 자주 나오는 상태이상을 뽑으라면 누구나 독을 꼽을 것이다.
작은 벌레부터 각종 보스몬스터들까지.
그렇기에 힐러 학원에 가면 힐 스킬인 큐어 다음으로 배우는 것이 독을 치료하는 힐링이었다.
'아무리 C급 힐러라도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으... 고맙습니다..."
박연우는 몸을 부들거리며 일어났다.
독이 치료되더라도 고통까지 없애주지는 않는다.
그는 고통의 여운 때문인지 도통 일어날 생각을 못했다.
스윽
때마침 최광훈이 공격하던 히드라의 머리 두 개가 잘려 나갔다.
"광훈 형님 머리 두 개 베는 동안 다른 딜러들 뭐하냐!"
곽마권이 소리를 꽥 질렀다.
곽마권이 소리 지르는 것을 듣기 싫었는지, 아울베어와 김민의 합동 공격으로 맨 왼쪽 머리 하나가 잘려나갔다.
뒤이어 엄청난 총성과 함께 다른 머리 하나가 케이트의 총알에 맞아 터졌다.
"좋아. 이제 세 개 남았네요."
나에게 힐을 받아 체력을 회복한 박연우가 바닥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치료 감사합니다. 저도 얼른 다시 합류할게요."
박연우는 빠르게 앞으로 달려나갔다.
"쉿쉬이잇!"
그때, 히드라가 쉿쉿 거리며 우리를 위협하듯 몸을 세웠다.
"하핫. 왜 지랄이야. 이제 대가리 세 개만 남은 주제에."
곽마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머리가 없는 히드라의 목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모두 조심하세요!"
최광훈은 대검을 잡은 채 말했다.
꿈틀거리던 히드라의 목에서 머리 2개가 생겨났다.
"어머. 어떡해."
마치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한 이유리의 리액션과 함께 히드라의 머리가 순식간에 11개로 불어났다.
"쉿쉬쉿!!"
히드라의 22개의 눈이 우리를 노려보았다.
엄청나게 많은 머리 수 때문인지, 히드라의 덩치가 보스방 전체를 가득 채우는 듯했다.
"형님. 이거 좆된 거 같은데요?"
곽마권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히드라에 대한 설화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장 보편적으로 들려오는 설화는 역시 헤라클레스 설화.
머리가 잘리면 그 자리에 2개의 머리가 생기는 것으로 유명한 그 설화 말이다.
"그리고 가운데 목은 불사지 않았나요?"
"뭐? 젠장. 불사면 어떻게 죽여!"
"쉬잇!!"
히드라의 머리가 우리의 대화를 방해하며 날아왔다.
곽마권은 방패로 계속 히드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엄청난 수의 히드라 머리 공격에 상당히 버거워하는 모습이었다.
"몸통을 가장 강력한 기술로 공격하면 됩니다. 모두들 가장 강한 기술을 준비해주세요."
최광훈이 히드라의 공격을 피하며 말했다.
나이 40이 훌쩍 넘은 최광훈이었지만 스피드는 전성기 못지않았다.
히드라의 머리 10개가 최광훈만 집중해서 공격하는데도 단 하나의 공격을 허락하지 않고 모두 흘릴 정도였다.
"각자 기술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말해주세요."
"가장 강력한 건 3분."
케이트가 입을 열었다.
"3분?"
곽마권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술 준비에 3분이라니.
대규모 마법 영창이 아닌 이상 보통 분 단위로 준비가 필요한 기술은 없었다.
케이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저격총으로 히드라를 계속 조준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까부터 준비했으니 이제 2분."
"제기랄. 3분이라니 무슨 컵라면도 아니고 왜 이렇게 오래 걸려?"
투덜거리는 곽마권의 말을 뒤로하고 각자 전열을 잡았다.
케이트의 스킬 시전 시간에 맞춰서 각자 최고의 기술을 한 번에 사용하면 된다.
우리는 공격보다 방어에 집중했다.
그때, 히드라의 머리 하나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너무 놀라 눈을 감았다.
쾅!
눈을 떠보니 히드라를 막고 있는 최광훈의 등이 보였다.
"고... 고맙습니다..."
"힐러가 죽으면 큰일이니까요."
최광훈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우리는 2분을 더 버텼다.
"준비 완료."
케이트의 총구가 빛나기 시작했다.
"모두 몸통을 향해 가장 큰 기술을 날려주세요."
