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라의 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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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완결

신너
작품등록일 :
2024.10.02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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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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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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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5. 인형사 (5)

DUMMY




ep 05. 인형사 (5)



"오는데 힘들진 않았느냐? 다리 아프지는 않고? 땀을 뻘뻘 흘리는구나. 누가 괴롭히는건 아니냐? 내가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주마. 어서 말해보거라."


뭐야, 그 고기는?


오랜만에 만난 호랑이님은 입을 쉬지 않았고, 어느샌가 보폭을 맞추며 함께 걷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당시를 생각하면 상상조차 어려운 일.

발톱을 벼려 갈기갈기 찢으려는 여인과 자리에 주저앉아 차를 권한 젊은이.


소체의 중재가 아니었다면 여인은 지박령 혹은 악귀가 되어 불특정 다수에게 폐를 끼치고 있었을테고, 나는 이름모를 저승사자를 따라 저승으로 건너가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겠지.


그런데 호랑이님은 저승사자를 만나지 않았나?

그렇다면 여기에 있을 수 없을텐데.


"그 질문의 답은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산신군웅신장님."


감찰관님은 호랑이님과 이미 만났던 사이인듯, 처음 보자마자 작게 고개만 숙였을 뿐 별다른 통성명은 하지 않았다.

호랑이님 역시 마찬가지.


"전에도 길다고 했잖느냐, 그렇게 부르는거. 그냥 호랑이님이라고 부르거라."

"예와 격에 맞지 않습니다."

"내가 싫다고 하지 않느냐."

"그렇다고 하여 이미 세워진 격식을 무너뜨릴 순 없습니다."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너와는 한마디도 하기 싫구나."


흥, 하고 고개를 돌려버린 호랑이님.

감찰관님은 묵묵히 주장을 이어갔다.


"앞서 언급한대로, 신입. 여기 산신군웅신장님은 군웅신으로 승격되셨다."


군웅신.


전쟁의 승패를 주관하고 참전한 장수와 졸병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악한 귀신들로부터 지역의 주민들을 보호하고, 더 나아가 악귀를 물리쳐 주는 역할도 함께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보호신이자 수호신.


해당 지역과 연이 깊은 자가 특출난 공을 세우거나 유명세를 떨치면 생명이 끊어진 뒤 지역 주민들로부터 높게 받들여져 마치 신과 같이 우러러보는 대상이 되는게 단편적인 사례.

무력, 군과 관계있는 인물이 군웅신으로 추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 장군신으로 불린다고도 들었다.


소체와 처음 만났던 날.


접선으로 부탁하여 자리에 당도한 화덕벼락장군님.

우리 길을 밝혀 준 그 분은 어딘가에서 높은 공을 세운 장수였으리라.


호랑이님 역시 700년간 이곳 산에서 천지를 굽어 살폈으니, 공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악귀를 멸하고,

주민을 지키는 수호신이었으나.


시대가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변화하여,

사냥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말도 마라. 말 없는 놈을 따라 기껏 걷고 걸어, 배를 타고 도착했건만 다시 이승으로 가라고 하지 않터냐. 화가 나서 물어 죽여버릴뻔 하였느니라."

"...그래도 죽이면 안되죠."

"그래, 700년이나 봤는데, 조금 더 길어지면 어떠하리 싶어 나중엔 승낙했다. 그 군웅신인지 뭐신지 하는 걸."

"군웅신이라는 자리는 언제까지 하게 되나요? 그런 약속? 계약이 있었던가요?"

"사람들에게 잊혀질 때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신들이 그러하듯,

너희들의 머리, 지역 주민들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잊혀질 때까지.

그때까지 존재하느니라.


"인간들의 기록이나 문헌에 남을 공적을 세운 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리고 그러한 자리에 오르고 싶은 욕심도 없다. 부탁을 받아 군웅신으로 불렸을 때는 답답한 가면에 말도 할 수 없으니 어지간히 싫구나."


그러고보니,

소체가 염라대왕님께 받은 접선.

접었다 펼치는 부채의 일종.

군웅신을 다루는 부채.


부탁을 받고 자리에 현현한 군웅신들은 모두 나무로 된 탈을 쓰고 있었다.


나무로 된 탈 뒤에 숨어 있기 때문에,

표정을 읽을 수 없고, 어디를 보는 지 알 수 없었다.


턱이 없는 탈이라, 얼굴의 하관은 열려 있으나, 지금껏 입을 연 군웅신은 없었다.

