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상해보험 - 2

대한민국 금융의 중심, 여의도.
이곳은 게이트가 생기기 전과 다름없이 정장 차림의 사람들로 북적였다.
뿌연 담배 연기가 공기를 가득 메우고, 양복 입은 직장인들이 바쁘게 오갔다.
그때 내 시선을 사로잡는 건물 하나가 있었다.
시한 헌터 상해보험 본부.
웅장한 외관과 반짝이는 유리창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 건물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여기 온 이유는 환급금에 대한 컴플레인이지만...'
사실 내 진짜 목적은 김현재에 대한 복수였다.
물론 이곳에 온다고 해서 그를 바로 만날 순 없겠지만, 적어도 기회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정말로 고객센터로 가실 건가요?"
길을 알려주기 위해 같이 온 최 실장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진짜로 반대합니다.
이건 저를 위해서만이 아니에요.
이게 다 고객님을 위해서에요."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 보험금도 안 주면서."
"그건 제가 정한 게 아니라서요..."
최 실장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고객센터 가서 민원이 해결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정확히는 시한 길드가 생긴 뒤부터요."
"민원이 해결된 적이 없다고요?"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고객센터가 있는 거 아닌가요?"
최 실장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고객센터의 고객 응대가 그때부터 거칠어졌어요.
보험 약관에 대해 항의하러 온 헌터가 고객님 전에도 엄청 많았거든요.
아시다시피 헌터는 저희 같은 일반인들과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강하지 않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죠. D급 헌터라도 일반인의 수십 배는 강하니까요."
"그 이유로 시한 길드에서 CS 담당자를 파견하기 시작했어요. 최소 B랭크 이상으로요."
"네?"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B랭크 헌터가 고작 CS 담당자를 한다고요?"
"네, 시한 길드는 A, B랭크 헌터들이 많으니까요."
최 실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한 길드는 S랭크 헌터가 1, 2위 길드에 비해 적었지만, A, B랭크 헌터의 수는 압도적으로 많았다.
거대 자본을 바탕으로 헌터들을 모집한 시한 길드는 각종 게이트에 파견을 보내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하지만 보험회사의 CS 담당자로까지 파견을 보낼 줄은 몰랐다.
"말이 CS 담당자지, 일종의 보디가드예요."
최 실장이 덧붙였다.
"그냥 지금이라도 돌아가심이..."
"괜찮습니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내 대답에 최 실장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알겠습니다. 행운을 빌게요."
그가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고객센터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안내를 받아 고객센터의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우락부락하게 생긴 대머리 남자였다.
"아, 고객님. 무슨 일로 오셨나요?"
그의 앞에는 'CS 담당자 이현도'라고 적혀 있었다.
'완전 무섭게 생긴 CS 담당자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CS 담당자도 B급 전투 헌터는 될 것이다.
상황이 안 좋으면 이 남자와 전투를 벌여야 할지도 몰랐기에 잔뜩 긴장이 되었다.
"네, 환급금 문제로 왔습니다!"
나는 최대한 당당하게 말했다.
"아, 일단 앉으시죠. 성함하고 생년월일이?"
이현도는 인상을 찌푸린 채 마우스를 대충 드르륵 내렸다.
나는 기세에 눌리지 않기 위해 같이 인상을 썼다.
"최민혁입니다. 생년월일은···"
잠시 내 정보를 찾던 이현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입한 상품이 무배당 시한 상해 보험 헌터 사랑 맞으시죠?"
"네, 대충 그 긴 이름입니다."
"그런데 고객님, 이미 설명드린 걸로 나오는데요. 30년까지는 원금 회수가 안 되는 상품이라고 담당자가 말했다는데 아닌가요?"
"설명은 들었지만 납득하기는 어려워서요."
이현도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냥 가시죠? 오늘 좀 피곤해서."
"네? 그게 무슨..."
나는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약관상 문제도 없고 고객님이 서명도 다 하셨고요.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나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아니, 저는 가입할 때 설명 들은 게 전혀 없다니까요!"
순간 이현도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 선 이현도는 키가 2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구였다.
그의 눈에서 위협적인 기색이 느껴졌다.
"고객님, 자꾸 이러면 힘으로 쫓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말로 할 때 가세요.
듣자 하니 D급 힐러라고 들었는데 그냥 갈 길 가세요. 네?"
나는 기가 죽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D급은 아니고 C급이긴 한데."
"아씨, 나랑 장난해? 빨리 가라!"
이현도는 내 어깨를 밀치며 소리쳤다.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이거 정당방위 맞지?'
분명 대악마의 힘을 쓰면 힐도 공격 스킬이 된다고 했었다.
실전에서는 써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이번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뭘 째려봐? 그냥 나가라고~ 아니면 물리적으로 나가게 해줘?"
어차피 여기 온 순간 망설일 수 없었다.
나는 완드를 꺼내 이현도에게 내밀었다.
"하? 뭐야 힐러 주제에. 힐이라도 넣어줄라고?"
이현도는 비웃음을 띄웠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외쳤다.
"큐어!"
"하하, 진짜 힐을 해주네? 뭐 어쩌···"
이현도의 비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곧바로 고통에 울부짖느라 바빠졌기 때문이었다.
"악! 이게 뭐야! 으악!!"
갑작스러운 공격에 이현도는 막거나 피할 틈도 없이 무방비하게 당했다.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온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으악!!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대악마의 힘이 들어간 큐어는 상상 이상의 위력이었다.
이현도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땅바닥을 기어다녔다.
그의 비명 소리가 고객 센터 안을 가득 메웠다.
나는 차갑게 말했다.
"힘으로 어떻게 하려는 생각은 하지 말아요. 해지환급금 줄 거예요? 안 줄 거예요?"
