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5. 인형사 (9)

ep 05. 인형사 (9)
높고 낮은 언덕을 넘어 성당으로 돌아오니, 아슬아슬하게 아침밥을 얻어 먹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고된 밤이었다.
세수만 대충하고 빠르게 누워버리잔 생각에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세상에나.
창문으로 비치는 아침 햇살의 영향도 있었겠으나,
다소 과할 정도로 내부에 펼쳐진 나무로 만든 장의자, 단상들이 번쩍번쩍 빛을 내고 있었다.
사용한 기간이 기간이다 보니, 적어도 내가 여기에 오고 나서 한번도 교체한 기억이 없으니 최소 20년은 넘게 썼을 물품들.
새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이제와서 새것 수준을 바라는 것도 염치 없지만, 그럼에도 마치 지금껏 잘 관리해왔던 것처럼, 그러한 모습으로 포장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제대로 닦으면 이런 광택을 내는구나.
제대로 된 사람이 관리하면 이런 빛깔을 가지는구나.
나무는 참 신비하다.
아니, 이건 다루는 사람이 신비하다고 해야 하나?
루이스 수녀님의 딸, 신디 수녀님.
신디 누나와 나는 청소에 일가견이 없었기에 한번도, 단 한번도 성당을 이토록 정성들여 닦아본 기억이 없다.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청소에 일가견이 없다기 보다는 관심이 없다가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신디 누나와 나는 피가 이어지진 않았지만, 노력을 하는 만큼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동일했기에, 어차피 청소해봤자 더러워질거잖아? 란 논리도 서로 공감할 수 있었다.
노력해서 청소해봤자 다시 더러워질테니까, 적당히 어머니, 루이스 수녀님이 잔소리 하지 않을 수준까지만 쓸고, 닦자. 남매는 그렇게 마음먹었던 것이다.
물론, 그 깐깐한 루이스 수녀님이 우리의 어설픔 마음가짐과 허술한 동맹을 눈치채지 않았을 리 없었고, 어설프고 허술하면서 의도조차 불성실한 청소 상태를 마음에 들어했을 리 없었겠지만, 우리 남매가 기대했던 잔소리 듣지 않기란 목표는 대부분 달성되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단순히 '이런 꼴통들' 하면서 넘어가주신 루이스 수녀님의 넓고 깊은 사랑의 일면이겠지.
그 사랑이 모든 방면에서 변치 않기를 나와 신디 누나는 늘 빌고 빌었던 기억이 난다.
감찰관님도 말씀하지 않았던가. '오늘 하루도 무사히' 라고.
아무튼,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광채라고 하면 과장이 심하려나? 어쨋거나 그에 준하는 빛깔의 장의자를 멍하니 보고 있는 나의 솔직한 감상은 '우와' 나 '이야' 같은 감탄보다는 '이게 뭐야' 의 태어나서 처음 본 생물을 앞에 둔 놀람이었다.
순수하게 놀랐다.
이게 이런 광택이 난다고?
"오셨어요."
한손엔 걸레, 한손엔 작은 기름통을 든 시화가 인사했다.
"이거, 네가 한거야?"
나는 손가락으로 빛나는 물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소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시화.
"언제부터?"
"일어나자마자 할 일이 없어서 시작했어요. 나무에 바르는 기름은 전날에 소체님께 받아둔 걸 사용했구요."
여전히 목소리가 작구나.
열심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몇몇 단어는 들리지도 않겠는걸.
그렇게 된다면 상대방의 의도를 넘겨 짚으며 대화해야 한다. 차라리 귀를 더 기울이자.
"몇 시에 일어났어?"
"5시에 일어났습니다."
"...좀 더 편하게 있어도 되는데."
사용인이 아닌 가족으로 데려온 거니까.
내가 슬퍼지지 않도록 느긋하게 푹 쉬어줬으면 한다.
안 그러면 지화가 내 목을 조르기 위해 찾아 올거라고.
