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6. 풀 밟는 남자 (2)

ep 06. 풀 밟는 남자 (2)
"이것도 미달, 이것도 미달, 미달, 미달, 수준 미달."
이런 수준이라면 점검의 의미가 없다.
준비를 했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결국 나는 들었던 붓을 놓았다.
간의 천막.
임시로 설치한 의자에 앉아, 오전 내내 둘러 보았던 손님 맞이 준비 상황에 대한 점검표를 훑어 보았으나, 결과는 처참하다.
어찌 이토록 초짜들만 모아 두었나.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점검표들이 징그럽고 증오스럽기까지 하다.
초병들 조차 내 물음에 올바른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 무슨 추태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근무를 서고 있단 말인가.
규정 조차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는 녀석들에게 지금껏 이곳의 방위를 맡기고 있었단 이야기가 아닌가.
통탄스럽다.
"어이, 대부."
곰 같은 사내가 천막으로 들어와 내게 뭐라 얘기했지만 지금은 들리지 않는다.
"여기만 엄청 덥네. 나는 누가 불이라도 피웠나 싶었지."
"누구 때문이냐."
찬 놈은 양 손에 든 물병 중 하나를 내 볼에 갖다 댔다.
"열 좀 식혀. 옆에 있는 노점상에서 얻어 왔지."
"너는 어찌 이리 천하태평이냐. 봐라, 이 엉망진창인 점검표를."
앞으로 던진 점검표를 보는 듯, 마는 듯.
"너무 뜨거워서 이 천막 주변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없더라. 고작 그런 일로 너무 머리 쓰지 마. 머리카락 다 빠지겠다."
"네 놈이 책임자 아니더냐!"
결국 소리질러 버렸다.
찬 놈이랑 같이 있으면 늘 그랬다.
언제나 내가 소리 지르고, 찬 놈은 허허 웃는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다.
"이렇게나 엉망인데 내일 손님을 어떻게 받는단 말이냐!"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든 되겠지. 게다가 날도 무덥잖아. 처음 참가하는 녀석들도 많고, 너 같이 높은 사람이 갑작스럽게 질문하면 긴장해서 아는 내용도 제대로 대답 못하고 입이 턱 하고 막히는 경우도 있겠지."
"나는 그런적 없다."
찬 놈이 책상 위에 올려둔 물병을 빤히 째려 보았다.
긴장해서 대답을 제대로 못 한다니, 말이 되는가?
긴장하면 적들이 기다려 주기라도 한단 말이더냐.
무의식 중에라도 대답이 튀어나올 수 있도록 준비했었어야 되는거 아닌가.
이 모든게 관심이 부족해서 그렇다.
관심이 없으니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이렇게 엉망진창이지 않은가.
"그런적 없으니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 않았겠습니까요, 권 대부님."
"비꼬는거냐."
내 오른쪽 어깨에 두꺼운 손을 올리는 찬 놈.
"비꼬는게 아니야. 너는 늘 그랬지. 합동 군사 훈련 때도... 체력은 보잘 것 없으면서 부라리는 눈은 장군이라, 너보다 덩치 큰 녀석들도 다들 포기했던 마지막 훈련도 완주했잖냐."
"마지막에 네 놈이 멱살잡고 바닥에 끌면서 들어오지 않았느냐. 평생 먹을 진흙을 그때 다 먹었다."
"나는 끈기있는 놈이 좋거든. 주변 녀석들은 다들 너무 쉽게 쉽게 포기해. 해보고 안되면 포기하는게 아니라 해보기도 전에 포기해버려. 옆에서 보기만 하고 안되겠다 싶으니 줄행랑이라니... 몸이 아픈게 아니라 머리가 아픈 걸 테지. 근데 너는 눈에 귀신이 살고 있더라고. 그것도 악에 받친 귀신이."
"사람을 귀신에 비유하다니 꽤나 몹쓸 표현 아니냐."
작은 항의에 곰은 낄낄 웃어 넘겼다.
"아니, 생각해보라고. 문관, 무관 훈련생 합동 군사 훈련 첫 날에 동기와 멱살잡고 싸우는 녀석이 어디 있냐고. 아, 지금 생각해봐도 웃겨 죽겠네."
"새치기는 사회악이다. 조직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행위다. 나는 그걸 가르쳐 줬을 뿐이다. 그런 녀석은 호되게 가르쳐주지 않으면 분명 나중에도 똑같은 짓을 반복하겠지. 굳이 밥만 그럴까? 중간에 끼어들어 타인의 성과를 가로채거나 남이 진행하고 있는 일에 개인의 편의를 우선하여 방해하기도 하겠지. 분명 그러고도 남을 짓이다."
"보통은 서로서로 눈치보며 그러려니 한다고. 아직 친해지지도 않았을 시기니까. 다짜고짜 소리부터 지르지는 않을 거라니깐. 이거 원, 너는 폭우가 쏟아져도 제시간에 출근하겠구만."
"응? 그렇게 하는게 당연한거 아닌가?"
"그래? 역시 너는 머리 아픈 녀석이다."
찬 놈은 반대편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작성한 점검표들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마침 천막으로 들어오는 부관.
"죄송합니다. 권 대부님."
"늘 첫인사가 죄송하다로 시작하는군. 자네가 죄송할 것이 뭐가 있나. 문제의 책임자는 내 앞에 있는데."
"말씀하신 병사들의 명단입니다."
부관이 들고온 서류 뭉치를 찬 놈이 중간에 낚아 채서 자기 품에 넣어 버렸다.
