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의 시작 - 5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한 가지를 이야기한다.
죽기 전에 인생의 주마등이 스쳐 지나간다는 것.
나 역시 그랬다.
마치 어두운 방에서 빔프로젝터를 켠 것처럼, 어릴 적 내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귀엽고 순수했던 그 시절의 나를 보며 가슴이 아려왔다.
저 때는 아무 걱정 없이 살았었는데...
"일어나거라."
순식간에 어른이 된 내 모습이 보였다.
힐러가 되어 게이트에 들어가 있는 나였다.
"큐어. 큐어. 큐어..."
"이봐! 여기는 힐 언제 줄 거야?"
힐을 하다가 지친 나에게로 공대원이 다가와 호통을 쳤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허둥지둥 대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바로 드릴게요."
"쳇, 굼떠가지고. 이래서 초보 힐러랑 같이 하면 안 된다니까."
나는 다른 공대원들에게 무시당하며 허둥지둥 뛰어다녔다.
심장이 쿵쿵거리고 손에는 땀이 배었다.
초보 시절의 나는 이렇게 무능하고 나약했던가.
"일어나거라!!"
커다란 고함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을 떠 보니 어두운 방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죽기 전 마지막 꿈인가?
아니면 이미 죽은 후 사후세계인가?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누... 누구세요?"
나는 용기를 내어 나를 깨운 사람에게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 내가 누군지가 중요할까?"
어딘가에서 젊은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그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냉정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칠흑 같은 어둠뿐.
공포감이 밀려왔다.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멀리서 엄청나게 작은 불빛이 비쳐왔다.
아마도 내가 떨어진 구덩이의 입구인 것 같았다.
"저기서 떨어진거야? 내가 어떻게 산 거지?"
"하? 어째서 살았냐니. 당연히 내가 살려준 거 아니겠느냐?"
하긴. 이 높은 구덩이에서 떨어졌으면 누가 구해주지 않는 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했을 터. 나는 나와 대화를 하는 존재에 의해 살아남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죽어있을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보이지 않는 허공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내 목소리는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감사 인사는 됐고."
화르륵
갑자기 허공에 불이 나타났다.
그러자 어둠이 걷히고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으악!!"
시야가 밝아지자 나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주위에 검은 거미처럼 생긴 수백 마리의 괴물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나는 온몸이 굳어버렸다.
"끼긱...끼긱..."
그것들은 단순한 거미가 아니었다.
작은 것은 강아지 크기, 큰 것은 코끼리만 했다.
온몸이 검은 털로 뒤덮인 채 루비처럼 빨간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나에게는 다가오지 못한 채 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이상한 소리만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마치 언제라도 달려들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그런데 왜 나에게 안 오지?"
"내 권능 때문에 함부로 오지 못하는 것이다."
"권능이요?"
나는 내 옆에서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았다.
허공에 둥둥 떠있는 것이 마치 도깨비불 같았다.
"감사합니다."
"참고로 나는 그 불이 아니니 거기다가 인사하지 말거라."
불에 고개를 숙이다가 머쓱해진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서... 여기서 나가는 길이 어디죠?"
"나가는 길은 입구와 같으니라."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거라."
나는 다른 출구가 있을까 하고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하지만 사방은 괴물 거미로 가득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평범한 구덩이는 아니다.
바로 대악마, 바알세불의 제단이다.
그렇기에 출구는 존재하지 않지.
나가는 방법은 오직 네가 떨어진 입구로 되돌아가는 것뿐이다."
바알세불의 제단···
그렇다면 나를 죽게 만든 그 목소리의 정체가 혹시 그 대악마 바알세불이었던 것인가?
게이트에서 대악마들을 만났다는 헌터의 이야기는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소문일 뿐, 그 실체가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었다.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 곳으로 나갈 수 있을까?'
하지만 보이는 것은 너무 멀리 10원짜리 동전 크기로 보이는 빛뿐이었다.
저 위로 다시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조졌네..."
"물론 나는 널 내보내 줄 힘이 있지."