아, 지화를 다시 볼 수 있으니 그건 환영해야 할 일이려나?
"어땠나요?"
"말도 마."
어느새 다가온 소체에게 웃음을 지으며 나는 손사래 쳤다.
땀과 흙으로 흠뻑 젖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피얼룩이나 시체 썪는 냄새는 옷에 베이지 않았다.
오히려 산과 들을 뛰어다닌 짐승 냄새가 나는데, 이건 출처가 워낙에 명확하니...
한뼘 크기의 노란색 종이.
붉은색으로 휘갈겨 쓴 글씨.
산을 올라오며 봤던, 나무 기둥의 사람 키 높이 부근에 붙어 있던 그 종이.
붙어 있던 종이들.
부적이라 부르기도 미묘하고 기묘한 종이 쪼가리가 순식간에 모두 타버린 그 자리에서,
감찰관님은 목각 인형을 감싼 두루마기를 옆구리에 끼고, 짧은 작별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떠났다.
"앞서 언급한대로..."
"?"
"빠르게 확인하고 싶은 물건이기에 먼저 염라청에 전달하고 오겠습니다."
목각 인형.
호리병.
남아있는 자료만이라도 염라청으로 가져가 분석하고 조사하기 위해.
바보같이 또 당하지 않기 위해.
선수를 칠 준비를 하기 위해.
급하게 돌아간다고 했다.
산 아래 입구까지는 호랑이님이 배웅.
팔짱을 낀 팔에 제법 힘이 들어가 있어 걷기 어려웠지만, 이번 건은 호랑이님이 적극적으로 힘내주었으니 이정도 배려는 해드려야 하지 않을까, 싶어 그대로 두었다.
그럼에도 '등에 태워줄까?' 라고 권했을 때는 맹렬히 거부했다.
곧 있으면 날이 밝을테고, 분명 누군가의 눈에 띄일텐데. 그러면 착호갑사가 또 움직이게 된다.
논밭에 있는 다 큰 소가 송아지로 보일 정도로 덩치가 큰 호랑이다.
무려 700년이나 살지 않았는가.
눈에 안 띄일 수가 없다.
물론, 내가 걱정하는건 호랑이님이 아니라 사냥감이 될 사냥꾼들이었지만.
"다음은 또 언제 오느냐?"
헤어짐이 아쉽다는 듯이,
산 아래가 보이기 시작하자 호랑이님은 계속 내게 말을 걸었다.
"호랑이님은 저승으로 가는거 아니었어?"
저승에서 이승으로 출퇴근? 이것도 좀 이상한가?
깔깔 거리며 웃음이 터져버린 호랑이님.
"말했잖느냐. 네 제삿상에 향 피울 때가 되면 간다고. 가는 길 외롭지 않게 말동무 해주마."
"아, 그거 이미 결정된 거였냐고..."
"결정이 아니고 확정이니라. 뭐, 당분간은 여러 산을 돌아다니며 생전 못 봤던 걸 구경 다닐련다. 내가 없어도 여기 인간들은 알아서 잘 살테니. 굳이 보살필 이유가 없구나."
산과 들의 주인을 몰아내고 몰아내어,
그러한 모습을 700년간 바라 봤던 호랑이님.
조용히,
끓는 물처럼.
"하! 섭섭한 마음이 없다고 한다면 필시 거짓말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흉한 네 놈을 만난 건 행운이니 적잖이 아쉬움을 달래고 있느니라.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말거라."
"음흉... 음, 기회가 될 때 또 만나러 올게."
"다음에 올 때는 그 날 먹었던 마실거리도 함께 가져오너라. 녹차라고 했느냐?"
향이 좋더구나, 하고.
호랑이님과 헤어졌다.
"멋지죠?"
소체는 지금도 빛을 발하는 용품들을 가리키며 내 반응을 기대했다.
"멋지다기 보다 솔직한 심정으론 놀랐다는 느낌? 관리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이렇게나 바뀔 수 있다는 걸 눈앞에서 직접 보는 기분인데."
