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소녀
"아우~ 여기야! 여기!"
멀리서 김시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를 향해 걸어갔다.
"김시준 씨, 안녕하세요."
"하하! 편하게 형님이라고 부르라니까!"
김시준이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나는 김시준과 악수를 나눈 뒤, 그의 뒤에 우뚝 솟은 시한길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유리창들이 햇빛을 반사하며 빛나고 있었다.
언제 봐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건물이었다.
"이곳에 다시 왔구나."
"나는 낮에는 처음이네. 하하."
시한 길드. 우리가 일주일 전 작전을 수행했던 그곳이다.
그 일주일 동안 시한 길드는 이렇다 할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대응할 방법이 없기 때문일 거라고 우리는 추측하고 있었다.
'김현재가 우리의 침입에 대해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거나.'
추궁이 두려운 김현재가 아예 상부에 보고를 안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어찌 됐든, 덕분에 NGH는 더 이상 아무런 방해 없이 덱스가 얻은 정보를 취합하고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시한 헌터 상해 보험은 독소조항을 개선하고 미지급한 보험료를 모두 지급하라!"
"그동안 시한 길드를 앞세워 고객을 기만한 것을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해라!"
시한 금융 앞에 수많은 피해자들이 피켓을 들고 시위를 시작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채 울려 퍼졌다.
시위자들 앞에는 기자 몇 명이 열심히 촬영을 하고 있었고, 또 다른 기자들은 개인 인터뷰를 진행 중이었다.
"CS 담당자에게 협박당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네... 제가 고객 지원센터에 갔더니... CS 담당자라는 헌터가 저를 협박했어요."
"저는 분명 약관을 제대로 설명 안 하고 보험금을 지급 못 받았습니다!"
기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인터뷰 내용을 받아적고 있었다.
여기저기 뉴튜버로 보이는 듯한 사람들도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상황을 중계하고 있었다.
"방금 언론에서 저희 NGH의 시한 길드 내부 자료를 발표했어요."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내 옆으로 김시연이 다가왔다.
그녀의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자료를 정리하느라 밤을 새운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면 시한 길드도 더 이상 모르쇠로 나올 수는 없겠죠.
무조건 입장 발표가 있을 거예요. 피해자 보상도 진행될 거고요."
"고생 많이 했겠네요."
"덕분이죠."
김시연이 피곤한 듯 하품을 했다.
"조금 쉬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하. 지금 제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김시연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에 잠시 장난기가 스쳤다.
"아직 쉴 수가 없어요. 어느 정도 마무리하면 저번에 못 했던 회식이나 어때요?"
"아. 네... 상황 봐서요."
회식이라···
김시준이 벌써 옆에서 아우, 아우 하면서 술을 먹일 것을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그의 주량을 따라가기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저기.. 대표님. 저쪽 한국헌터일보 기자가 인터뷰하자고 해서요."
"아. 네. 그럼. 민혁 씨. 잠시만요."
"네. 다녀오세요."
나는 멀어지는 김시연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 뉴스 댓글을 보았다.
- 나도 시한길드에서 보험금 지급 거절당함
- 우리 사촌누나도 피해자임. 생양아치 길드.
- 이제야 이게 논란이 된다. 예전부터 업계에 소문 돌더만.
- 고객센터에 헌터를 파견시킨다고? 고객이 몬스터인가?
- 제정신이 아니구만. 금감위는 뭐하냐?
- 아~ ㅅㅅ하고 싶다~
댓글에도 자신이 당했다는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반응이 좋구나. 나도 댓글이나 달까?'
나도 열심히 핸드폰으로 뉴스에 댓글을 달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왔다.
"시위하러 온 거야?"
눈을 들어보니 이혜원이 서 있었다.
그녀 역시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일주일 동안 그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손에는 커다란 에너지 드링크 캔이 들려 있었다.
"그렇지. 약속했으니까."
"이번 일은 네가 없었으면 성공하지 못했을 거야."
"그래?"
이혜원이 에너지 드링크를 들이켰다.
잠시 우리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설마 할 말 끝난 건가?
고맙다라거나 그런 말 하려고 얘기 꺼낸 게 아니었어?
"다음에 우리 도움 필요하면 말해. 나는 빚지고는 못 살거든."
"그래. 알았어."
아무래도 이혜원은 표현을 잘 못하는 것 같으니 마음씨 넓은 내가 이해해줘야지.