콰앙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게이트 전체가 흔들거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자욱한 흙먼지가 눈앞을 가렸다.
"해치웠나?"
"아... 그 대사는 안 되는데."
곽마권의 신통치 않은 대사에 나는 경악했다.
다행히도 곽마권의 부활 주문은 통하지 않은 듯, 흙먼지가 걷히자 쓰러져 있는 히드라의 모습이 드러났다.
"으어. 역시 A랭크 게이트 보스 답네요."
"머리 엄청 늘어났을 땐,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하하. 다들 화력이 대단하시네요."
"케이트님. 대단해요!"
보스를 잡자 공대원들은 신이 나서 떠들었다.
나는 제각각 떠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얼른 힐을 해주었다.
각자 대화에 정신팔려 힐을 하는 나에게 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형님은 어떻게 몸통이 약점인 걸 알아냈슈?"
"응?"
그때, 곽마권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신화에서는 머리 자르고 불로 지지지 않나? 어릴 때 만화책에서 본 거 같은데."
"마권 오빠~ 나도 그 만화책 본 거 같아~"
이유리가 곽마권의 품으로 뛰어들며 말했다.
"흠... 그게..."
최광훈은 난처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쿠구구궁
히드라가 쓰러지자 구석에 있던 돌벽이 옆으로 움직이며 굉음을 냈다.
나는 놀란 눈으로 벽이 움직인 자리를 보았다.
벽이 있던 자리에는 다른 방으로 통하는 듯한 어두운 통로가 보였다.
"저게 뭐지?"
모두가 당황해하며 그 자리에 서서 굳어 있었다.
"일단 들어가 보죠."
곽마권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함정이면 어떡하죠?"
"그건 걱정하지 마시죠. 보스를 잡았으니 더 이상 함정이 나오지는 않을 겁니다."
최광훈이 앞장서며 말했다.
다른 공대원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최광훈의 뒤를 따랐다.
통로는 길지 않았다.
얼마 걷지 않아서 곧 조그마한 방이 나왔다.
방에는 아무것도 하나 없이 비어있었다.
다만.
"방에 있는 거라고는 구덩이 하나밖에 없네요."
나는 조심스럽게 구덩이에 다가가 보았다.
밑이 보이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깊숙하고 큰 구덩이었다.
"설마 여기로 들어가야 하는 거야?"
"그냥 별 쓸 데 없는 방 아닐까요?"
"아니면 여기에 뭔가 던져 넣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우리가 웅성거리고 있을 때였다.
"여기까지 온 필멸자들이라면 꽤 강하겠구나."
어디선가 엄청 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냐!"
"하하. 귀엽구나. 걱정 말거라.
너희와 싸우러 온 게 아니라 여기까지 온 너희에게 보상을 주려고 온 거니까."
"보상?!"
곽마권은 목소리만 들리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무섭지도 않은지, 고함을 질러댔다.
배짱 하나는 정말 인정할 만하다.
"여기는 어디일까요? 저 말을 믿어야 할까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김민이 속삭였다.
보스를 잡았으니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맞기는 하지만, 갑자기 이런 미지의 목소리가 보상을 준다는 경우는 들어보지도 못했었다.
"그럼 그 빌어먹을 보상이란 게 뭔데?"
과감하게 물어본 것은 역시 곽마권이었다.
"하하. 그래. 일단 그 빌어먹을 보상부터 보여주지."
의문의 목소리는 오히려 기분이 좋은듯 했다.
허공에 기다렸다는 듯이 7개의 물약이 담긴 병이 나타났다.
분홍색 액체가 담긴 병은 구덩이 너머로 둥실둥실 떠 있었다.
"이건 지혜의 열매. 너희에게 주는 보상이다."
"열매? 이게 뭔 열매야. 딱 봐도 물약이구만."
"이 약을 마시면 너희는 자신의 한계를 한 번 더 뛰어넘을 수 있다."
"한계?"
그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김현재가 입을 열었다.
공대원들은 모두 7개의 아름다운 물약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필멸자의 언어로 바꾼다면 랭크라고 하지."
"뭐? 그럼 시발 내가 SSS랭크가 된다는 거야?"
곽마권이 놀라서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놀란 것은 곽마권뿐만이 아니었다.
공대원 모두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랭크는 처음 측정된 이후로 올리기가 매우 어려웠다.