때문에 대화도 불가능했으며, 굳게 닫힌 입꼬리는 아래를 향하여,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으로 간단한 의사표시만 가능했을 뿐.


옷차림은 시대를 반영하였으나, 나무 탈은 변함 없었다.

호랑이님도 군웅신으로 현현했을 때 지금과 같은 검붉은 한복을 입고 계셨으니까.


"얼굴을 가리고 일체 말을 해선 안 된다는 제약이 있어서 말이지."

"그런 제약이 있었나요?"


여기서 감찰관님이 끼어들었다.


"누가 왔는지, 이 자리에 온 군웅신이 생전 누구인지. 부른 이로 하여금, 더불어 이를 목격한 이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도록 한 조치입니다. 수많은 사고 사례 덕분에 만들어진 규칙이고 계약이지요."

"어떤 의도인지는 알 것 같네요."

"알 것 같은게 아니라 알아야 합니다. 확실히 이해해야 합니다. 피로 만들어진 계약이니까요."


피고 만든 계약.


염라대왕의 부탁을 받고 이승에 현현한 군웅신이,

부정부패를 일삼아 가문을 넘어 저승의 심기까지 건드린 후손들을 쓸어버리는 그런 내용일까?


쓸어 버리는 조상과 쓸려 나가는 후손은 각각 어떤 기분일까.


저승에서 서로 만난다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까.


만나지 않더라도,

마음이 무겁게 짓눌리는 건 변함 없겠지.


나무로 만든 탈.

그리고 입을 봉한 계약은 어쩌면 염라대왕님이 고안한 안타깝고도 섬세한 배려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나는 좋구나."

"뭐가요?"

"계약 기간 말이다."

"그 계약 기간이라는거 말인데, 호랑이님은 빨리 잊혀지는게 좋아?"

"길게 있어봤자 뭐가 좋겠느냐.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다. 그래도 너는 나를 기억하고 있으니 너 죽을 때 군웅신 자리도 함께 내려 놓고, 저승길 같이 걸으며 말동무 정도는 되어 주마."

"묘하게 기쁘기도 하고, 안 기쁘기도 하네."


저승길을 함께 걸어주다니...

일단 시끌벅적할 것만 같아서 심심하지는 않겠지.


호랑이님이라면, 저승사자도 주눅들어 일찌감치 뒷쪽에 멀리 떨어져 걷고 있을게 분명하다.

목청을 높여 '내가 한번 와봐서 아니까 길안내는 나한테 맡기려무나!' 하면서.


이런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랑이님은 금새 다가와 팔짱을 꼈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만난 것치고는 분위기가 안 사는구나. 어디 멀대처럼 키만 큰 고지식쟁이가 있어서 그런건 아닌가 걱정이로다."


끄응, 하고.

감찰관님의 안경 뒤에 있는 눈썹 사이가 깊게 찌그러졌다.


"서두르도록 하지요. 곧 어두워집니다."

"어두워지면 안 좋은가?"

"이런 저런, 낮에는 쉽게 보지 못했던 해로운 것들이 나타나기 쉬워지지요."

"이매망량인가?"

"인간의 악의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특히나."


감찰관님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게으른 신이 관리하는 산이라면 더욱더 조심해야지요."

"네놈, 말에 뼈가 있구나."

"누구 말마따나, 고지식해서 말이지요. 사실만 말했을 뿐입니다. 정말이지 돌려 말하는 건 어렵군요."


으르렁.


키가 큰 감찰관님이 내려다보며 이빨을 드러내 으르렁.

키가 작은 호랑이님이 올려다보며 이빨을 드러내 으르렁.


내가 봤을 때 여기 산에서 조심해야 할 2가지를 꼽으라면 높은 확율로 여기 2명이 선택되지 않을까 싶은데.

나는 으르렁 2명의 사이에 끼여, 산을 올랐다.


"헌데... 너희들은 도대체 뭘 찾고 있느냐?"


제법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싶을 때 호랑이님이 질문했다.


아직 말을 안 했구나.


그런데도 호랑이님은 잘도 우릴 쫓아왔네.


"사냥꾼들이 여기서 봤다고 하더라구요. 총알을 맞고 쓰러졌는데, 멀쩡하게 다시 일어나 도망친 사람이 있다고."

"그래? 그다지 별난 일은 아니구나. 사냥터다 보니 총알이 날아다니거나 사냥감들이 주구장창 튀어나오는 건 여기서는 흔한 일인데... 굳이 그걸 확인하러 왔느냐? 부지런도 하구나."