휘이익
세찬 바람이 불었다.
순간 바람 너머로 뭔가의 기운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느낌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갑작스러운 기운에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이질적인 것을 발견했다.
고딕한 드레스를 입은 은발의 소녀.
그 소녀가 나에게 미소 지었다.
'누구지?'
소녀는 따라오라는 듯이 손짓하고는 사람이 적은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소녀에게서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저... 나 이제 가볼게. 갑자기 일이 생겨서."
"응? 응. 그래."
당황한 듯한 이혜원을 뒤로하고 나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소녀를 따라 도착한 곳은 인적이 드문 골목이었다.
소녀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여기로 왔는데..."
"왁!"
그때 바로 뒤에서 소녀가 소리쳤다.
깜짝 놀란 나는 비명을 질렀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하하하! 오랜만이구나 필멸자여! 첫 번째 복수를 성공한 걸 축하하네."
소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장난기와 함께 무언가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이 숨어 있었다.
"필멸자? 잠깐 이 목소리는?"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공대원들에게 배신당하고 지옥 같은 구렁이로 떨어진 그날.
나를 구해준 바로 그 목소리였다.
그나저나.
"뭐야. 누님. 게이트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거였어요?"
"그래. 다 네 덕분이지."
"제 덕분이라고요?"
"길거리에서 서서 얘기하기 뭐 하니 카페라도 가도록 하지."
소녀는 신이 난 듯 근처 카페로 살랑살랑 걸어갔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나는 걱정하면서도 소녀의 뒤를 따라갔다.
인근에 있는 카페에 들어간 소녀는 까치발을 들고 위에 있는 메뉴판을 한참 살펴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평범한 소녀 같아 보였지만, 그 눈빛만은 수천 년을 살아온 듯한 깊이가 있었다.
"나는 아이스 초코라떼에 2샷 추가하고 초코 드리즐 추가, 그리고 에스프레소 휘핑크림을 많이 올리도록 하거라."
"...뭔가 주문이 상당히 구체적이시네요."
"자네는 뭘 마실 건가?"
"오. 사주시는 건가요?"
내 말에 소녀가 눈을 치켜떴다.
"필멸자여. 무슨 소리인가? 내가 돈이 어디 있다고. 나는 여태 쭉 게이트 안에만 있었다네!"
"...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주문하고 오게. 내가 자리를 맡도록 하지."
하. 이게 무슨 상황이람.
나는 일단 주문을 하고 자리에 앉아있는 소녀를 힐끔 보았다.
소녀는 자리에 앉아 다리를 까딱거리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게이트에서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면 그냥 옷차림이 이상한 건방진 외국인 꼬마로밖에 안 보였을 것이다.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앗. 네."
나는 음료를 받아들고 자리로 갔다.
소녀가 나를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왔느냐."
"네..."
"좋아. 얼른 음료를 내놓거라."
소녀는 내가 들고 있는 2샷 추가한 아이스 초코라떼를 휙 채가더니 휘핑크림부터 먹기 시작했다.
나는 어이없어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저기... 일단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뭐?"
"그게... 아직 성함을 몰라서요. 계속 누님이라고 불러도 될련지..."
내 말에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 그걸 이제야 물어보다니. 진짜 건방지고 매너가 없는 필멸자로군. 내가 사람을 잘못 골랐어. 그때 그냥 거미떼 먹이로냅뒀어야 했는데."
"아니. 그때 정신이 없었어가지고..."
거미떼 먹이라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 이름은 루치페르. 대악마 루치페르다."
"루치페르라면..."
루치페르라.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게이트에서 일반적인 몬스터와는 달리 네임드 몬스터만 고유의 이름이 있었다.
하지만 그중 악마족은 특이하게도 모두 고유의 이름이 존재했다.
루치페르···
그 이름에서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일단 누님이라고 하지 말고 말을 낮추도록. 이름도 줄여서 루치라고 부르거라. 자네가 나한테 자꾸 존칭을 쓰니 주위에서 수상한 눈초리로 보는구나."
"앗..네..."
사실 수상한 눈초리는 루치페르의 이상한 고딕풍 옷과 화려한 외모 때문인 것 같기는 하다.
그녀의 은발이 카페의 조명 아래서 반짝거렸다.
