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태권문 -1
세계 최강국 미국.
천조국의 명성에 걸맞게 포스트게이트 시대에 재빠르게 전 세계 유망한 헌터들을 섭외하는 데 성공했다.
그 성공의 비결은 역시 자본이었다.
미국 제1위 길드 위플 역시 엄청난 자본을 바탕으로 빠르게 1위 길드로 성장할 수 있었다.
미국 1위는 곧 세계 1위를 의미했다.
그 길드의 마스터인 콜트 스틸은 이미 은퇴한 SSS랭크 헌터다.
50이 가까워지는 중년이지만, 그의 탄탄한 근육과 커다란 덩치는 충분한 위압감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은발에 가까운 머리카락 아래로 한쪽 눈에 낀 안대와 콧등 부분의 흉터로 그의 힘들었던 전투들을 상상할 수 있었다.
"늦는군..."
스틸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거의 다 되었습니다!"
담당 직원이 허둥지둥 대답했다.
스틸이 대한민국의 서울 시청에 와있는 이유는 위플의 한국지부 설립 때문이었다.
길드마스터가 직접 와야 하는 확인작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까지 오게 되었지만, 스틸은 딱히 불평하지는 않았다.
'이미 지부 설립을 거절하는 나라도 많으니.'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미 여러 유럽 나라와 중국에서 지부 설립을 거절당한 후였다.
복잡한 절차라도 지부 설립이 허가되는 한국은 그의 눈에는 그저 노다지로 보일 뿐이었다.
"어떻게 한 번에 랭크가 두 개나 오르죠?! 이제까지 이런 사례가 없었어요!"
그때, 그의 옆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김미연이라는 명찰을 찬 시청 직원이 놀란 표정으로 허둥대고 있었다.
'랭크가 올랐다고?'
스틸의 눈이 커졌다.
문득 그는 은퇴 전 마지막으로 갔던 게이트가 떠올랐다.
그때 스틸에게 들렸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왜? 랭크가 오르지 않을까?]
검은 빛이 일렁이는 보스룸.
그 곳에서의 전투에서 그를 제외한 공대원은 모두 전멸당했었다.
공대원들의 시신들 사이에서 그에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했다.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봤어? 랭크를 측정한 뒤로는 랭크가 오르지 않는 것에 대해]
"기계가 고장난 거 아니야?"
김미연 뒤로 머리가 벗겨진 아저씨가 소리친 목소리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남자의 명찰에는 주사라는 직책이 달려있었다.
"글쎄요. 랭크 측정기가 고장난 사례는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어요."
김미연이 불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C랭크가 한 번에 A랭크로 오른 사례도 없지. 다시 한 번 측정해봐."
주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의심하는 하는 것도 당연했다.
정말로 랭크가 오른 것일까?
스틸은 고개를 돌려 랭크 측정기 앞의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언뜻 보기에 그냥 평범해 보이는 한국인이었다.
"아. 귀찮은데."
남자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하. 선생님 딱 한 번만 더 측정해주세요. 이런 적은 처음이라서요."
김미연이 어색하게 웃으며 부탁했다.
"하아. 빨리 측정할게요."
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미 스틸뿐만 아니라 시청에 있는 모두의 이목이 남자에게 집중되었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남자는 다시 한 번 랭크 측정기에 손을 올렸다.
잠시 뒤, 랭크 측정기에는 선명하게 A랭크가 찍혀 있었다.
"맞죠? 빨리 랭크 재등록이나 해주세요."
남자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앗! 넵! 잠시만요!"
김미연은 허둥지둥하며 뭔가 작업을 시작하였다.
남자는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서 랭크 재등록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저 남자. 정체가 뭐지?’
스틸은 남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되었습니다. 스틸님. 여기 위플 한국지부 설립 허가증입니다.
마지막으로 서명이 필요한 게 있어서요."
바로 그 때, 담당 직원이 일어선 스틸에게 말했다.
스틸은 잠시 남자를 쳐다보더니 다시 자리에 앉고 짜증이 난 듯 서명을 휘갈겼다.
하나면 끝날 줄 알았던 서명이 두 개, 세 개... 다섯 개를 넘어갔다.
"몇 개나 더 서명을 해야 하죠?"
스틸이 인내심이 바닥난 목소리로 물었다.
"아! 이제 세 개만 더 하면 돼요!"
담당 시청 직원은 스틸의 심기가 불편한 걸 눈치 챈 듯 식은땀을 흘렸다.
"다... 다 되었습니다. 여기 갱신된 헌터 등록증이요."
스틸이 일곱번째 서명을 하고 있을 때, 김미연이 남자에게 등록증을 건넸다.
남자가 등록증을 받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당장 김예준한테 만나자 해야지."라고 중얼거리며 짐을 챙겨 시청 밖으로 나갔다.
털이 북실북실한 남자의 소환수 박쥐가 퍼덕거리며 그를 따라갔다.
"다 된 거죠?"
스틸이 물었다.
더 늦기 전에 저 남자를 붙잡아야 한다.
아직 남자의 걸음을 따라잡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네! 이제 다 되었습니다!"
스틸은 얼른 서류를 챙겨 남자의 뒤를 따라 시청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스틸을 기다리는 것은 수많은 기자였다.
"위플이 한국지부 설립한 이유가 뭔가요?"
"혹시 중국을 견제하려고 하기 위한 정치적 이유라는 게 사실인가요?"
"한국 지부 길드 마스터는 누구를 세울 생각이죠?"
"쓰리문의 입장 발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자들은 스틸의 앞을 막고 연신 플래시를 터뜨렸다.
스틸은 기자들 너머 남자를 찾아보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하지만 계속되는 플래시와 기자들의 카메라 때문에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Fuck!!"