"당신... 아니 누님이요?"
나는 다시 불을 바라보았다.
그래. 생각해보면 떨어져 죽은 뒤 괴물들한테 시체가 뜯어 먹힐 뻔한 나를 살려준 은인이다.
당연히 여기서 끝이 아니겠지.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누님!"
"물론 공짜는 아니지만."
역시 그렇지.
처음부터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이 뭔가 수상하긴 했지만, 결국 그녀가 나를 살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여기는 바알세불의 제단이고 출구는 없다.
심지어 주위에는 괴물이 득실거린다.
만약 이 분마저 사라져 버린다면 나는 저 괴물들에게 뜯어 먹힐 것이 틀림없었다.
결국 나한테 선택지는 하나였다.
살고 싶다면 원하는 것이 뭐든지 들어주는 수밖에.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누님!"
"옳지 좋다. 태도가 마음에 드는구나."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굉장히 흡족해하는 목소리였다.
"처음에는 그 누님 소리가 거슬렸는데, 듣다 보니 듣기 좋구나. 좋아, 거래는 간단하다."
갑자기 눈앞에 화르륵하며 불길이 일더니 종이와 펜이 생겨났다.
나는 종이를 집어 들고 위에 써져 있는 글씨를 읽었다.
"계약서...?"
"그래. 천천히 읽어보거라. 다 너에게 좋은 계약이다."
원래 저렇게 말할수록 더욱 조심해야 한다.
나는 계약서를 차근차근 읽어보았다.
갑은 을에 어쩌구 저쩌구···
하아. 세 줄 요약 없나?
"혹시 제 영혼을 바쳐야 한다거나..."
"하하. 네 영혼은 공짜로 줘도 필요 없느니라."
말이 너무 심하네.
그래도 대충 훑어봤을 때, 소중한 걸 바쳐야 한다거나 그런 것은 없어 보였다.
나는 그냥 마지막 사인 부분에 펜을 들고 사인했다.
"자세히 안 읽어보아도 되겠느냐?"
"네. 뭐, 계약을 안 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선택지가 없고요."
"흠. 제대로 안 읽은 것 같으니 내가 다시 설명해주마."
목소리에서 뭔가 답답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한국인은 원래 계약서, 사용설명서 같은 거 잘 안 읽는다고요.
"먼저 내가 너한테 주는 것이다."
갑자기 몸에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온몸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어? 어떻게 된 거지?"
"너에게 새로운 스킬 세 가지를 주었다."
그녀의 말에 나는 바로 상태창을 꺼내어 새로 생긴 스킬을 읽어보았다.
대악마의 힘(passive)
신성 스킬에 악마의 힘이 깃든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엄청난 힘을 예감하게 했다.
"이건 대체..."
"악마족에게 신성계열 스킬을 쓰면 비록 체력을 회복시키는 스킬일지라도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건 알고 있느냐?"
그렇다. 힐러들이 사용하는 신성계열 스킬은 악마족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아군을 치료하는 힐조차도 악마족에게는 공격형 스킬로 바뀌었다.
'그래서 악마족을 상대하는 전투형 프리스트가 있을 정도지...'
신성계열 스킬은 악마족에게 엄청난 상성이었다.
대략 10배가 넘는 데미지를 입히니···
물론 전투형 프리스트는 악마족에게만 강하기에 특수한 게이트 말고는 수요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대악마의 힘이 있으면 정확히 반대가 되지.
악마족에게는 버프가 되고 악마족을 제외한 모두에게는 피해를 입히는 것이다."
그렇다는 얘기는 악마족에게만 피해를 입히던 힐러가 딜러까지 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완전 좋은데요? 그런데 그러면 사람한테 힐을 못 하지 않나요?"
"이 대악마의 힘의 소유자인 너 자신한테는 가능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는 불가능하지. 약간의 패널티라고 생각하도록."
이럴 수가. 그렇다면 더 이상 힐러로서 누군가를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가슴이 무거워졌다.
"껐다 켰다는 안 되는 건가요?"