"아니... 그건 내 영역 밖의 일이라..."
이현도는 고통 속에서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고객한테 아직 말이 짧네? 큐어!"
나는 다시 한 번 스킬을 사용했다.
"으악!"
이현도는 다시 바닥을 뒹굴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알았습니다! 제가 위에 담당자들한테 보고 한 번 올리겠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나는 이현도에게 겨누었던 완드를 거두었다.
이현도는 바닥에 쓰러진 채 아직 고통에 헐떡이고 있었다.
"좋은 결과 기대하고 있겠다. 그럼."
나는 문을 박차고 나가 재빨리 건물을 빠져나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공격한 것이다.
그것도 힐링 스킬로.
건물 밖에 나오자마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힐러로 전직하고 누군가와 싸우는 건 처음이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김현재가 접근하냐인데...'
사실 내가 이렇게 난리를 피워도 시한 길드는 길드원이 많은 대형 길드였기에 김현재와 다시 마주친다는 보장은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어찌 됐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계속 시한 길드와 악연을 만들어 간다면 김현재를 찾을 확률 또한 올라갈 것은 확실했다.
"안녕하세요?"
"악! 깜짝이야!"
내가 생각에 잠겨있을 때 어느 여자가 갑자기 불쑥 튀어나왔다.
나는 놀라서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아! 저는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실 당신을 아까부터 지켜보았거든요."
"저를요?"
하, 설마 헌팅인가?
이놈의 인기는 여전하구나.
비록 살면서 단 한 번도 번호 같은 걸 따인 적은 없었지만,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다.
나는 여자를 슬쩍 보았다.
하얀 피부와 긴 생머리를 한 여자는 꽤나 예뻤다.
나이는 내 또래처럼 보였다.
"실례지만 시한 헌터 상해보험 컴플레인하고 오신 거 맞으시죠?"
뭐지? 분위기가 헌팅은 아닌 듯했다.
"네? 아 네, 그런데요?"
"아, 제 소개가 늦었네요."
김이 새버린 나는 여자가 건넨 명함을 힘없이 받았다.
비정부 헌터 기구
대표 김시연
"비정부 헌터 기구요?"
"네! 들어본 적 있으세요?"
"태어나서 처음 듣는데요?"
눈을 반짝이던 김시연의 낯빛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그렇게 열심히 활동했는데 아직 인지도가 부족하네요."
김시연은 실망한 듯 한숨을 쉬었다.
뭐야. 대충 도를 믿으십니까? 그런건가?
역시 나한테 접근하는 이쁜 여자는 무조건 의심하고 봐야한다.
"네. 화이팅하시고요. 저는 가입 안 해요."
나는 빠르게 자리를 피하려 했다.
"잠시만요!"
뒤돌아 도망가려 하는 내 팔을 김시연이 붙잡았다.
"가입 권유가 아니라요. 저희가 당신을 도와드리려고요."
"저를요?"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사실 저희가 시한 길드를 조사하고 있거든요."
조사라.
김시연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좋은 기회였다.
사실 시한 헌터 상해보험과 부딪히긴 했어도 시한 길드에 있는 김현재와 만나리라는 보장이 없는 상황이었다.
같은 계열사이긴 해도 둘은 다른 회사니까.
만약 김시연이 가입한 비정부 뭐시기가 시한 길드를 조사하고 있다면 김현재에 대한 정보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물었다.
"그러면 저를 어떻게 도와주실 수 있죠?"
"혹시 무배당 시한 상해 보험 헌터 사랑 가입하신 거 맞으신가요?"
"이름은 못 외웠는데 대충 그 정도로 긴 이름이었어요."
"그 상품이 지금 문제가 많거든요. 보험금을 받지 못한 피해자와 뒤늦게 알고 해지했는데 환급금을 받지 못한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에요."
역시. 내가 이 보험에 가입할 때도 헌터 힐러 전문 양성 학원에서 연계하여 가입했었다.
아무리 사망률이 낮아졌다고 해도 사망 사고는 여전히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기에 헌터에게 사망 보험은 필수였고, 이 상품에 가입한 피해자도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저도 그 피해자 중 하나예요."
"저희가 피해자를 모으고 있어요. 다 같이 모여 사건도 공론화하고 보상도 받으려고요. 같이 참여해주세요. 꼭 도와드릴게요."
김시연의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사실 저도 시한 길드의 정보를 얻고 싶어서요."
"네, 저희가 아는 거라면 뭐든 알려드릴께요."
김시연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피해자들을 계속 모집할 계획이라서요. 저희가 먼저 연락드릴게요. 혹시 명함 있으세요?"
"그런 거 없는데요."
"그러면 전화번호 좀 주세요. 그러고 보니 성함도 안 여쭤봤네요."
김시연은 핸드폰을 꺼내 내가 부르는 번호와 이름을 입력했다.
어찌됐건 이것도 번호 따이는 게 아닌가?
그러면 이것도 헌팅이라면 헌팅이지. 하하.
나는 속으로 웃으며 생각했다.
"제가 피해 사례를 모집하는 대로 최대한 빨리 연락드릴게요.
아, 제가 듣기로는 고객센터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는데.. 혹시 맞으신 건가요?
이런 것도 다 피해로 기록해 놓아야 해서요."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태연한 척 대답했다.
"아, 저는 괜찮아요."
그 CS 담당자가 안 괜찮겠지. 뭐 나가기 전에 확인해 보니 좀만 지나면 회복될 것 같아 보였다.
그나저나 내가 깽판 쳐놓고 간 이상 그쪽도 분명 대응이 강화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실전 경험을 쌓아서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리고 케이힐 사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저예요.”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