진짜 힘겹게 몇년 수련을 하거나 엄청나게 희귀하고 특수한 아티펙트를 사용해야 고작 1개의 랭크를 올릴까 말까 했다.
심지어 이것도 B랭크 밑의 저랭크 얘기이고 A랭크 이상부터는 랭크를 올린 사례 자체가 없었다.
"그럼 나도 S랭크가 되는 거야?"
"S랭크가 되면 아무리 적어도 지금 버는 돈에 30배는 벌 수 있다."
"내가 A랭크가 된다고?"
공대원들은 들떠서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들뜬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나도 B랭크가 되는 거야? B랭크면 나도 쉴드를 배울 수 있는 거잖아.'
우리 회사 유일한 B랭크 힐러인 상민이 형만 봐도 벌이부터가 나 같은 C랭크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좋았다.
'B랭크 되면 바로 퇴사해야지.'
"그런데 왜 물약이 7개지?"
김민의 말에 우리는 조용해졌다.
"하하. 예리하구나. 맞아.
너희 인원수보다 하나가 적게 준비했다.
이 보상을 받으려면 너희 중 하나를 제물로 바쳐야 하거든."
"뭐라고?"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우리는 결코 저 목소리가 농담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모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뭐? 제물?"
"제물로 바칠 사람 한 명을 정해 이 구덩이로 넣으면 된다."
"젠장. 뭔 개소리야!"
공대원들은 입을 떼지 못한 채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저 목소리의 말이 진실임을 알 수 있었다.
랭크가 오를 수 있는 보상은 분명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중 한 명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그럼 그냥 보상을 포기하는 선택지는...."
"미쳤어? 너 저 물약만 먹으면 SSS랭크인데. 전 세계에 SSS랭크 탱커는 한 명도 없는데. 이런 기회를 놓친다고? 난 절대 포기 못해. 너희들 중 한 명 제물 정해!"
"하아. S랭크만 된다면 내가 길드 마스터가 될 수 있는데."
"그래도 우리 중에 한 명은 죽어야 된다는 거잖아요. 그걸 어떻게 정해요."
"오빠."
그때, 이유리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냥 저 힐러로 하면 안 돼? 전투 중에 가장 쓸모없었잖아."
"뭐라고요? 제가 힐을 얼마나 열심히 넣어 드렸는데. 솔직히 당신 소환수가 가장 쓸모없었잖아요!"
"뭐 새꺄? 지금 누가 누구한테 훈계질이야!"
"당신도 뭐라 말해봐요. 아까 제가 힐링을 쓰지 않았다면 당신도 위험했잖아요."
곽마권의 고함에 움찔한 나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박연우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박연우는 내 눈을 피한 채 아무 말 없었다.
"당신.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아니. 애당초 쉴드도 못 쓰는 놈이 뭐가 말이 많아. 힐도 쥐꼬리만큼 들어오더만!"
"아니 그게 무슨..."
이미 곽마권과 이유리는 나를 타겟으로 잡은 듯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나는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다른 공대원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다른 공대원들도 내 눈빛을 피하거나 오히려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뭐야.. 다들 왜 그래요?”
나는 공대원들이 싸늘해진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 최광훈이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래. 최광훈이라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해결해 줄 것이다.
"광훈님. 제발 뭐라고 말해주세요. 누군가 죽어야 되다니... 이건 살인이잖아요."
최광훈은 한국 제일의 소드마스터.
비록 지금은 은퇴했지만 그가 헌터 시절 걸은 길은 영웅의 길이라 할 수 있었다.
그의 영웅담은 모든 헌터들에게 전해져 내려왔다.
최광훈이라면 분명...
"맞아요... 이건 살인입니다."
"네?"
최광훈은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푹
배에서 피가 솟구쳐 나왔다.
최광훈과 영웅의 길을 함께 걸었던 검.
그 검이 내 배에 꽂혀 있었다.
"어째서..."
"그러니 절 용서하지 마세요."
"광... 훈님?"
피가 솟구쳐서 그런지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최광훈은 힘이 없는 나를 들쳐메고 구덩이로 던졌다.
"하하하하! 좋아! 너희라면 보상을 얻을 자격이 있다! 하하하!"
구덩이로 떨어지며 위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는 것이 들렸다.
나는 아래로... 아래로 점점 떨어졌다.
끝없이 깊어 보이는 어둠 속으로 나는 추락했다.
배의 통증도, 배신감도 모두 무뎌져 갔다.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왜... 하필 나였을까...'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