"최고의 칭찬이네요. 그쵸?"
소체는 시화 뒤에 서서 양 어깨를 잡으며 기뻐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뒷통수에 얼굴을 비비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부끄러움에 살짝 붉어지는 볼.
"저도 놀랐답니다. 너무 맘에 들어서 저승에 있는 제 집으로 데려가고 싶을 정도로요."
"정정할게. 지금 네 말이 더 놀라워."
언젠간 가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자제해라! 염라대왕의 딸!
지화도 시화를 만나고 싶어 하겠지만 분명 지금은 아니야, 라고 얘기할거라고.
"저도 놀랐습니다."
연단 옆에 위치한 문을 열고, 감찰관님이 들어섰다.
안경 뒤로 보이는 피로한 눈을 제외하곤 처음 만났을 당시와 동일한 모습.
옆구리에 끼고 있었던 목각 인형은,
이제 없다.
"멋지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집 주인이 아닌 사람의 칭찬이라 무색하겠지만, 청결에 온 힘을 다하는 사람 중 나쁜 사람은 없지요."
"감찰관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소체님. 그러려고 제가 온 것이니까요."
소체의 칭찬에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는 감찰관님.
역시 위아래가 확실한 사람이다.
"잘 진행되고 있나요?"
나의 물음과 동시에 바닥을 내리 꽂는 한숨.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제가 이승에 온 세번째 목적과 산에서 수집한 자료가 일치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얻어 걸렸다는 느낌도 없잖아 있군요. 여러모로 참 불편한 밤이었습니다."
첫번째는 지화의 일을 시화에게 전하는 것.
두번째는 반쪽짜리 저승사자인 나를 교육하는 것.
세번째는...
지옥에 있는 죽은 이들의 숫자와 명부 원본의 숫자가 맞지 않아,
이를 확인하는 것.
"현 상황에서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으며, 아직도 현재진행이라는 점이 문제. 하지만 제가 여기에 다시 온 이유는 앞서 언급한 목적과 별개로 염라대왕님의 말씀 2가지를 전하기 위해서 입니다. 제가 온 목적보다 1가지 적으니 그나마 마음의 부담은 적군요."
"2가지?"
"우선 소체님. 이승으로 간 저승사자들이 소체님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부분은 널리 양해 해주십시오. 염라대왕님의 엄명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하는 그들의 처지를 조금이나마 헤아려주셨으면 합니다."
"아버님은 별말씀 없으셨나요?"
소체의 물음에 감찰관님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이 역시 제가 입에 올릴 수 없는 물음입니다. 죄송하게도..."
"아닙니다. 지금은 기다릴 수 밖에 없겠네요."
소체와의 문답이 끝나자 바로 고개를 들어 뻗뻗한 자세로 나를 내려다 보았다.
역시 위아래가 확실하군!
"그리고 신입. 염라대왕님께서 특별히, 직접, 말씀을 전하셨으니 바른 자세로 똑바로 듣도록."
"...네."
명부 대신 들고 온 두루마기를 펼치는 감찰관님.
이런 격식을 차린 자리는 불편한데...
괜시리 긴장된다.
"저승사자로 정식 임명하는 일은 우선 보류. 이승의 인간이기에 위험부담이 크니 결정을 뒤로 미루고 지켜 보겠다."
"...말이 보류지 감시로군요."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신입, 자네의 선택이나, 염라대왕님께서 직접 하달하신 말씀이니 염라청의 태도는 변하지 않겠지. 허나, 좋은 소식도 있다."
분명,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긴장의 끝에 도달한 내가 거칠게 침 삼키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반푼짜리 저승사자이기는 하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발생한 사고임을 널리 고려하여, 그대의 예와 격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지금부터 걸치는 모든 옷이 저승사자의 두루마기와 같이 검게 물드는 보살핌을 내려 주도록 하겠다."
"엌!"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일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ep 05. 인형사, 끝.
- 작가의말
매일 오후 8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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