"사냥터라서 그런가봐요?"

"그렇지."

"하지만 다시 멀쩡하게 일어났다니까요?"

"그것도 흔하구나."

"흔한 일이에요? 어째서?"

"저기 조금만 더 깊은 곳으로 가면 몇몇 돌아다니고 있느니라.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근처에 지나가다 발견했지. 총을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는 관심 없으나 낮이든 밤이든 자주 쓰러졌다가 어느샌가 다시 일어나서 걸어다니더구나. 아마 멀쩡하겠지."

"세상에나."


제대로 본 건 아니지만,

나와 감찰관님은 분명 똑같은 표정이었을 거다.


"왜 그걸 처음부터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융통성이라고는 약에도 못 쓰는 고지식한 네놈이 안 물어보지 않았느냐."


나도 재차 물었다.


"호랑이님은 이상하다고 생각 안 했어요?"

"귀신 들린 물건이라면 내가 물어서 찢었겠다만, 그런 낌새는 없었다. 생각해보거라. 철로 된 마차가 달리고, 밤을 물러가게 하는 전기가 들어오는 시대가 아니더냐. 또 망할 인간놈들이 해괴망측한 짓을 하고 있구나, 생각해서 관심 조차 주지 않았다."

"그 해괴망측한 것을 봤다는 곳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감찰관님의 요청에 호랑이님의 입이 삐뚤어졌다.


"어디의 게으른 신은 귀찮고도 귀찮아서 봤던 그곳을 잊어먹었다."


삐졌네... 호랑이님.


"호랑이님, 나도 부탁할게. 꼭 확인해봐야 할게 있어서 그래요."

"그래? 그러면 어서 가자꾸나. 곧 날이 저문다."


호랑이님이 팔짱을 풀고 앞장서자,

감찰관님의 안경 뒤에 있는 눈썹 사이가 다시금 깊게 찌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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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ep 08. 이름 없는 이들 (6) -시즌1 종료- 24.11.23 11 0 12쪽
55 ep 08. 이름 없는 이들 (5) 24.11.22 8 0 10쪽
54 ep 08. 이름 없는 이들 (4) 24.11.21 9 0 9쪽
53 ep 08. 이름 없는 이들 (3) 24.11.20 13 0 10쪽
52 ep 08. 이름 없는 이들 (2) 24.11.19 10 0 11쪽
51 ep 08. 이름 없는 이들 (1) 24.11.18 12 0 10쪽
50 ep 07. 꼬리 아홉개 (7) 24.11.17 12 0 10쪽
49 ep 07. 꼬리 아홉개 (6) 24.11.16 12 0 10쪽
48 ep 07. 꼬리 아홉개 (5) 24.11.15 12 0 10쪽
47 ep 07. 꼬리 아홉개 (4) 24.11.14 14 0 10쪽
46 ep 07. 꼬리 아홉개 (3) 24.11.13 15 0 11쪽
45 ep 07. 꼬리 아홉개 (2) 24.11.12 16 0 9쪽
44 ep 07. 꼬리 아홉개 (1) 24.11.11 17 0 10쪽
43 ep 06. 풀 밟는 남자 (9) 24.11.10 19 0 11쪽
42 ep 06. 풀 밟는 남자 (8) 24.11.09 17 0 10쪽
41 ep 06. 풀 밟는 남자 (7) 24.11.08 16 0 10쪽
40 ep 06. 풀 밟는 남자 (6) 24.11.07 17 0 10쪽
39 ep 06. 풀 밟는 남자 (5) 24.11.06 19 0 10쪽
38 ep 06. 풀 밟는 남자 (4) 24.11.05 17 0 10쪽
37 ep 06. 풀 밟는 남자 (3) 24.11.04 16 0 10쪽
36 ep 06. 풀 밟는 남자 (2) 24.11.03 17 0 10쪽
35 ep 06. 풀 밟는 남자 (1) 24.11.02 20 0 10쪽
34 ep 05. 인형사 (9) 24.11.01 20 0 11쪽
33 ep 05. 인형사 (8) 24.10.31 22 0 11쪽
32 ep 05. 인형사 (7) 24.10.30 23 0 11쪽
31 ep 05. 인형사 (6) 24.10.29 22 0 10쪽
» ep 05. 인형사 (5) 24.10.28 27 0 9쪽
29 ep 05. 인형사 (4) 24.10.27 27 0 10쪽
28 ep 05. 인형사 (3) 24.10.26 3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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