"이건 내가 처리하지."
"내놔라, 찬. 수준 미달인 자들을 추려낸 목록이다."
"수준 미달이라니, 말이 심하네. 더워서 잠깐 헷갈렸거나, 긴장해서 몸이 굳어 그런 거라니깐."
"그걸 관리하는게 네 놈의 역할 아니더냐."
"예이~ 예이~ 알아서 모십죠."
찬 놈은 부관을 보며 말했다.
"이번 건은 내가 처리할테니, 부관은 신경 안 써도 돼."
"알겠습니다, 찬 대장님."
"정말이지..."
나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책상 위의 물병을 빤히 째려 보았다.
오후가 그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은 듯 지나가고,
남은 업무를 처리하다보니 정규 근무 시간을 훌쩍 넘겨, 이미 관아에는 숙직을 담당하는 자 외엔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자기 전에 읽어 볼 문서들을 주섬주섬 챙겨, 어두운 복도를 따라 걸어 미리 준비된 마차에 올라 탔다.
"조금 천천히 가주게."
"예, 대부님."
마부에게 그리 일러놓고선 밤이 내려앉은 밖을 바라보며 익숙한 길을 달리던 도중 마차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무슨 일인가?"
멈춰버린 마차.
마부가 두손을 모으고 죄송스런 표정으로 다가왔다.
"송구하옵니다, 대부님. 방금 웅덩이에 빠져 오른쪽 바퀴가 상했습니다요. 고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해서..."
곤란한 눈망울로 마부는 말끝을 흐렸다.
"더는 움직이지 못하느냐?"
"축이 심하게 휘어, 무리했다가는 그대로 부서져 크게 다치시고 맙니다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급히 달려가 다른 마차를 수배해 오겠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초승달이 머리 위에 떠있다.
이미 한참 늦은 시각.
이 시간에 다른 사람을 깨워 새로운 마차를 준비 시키는 것도 무리다.
어찌 고친다고 하더라도 멍하니 이 자리에 서서 있는 것도 괴롭다.
여기서 자택까지는 얼마되지 않는 거리니 천천히 걸어가도록 하자.
그게 옳다.
"많이 늦었으니, 자네는 이대로 복귀하여 마차 수리에 전념하게. 나는 걸어가도록 할테니."
"아닙니다요, 날이 어두워 큰일 나십니다요."
"내 걱정일랑 접어두고... 혹시 다른 이가 추궁하면 내가 그리 시켰다고 이르게나. 머리도 복잡하여 잠시 걷고 싶었으니 차라리 잘 됐네."
"그치만 대부님..."
나는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마부를 조용히 시켰다.
여러 말하기 귀찮으니 그냥 가라고.
마부는 내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걷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내 말을 돌려 삐걱이는 마차를 끌고 반대편으로 천천히 달려갔다.
그나저나 오늘은 밤 공기가 차구나.
덕분에 하늘의 별이 깨끗하게 보인다.
거리를 밝히던 전깃불도 늦은 시각이라 보이지 않는다.
나는 달빛인지 별빛인지 모를 것에 의지해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옮겼으나...
분명 지금이라면 다들 골아 떨어져 있을 시간이건만.
땅을 달리는 발자국 소리가 하나, 둘.
이내 내 앞을 가로막는 이가 하나, 둘.
두건으로 입을 가린 잡배들이 모두 다섯, 손에는 사이좋게 하나씩 짧고 긴 날붙이를 들고 있다.
"돈이 목적이더냐? 가진 것을 모두 줄테니 어서 길을 비키거라."
"옷차림을 보아하니 꽤 사시는 분 같은데, 고작 가진 것만 내놓으시려고 하시니 성에 차질 않는구만요."
짜증이나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걸로 만족한다면 더는 묻지 않으마. 없는 일로 해주겠다."
"그렇게 말씀하셨던 사람들 중에 옳게 집으로 가신 분이 있으신지요?"
어렵군.
숫자가 많다보니 이대로 도망쳐도 결과는 불보듯 뻔한 일.
차라리 시간을 버려서라도 마차가 고쳐지길 기다렸어야 했나.
"그분은 집에 옳게 가실테니, 네놈들 목이나 걱정하시지."
내 옆으로,
긴 머리를 깔끔하게 묶어 뒤로 내린 청년이 반다나를 쓰고 나타났다.
오른손엔 새하얀색의 손잡이를 가진 장검.
상의는 살짝 느슨한, 짙은 파란색의 본국 전통복을 입었는데, 소매를 길게 걷은 덕분에 손에서부터 팔꿈치까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치마처럼 보이는 넓고 검은 바지와 허리에만 묶은 황토색의 앞치마.
아, 앞치마?!
"나는 지키면서 싸우는 건 체질에 안 맞으니, 나리는 저기 뒤로 돌아서 어서 달아나슈."
"자네는 괜찮겠는가?"
"나리가 없으면 훨씬 괜찮겠수다."
자신을 칼잡이라고 한 사내의 말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돌아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쫓아오는 발소리는 없다.
아마도 그 사내가 잡아놓고 있으리라.
주고 받은 문답은 몇 마디 안 되지만 대단한 자신감이다. 깊이 감사한다.
앞치마를 입은 그 사내도 무사하길 진심으로 빌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숨이 턱까지 차오름을 느꼈음에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이것 저것 고를 것 없이 담장을 돌고 돌아 다급하게 달려 가던 도중,
빡!
하고 머리 뒤로 둔탁한 충격을 받은 나는,
그대로 흙냄새를 맡으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작가의말
매일 오후 8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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