"어허. 반말로 하래도. 내가 외형은 이리 어려보이니 어쩔 수 없지."
"정말 그래도 괜찮아요?"
"어허."
"정말 그래도 괜찮아?"
"괜찮다. 우리같이 영겁의 시간을 살아온 자들은 너희가 존칭을 하든 멸칭을 하든 신경조차 안 쓰이니."
"어 그래."
방금 내 대답에 루치페르가 움찔한 듯했다.
혹시 막상 들으니 기분 나쁜 건가?
정말 신경 안 쓰이는 거 맞겠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여기는 어떻게 온 거야?"
"그야 자네와 나는 힘이 연결되어 있으니까. 자네가 복수에 성공하고 강해질수록 내 힘도 강해지니. 게이트에 갇혀있다가 드디어 나올 수 있게 된 거네."
내가 뭔가 해서는 안 될 일은 한 걸까?
대악마를 서울 한복판에 돌아다니게 하다니.
이거 나 뭔가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데. 죄책감이 밀려왔다.
"하아. 걱정 말게."
내 낯빛이 어두워진 것을 본 루치페르가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녀의 눈빛에 잠시 장난기가 스쳤다.
"나는 이 세계의 멸망을 절대 바라지 않으니. 그냥 여흥 정도로만 생각하게."
"정말이지?"
"일단은."
"일단은?"
더욱 불안해졌다.
"그나저나 자네에게는 놀랐다. 나는 그냥 단순히 롱기누스의 창만 사용할 줄 알았는데, 직장에서 입지까지 없애서 사회적 죽음까지 맞이하게 하다니. 진짜 악마 같은 놈이로군."
"아니. 그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오호. 의도하지도 않고도 그런 성과를 내다니. 더욱 놀랍구나. 역시 내가 사람을 잘 선택했어."
루치페르는 기분 좋은 듯 발을 다시 까딱거렸다.
뭔가 나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래서 왜 나온 거야?"
"응?"
루치페르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일단 이 소녀 같은 외형부터 해서 나를 살려준 이유.
그리고 루치페르의 진짜 목적.
게이트에서 나온 이유 등.
질문들이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우웅우웅
그때 마침 전화가 왔다.
나는 전화에 손을 대지 못하고 루치페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서 살짝 짜증난 기색이 보였다.
"전화나 받거라."
루치페르의 말에 나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
시한 길드 회의실.
긴장감이 감도는 공간에 여러 이사들이 앉아있고, 그들 앞에 김현재가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그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자네.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아?"
회색 정장을 입은 이사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죄송합니다." 김현재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정장치마를 입고 올린 머리를 한 여자가 서류를 들고 다가왔다.
"이사님. 여기 피해 예상 금액입니다."
이사들은 서류를 받아들고 인상을 찌푸렸다.
"약관 수정 시, 지급해야 할 보험금이랑 앞으로 지급할 수 있는 보험금까지..."
"으... 머리 아프구만."
머리 가운데가 벗겨진 다른 이사가 책상을 쾅 내리쳤다.
"이게 다! 자네 때문이지 않은가!"
"그래! 뭔 함정을 파니마니. 깜냥도 안 될 거면서."
"자네. 예전에 제출한 A랭크 승급 확인서는 진짜 맞는 거야?"
"그게..."
김현재의 목소리가 더욱 떨렸다.
"지금 당장 A랭크 버프 스킬 하나 써보게!"
김현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얼굴에 불안감이 역력했다.
분명 A랭크로 승급한 것은 사실이었다.
공대원 모두가 비밀을 숨기기로 한 그 게이트에서 김현재는 A랭크 헌터로 승급했다.
하지만...
김현재는 스킬을 사용해보려 했지만 어느 스킬조차 사용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는 직감적으로 자신의 힘이 모두 사라진 것을 느꼈다.
지금 추궁을 듣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헌터 생활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르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됐어! 이 일은 더 공론화할 수도 없고, 그냥 자네는 사직으로 책임지게."
"진짜 마음 같아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물게 하고 싶지만 운 좋은 줄 알게."
김현재는 몸을 부들거리며 인사를 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그의 뒷모습에서 절망감이 느껴졌다.
더 이상 시한 길드가 아니다.
더 이상 헌터가 아니다.
그동안 손에 들어온 것은 무엇 하나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싸워왔지만, 지금 그는 모든 것을 다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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