"그건 불가능하고 단 한 번. 내 권능을 포기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되면 다시 내 권능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렇군요..."
뭐, 어차피 남을 치료해주는 힐러보다는 딜러가 되는 것이 훨씬 나으니까 나쁘지 않은 패널티였다.
나는 다른 스킬도 살펴보았다.
대악마의 거울
일정 시간 동안 대상의 스킬 하나를 쓸 수 있다.
쿨타임 : 한 달
"대상의 스킬 하나를 쓸 수 있다고?"
"그래. 이 스킬을 쓰면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어떤 스킬도 너가 사용할 수 있다.
단, 스킬의 쿨타임이 엄청나게 기니까 신중하게 사용하도록."
스킬의 쿨타임을 슬쩍 보니 한 달이라고 적혀있었다.
태어나서 본 모든 스킬 중 가장 긴 듯했다.
"으, 쿨타임이 너무 말도 안 되게 긴데."
"하지만 성능은 상당히 좋지."
맞는 말이다. 경우에 따라서 SSS랭크의 스킬까지도 사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이 스킬을 어떻게 활용할지 계획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목숨을 살려준 것도 감사한데 이런 스킬까지 주시다니..."
"하하. 이 정도는 내 힘에 비하면 별 거 아니다. 이제 마지막 스킬 설명을 읽어보도록."
롱기누스의 창
쓰러진 상태의 상대의 모든 능력치와 스킬을 흡수할 수 있다.
"능력치와 스킬을 흡수한다고...?"
이제는 더 놀라기도 힘들었다.
그녀가 준 스킬 세 가지는 모두 들어보지도 못한 강력한 스킬들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엄청난 스킬을 세 개나 갖게 된 것이다.
"말 그대로다. 상대의 모든 스탯, 스킬, 그 외에 모든 능력치를 너의 것으로 흡수할 수 있다. 그러면 상대는 헌터의 능력을 모두 잃고 그저 일반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니라."
설명을 들으니 굉장히 무서운 스킬이었다.
그저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한데, 모든 능력을 흡수하다니.
"이제 내가 준 권능을 가지고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해야 할 일이요?"
"그래. 너는 이곳에 왜 떨어졌느냐?"
강력한 스킬을 얻어서 얻은 기쁨도 잠시, 나를 배신한 공대원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특히 마지막에 나를 밀어버린 최광훈, 내 영웅의 얼굴마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분노로 손이 떨렸다.
"너에게 한 가지 임무를 주지.
너를 배신한 자들을 찾아가서 이 롱기누스의 창으로 모든 능력치를 흡수해라.
복수도 할 수 있고, 강해지기까지 하니 일석이조지."
"복수?"
"그래. 복수. 너 설마 너를 그 꼴로 만든 작자들을 그냥 냅둘 생각은 아니었겠지?"
복수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살면서 여러 고초를 받았지만 단 한 번도 복수를 꿈꾼 적은 없었다.
복수도 힘이 있어야 가능한 거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복수보다 보상금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먼저였다.
나는 뭐 항상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복수라..."
"네 원수들을 쓰러뜨리고 이 롱기누스의 창을 사용하면 끝이다.
물론 죽인 다음 써도 상관없고."
"죽인다라..."
그녀의 말에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복수하고 싶었다.
그녀가 준 이 스킬들 덕분에 나에게는 복수하기에는 충분한 힘이 생겼다.
내 안에서 분노와 복수심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복수하겠습니다."
"그래. 좋아. 그렇다면 너를 게이트 밖으로 내보내주마. 부디 행운을 빈다."
"잠깐, 누님 이름이라도..."
휘잉
순간 몸이 주위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나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집 앞이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혹시 꿈이라도 꿨나 싶어서 상태창을 다시 열어보았다.
하지만 나에게 있는 새로운 스킬들은 결코 꿈이 아니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엉엉.. 내 아가 불쌍해서 어떡해..."
그때, 집 안에서 엄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복수의 길, 그리고 최강의 힐러가 되는 길.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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