스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기자들은 놀라며 연신 기사를 타이핑했다.
[이건 계약이다... 앞으로··· 대악마들이···]
그 날, 마지막 게이트에서의 목소리가 다시 생각났다.
그 목소리와 관련 있을 것 같은 남자를 눈앞에서 놓치고야 만 것이다.
스틸의 눈에 후회와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
"아니! 이게 왜 진짜야?! 너가 A랭크라고?"
김예준의 목소리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그의 눈이 크게 떠진 채 내 헌터 자격증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환상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김예준은 연신 내 헌터 자격증을 햇빛에 비추어보고 긁어보며 쌩 난리를 피웠다.
그의 손가락이 자격증 위를 미친 듯이 더듬었다.
"그래. 임마. 내기 물품은 준비했지? 분명 B랭크 장비였다?"
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김예준은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어느 장비를 줄지 고민했다.
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B랭크급의 C랭크 장비 안된다?”
“어휴. 내가 너냐? 그런 허접한 장비는 끼지도 않는다.”
이내 그는 자신이 착용하고 있던 아대를 벗어 주었다.
"이거 B랭크 짜리 장비이기는 한데 진짜 비싼 거다?
거의 A랭크 급 장비야!
준중형 차 한 대 값은 할걸?"
"크크 고맙다. 잘 쓸게."
나는 김예준에게 아대를 건네 받았다.
“어디 한 번 볼까?”
나는 아대에 아이템 감정 스킬을 써보았다.
미노타우로스의 근력 아대
착용자의 방어력을 대폭 상승시킨다.
장비 스킬: 천둥 울음
적의 기술 시전을 끊고 일시적으로 방어력을 감소시킨다.
아이템 감정을 마친 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이건 진짜 좋은 거잖아?'
그냥 농담인 줄 알았더니 이 정도 아이템이면 진짜로 A랭크급은 될지도 모른다.
장비 스킬이 있는 장비는 흔하지 않았다.
게다가 적의 기술 시전을 끊는 스킬은 마법 계열 몬스터를 상대할 때 굉장히 유용하다.
사실 이정도 장비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나는 살짝 부담을 느꼈다.
"와! 진짜 좋은데? 이거 진짜 나 줘도 돼?"
"괜찮아. 사실 나 더 좋은 장비 얻어서 어차피 팔려고 했어. A랭크 승급 축하 기념으로 가져."
김예준이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긴 이 녀석 정도면 이 정도 아이템은 껌값일지도 모른다.
나랑 버는 돈 단위가 다르겠지.
“그러면 사양않고 받지. 고맙다!”
나는 고마워하며 아대를 착용했다.
그 순간, 몸 전체에 힘이 솟구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진짜 좋다. 벌써 단단해진 느낌?"
내 목소리에 기쁨이 가득했다.
"크크. 아껴 써라. 마켓에 바로 팔지 말고."
김예준은 내 등을 탁 치며 말했다.
“절대 안팔아 임마. 얼른 가기나 하자.”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우리가 만난 이유는 그때의 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우리가 다녔던 도장에 가서 사범님께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나저나 사범님 진짜 오랜만이네 나도."
김예준이 말했다.
"야. 진짜 사범님이 나 죽이지는 않겠지?"
"죽이지는 않고 그냥 좀 두들겨 패겠지."
"그게 그거 아닌가?"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나는 도장을 그만두고 한 번도 간 적이 없었기에 더욱 긴장이 되었다.
사범님을 만나지 못한 이유는 역시 죄책감과 후회 때문이었다.
‘그만두지 말라는 사범님 말을 어기고 고작 C랭크 힐러나 되었으니.’
그 때를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덜고자 양손 가득 과일과 음료수를 들고 가고 있었다.
"아! 다 왔다! 나도 진짜 오랜만이네."
김예준의 목소리에 설렘이 묻어났다.
김예준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도장 앞에 도착했다.
도장은 옛날,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가슴이 떨렸다.
‘여기에 내가 다시 오다니···’
나는 도장 문을 두들겼다.
"사범님!! 김예준이랑 최민혁입니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뭐지? 아무도 없나?”
나는 조심스레 도장 문을 열었다.
"응?"
우리가 다녔던 "백두태권문"은 항상 수련생으로 북적였다.
오늘도 여느날 처럼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왜 아무도 없지?"
내 목소리가 텅 빈 도장에 메아리쳤다.
지나치게 썰렁한 도장.
도장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각종 무구들과 샌드백, 훈련에 필요한 장비들 또한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장은 그저 텅 비어있었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김예준도 달려와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도 당혹감이 가득했다.
“여기 아무도 없어요?? 사범님! 안 계시나요?”
김예준은 사람을 찾으러 여기저기를 뛰며 돌아다녔다.
나도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지나치게 조용했다.
“단체로 어디를 갔나?”
“아니. 그러기에는 아무 장비도 없고 너무 텅 비어있어.”
"그러고 보니 도장 간판이···"
우리는 "백두태권문" 간판이 걸려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도장 간판이 있어야 할 장소는 텅 비어있었다.
비어있는 벽 뒤로 날카로운 발톱 자국이 남아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우리의 목소리에 혼란이 가득했다.
우리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그때였다.
퍽!
한순간이었다.
누군가가 엄청나게 빠른 발차기로 내 복부를 가격했다.
번개같은 속도의 공격.
나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허억!"
나는 충격에 멀리 튕겨져 나갔다.
몸이 공중을 날아 벽에 부딪혔다.
기척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다.
“으.. 누구야..”
나는 고통을 참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흐릿한 시야로 나를 공격한 사람의 정체를 확인했다.
"이럴 수가...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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