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6. 풀 밟는 남자 (3)

ep 06. 풀 밟는 남자 (3)
사정없이 두들겨 맞은 듯, 팔다리 구분 없이 통증 없는 곳은 없었다.
능력에도 없는, 실력조차 한참 뒤떨어지는 달리기를 무작정 강행한 다리는 이제 감각도 없다.
운동 부족인가?
아니다.
운동 부족은 기존에 어느 정도, 매일은 아니더라도 적당히, 꾸준히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몸을 움직이는데 거부감이 없었던 이들이 다소 과한 운동으로 인해 다리나 팔이 뻐근하거나 의도했던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 평소보다 몸이 무거울 때 하는 말.
나에게는 기초 체력 부족이 맞는 말이다.
기초 체력이 없으니, 남들에겐 조금 과하게 움직인 활동량일지라도 내겐 숨쉬는 일조차 버거울만큼 치명적인 운동량이 된다.
문관, 무관 훈련생 합동 군사 훈련 같은 기초 군사 훈련도 낙오없이 통과 했건만, 이미 10여년도 넘게 지난 과거의 일.
하루종일 앉아서 업무를 보고, 마차를 타고 집과 관아를 오간다.
늘 과로에 시달리기에 여유있게 산책을 한다거나 소화를 목적으로 한숨 돌리는 그런 무책임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져본 기억도 없다.
집무실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해결하니 식당까지 걸어가는 일 역시 없다.
더불어 화장실 갈 시간도 부족하여 대부분 식사를 선택할 때 국물류는 제외하고, 나오더라도 거절한다.
워낙에 그래왔고, 지금껏 그래왔기 때문에 아랫사람들 선에서 이제는 눈치껏, 알아서 식단이 조정되어 내게 전달된다.
그래도 뭘 먹을건지 정도는 물어 봤으면 했지만... 뭐, 자업자득이다.
그렇게라도 시간을 만들어 일을 쳐내지 않으면 순식간에 쌓여버린 문서 다발로 책상 공간이 부족해져버리기 때문에.
10여년간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기초가 되는 체력이 빠져버리고 결국 모자라게 되는 건 순식간.
고로 체력 부족은 어쩔 수 없는 일.
기초 체력의 상한선이 평범한 남들 대비 한없이 낮은 곳에 위치해 있는 이유.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신력으로 어떻게든 헤쳐 왔으나...
눈을 가늘게 뜨니 세상이 옆으로 기울어져 보였다.
지나가며 보이는 나무들도, 머리 위로 보이는 마부의 뒷모습도... 모두 옆으로 기울어져 있다.
아,
단순히 내가 옆으로 누워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군.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모습으로 내팽겨쳐져 있었다.
위아래로 덜컹덜컹, 나무로 만든 딱딱한 바닥과 비나 눈을 가릴 천정이 없는 걸로 미뤄보아 수레에 실려있나 보다. 그것도 짐짝과도 같은 취급으로.
그나저나 수레라니... 어딘가로 실려 가는 중인가?
"하..."
웃음이 터져 나온다.
수레잖느냐...
수레니까 당연히 실려가는 거겠지.
게다가 움직이고 있다면 당연히 어딘가로 가는 중이겠지.
이것도 추리라고, 겨우 이것도 추론이라 내놓다니, 몸이 어지간히 아프지 않고서야 나올 법한 발상이 아니다.
머리의 흐름이 느리다.
이런건 통찰력도 뭣도 아니야. 꽤나 느려 터진 현실 직시지.
뭐가 수레며, 뭐가 이동 중이라는게냐.
어느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상황을 마치 나만이 알고 있단 듯이 으스대며 나름 분석한다는 우스운 꼴이 아니더냐.
나는 시시한 생각이 떠오른 덕분에 부끄러워져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이, 아저씨. 괜찮아?"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시선을 마부의 등에서 밑으로 내리니 옆으로 기울어지게 앉아 있는 청년이 보인다.
아니지,
내가 옆으로 누워 있으니 저 청년은 제대로 앉아있는 셈이군.
"이제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왔네. 갑자기 눈을 떴다 싶더니 이제는 실실 웃길래 정신 나간줄 알았어."
"정신이 나갈 정도로 정신없기는 하군.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걸로 봐서 몸도 성치않은 것 같은데... 나를 좀 일으켜 주겠나."
"보다시피 이쪽도 영 좋지 않아서."
청년은 몸을 돌려 뒤로 묶인 손을 내게 보여 주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동아줄이기는 하나, 이런 일에 문외한인 내가 보더라도 그리 단단하게 묶여있지는 않아 보였다.
뭐, 동아줄을 잘 다루는 자라거나 뭔가 묶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은 흔하게 봤지만, 사람을 전문적으로 묶는 이라고 한다면... 관아를 한정해서 얘기한다고 해도 2가지 정도 밖에 생각이 나질 않는다.
인신매매나 금품을 목적으로 하는 납치범 등과 같은 범죄자거나,
그런 이들을 붙잡는 포졸.
이 2가지가 그나마 사람을 전문적으로 묶는 이들이겠지.
정상적인 사상을 가진 자들이라는 범위 안에서.
그런데 범죄자를 그나마 정상적인 사상을 가진 이라 엮는 범주 자체가 말이 되나, 안되나는 몸이 아프니까 그냥 넘어가도록 하고.
하긴, 세상에는 취미 활동을 이유로 사람을 묶는 자들도 있다고들 하니... 정상적인 사상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관아의 포졸들이 내 얼굴과 차림새를 모를리 없다.
필연적으로 나를 짐 나부랭이처럼 취급하여 수레로 실어가는 이들은 범죄자임이 마땅하리라.
나는 납치 당한 것인가?
참으로... 세상 처연하게 빨리도 알아채는구나.
"으흐흐흨."
"아저씨 진짜 괜찮아?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직 한참을 같이 가야 할텐데 기분 나쁘니까."
"나는 대부다."
아직도 볼이 나무 바닥에 닿은 채로,
나는 청년을 보며 말했다.
"아저씨가 아니다. 대부다."
"그래? 아저씨가 대부면 나는 사무라이겠네."
사무라이? 아...
다시금 살펴보니 청년은 우리네 사람들이 입는 옷과는 다른 옷가지를 걸치고 있었다.
사무라이라고 한다면 본국? 그래, 본국이 맞을 것이다. 그곳에서 온 사람들과 같은 옷차림새다.
꽤나 낡고 더러웠으나 기억에 남아 있는 형태다.
"그런데 사무라이와 대부를 동일시 하는 건 나로서는 꽤나 가슴 아프구나."
"응? 비슷한거 아니야?"
"전혀 다르다."
전혀.
전혀!
"내가 있던 나라에서는 사무라이가 높은 계급이었거든."
"나는 무인도 아닐뿐더러, 대부는 무사보다 훨씬 높은 자리다."
"하핫! 아저씨는 진짜 높은 사람인가 보네. 그럼 아저씨는 높은 사람이니까 나를 여기서 구해줘."
대답이 궁했다.
허리를 바로 세울 힘조차 없는데, 누가 누구를 구한단 말인가.
게다가 여기가 어딘지 조차 모른다.
몇날 며칠인지도 까마득하다.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날은 밝으니,
마차가 고장나고,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고, 앞치마를 두른 칼잡이에게 도움을 받고... 솔직히 칼잡이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 뒤로 도망치다 뒷통수를 쎄게 맞은 날로부터 최소 하루는 지났겠지.
근데 앞치마라니...
특이한 취향을 가진 사내로군.
"오히려 반대다."
"뭐가?"
"네가 날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마."
"에이, 그게 뭐야."
청년은 시시하게 웃어버렸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훨씬 더 높은 사람이다. 여기서 허무하게 끝낼 수는 없지."
"사무라이보다 높아?"
"훨씬 높지."
"쇼군보다 더?"
"비슷하겠군."
호기심이 동한 청년.
이전까지와는 눈빛이 다르다.
"아저씨 진짜 높은 사람이구나."
"믿고 안 믿고는 너의 자유겠으나, 믿는 자에게 복이 있으리."
위세등등해져 보다 뽐내고 싶었으나,
옆으로 누워서 할 일은 아닌듯하여 금새 포기했다.
"그래서... 구해주면 뭘 줄건데?"
"반대로 묻지. 무엇이 갖고 싶으냐?"
손가락을 앞으로 내밀어 열 개, 모두 펴 보이고서는.
"이것보다 많이 줄 수 있어?"
"뭘 달라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말의 흐름으로 봐서는 돈이나 귀금속 종류겠지. 그보다 많이 주마. 손가락, 발가락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이."
"통이 크시네."
그런데?
응? 그런데?
청년의 손은 분명 뒤로... 동아줄에 묶여있지 않았었나?
손가락을 접은 청년은 그대로 일어서서 앞으로 걸어가,
오른쪽 팔을 접은 그대로 팔꿈치를 크게 휘둘러.
빡!
하고,
허리 힘으로 마부의 뒷통수를 세차게 갈겼다.
인간의 두개골도 단단한 축에 속하지만,
팔꿈치, 발꿈치의 뼈는 그보다 더 단단하다.
아무런 도구없이 머릿속에 든 뇌를 흔들기에 그만한 것이 없다.
무술쪽으론 문외한인 내가 보더라도 상당히 익숙한 솜씨.
한두 번 해본 실력이 아니다.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정교한 타격이라, 마부는 기절하기 전까지는 꽤나 고통이 있었겠으나 그것도 잠시 잠깐이라 느낄 정도로 순식간에, 정말로 순식간에 옆으로 쓰러져 소리 한 번 내지 못한 채 그대로 기절했다.
끽소리 한 번 내지 못했다.
멀리서 봤으면 볏단이 쓰러지는 모습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바닥이 울퉁불퉁 험하여 수레의 속도가 제대로 붙지 못한 덕분에, 그만한 충격이 있었음에도 마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내 신세도 처량했지만, 그럼에도 마부가 떨어지지 않아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험한 꼴을 보지 않아도 되서 다행이라 여겼다.
피는 별로 보고 싶지 않다.
주인이 기절하자 금새 발걸음을 멈춰버린 말,
그리고 수레.
행색은 남루하나 그에 반해 머리는 똑똑한 말이 아닌가.
적어도 지금의 나보다는 똑똑해 보였다.
최소한의 쓸모는 있어 보였으니까.
"제대로 맞았으니 한동안 못 일어날거야. 하지만 아저씨는 이제 일어나야지."
어깨를 잡고 거칠게 일으켜준 덕분에 나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몸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아저씨, 여기가 어디쯤인지 알겠어?"
집과 관아만 왕복했던 수많은 나날들. 어릴적 외곽으로 나가봤던 기억조차 까마득하다.
저건 나무고, 저건 풀숲 아닌가. 주위를 둘러봐도 똑같은 모습.
여기가 어딘지도 모를 뿐더러, 더 나아가 오늘이 며칠인지도 모르겠다.
"방금 일어난 사람에게 괜한 질문인가?"
"부끄럽게도 전혀 모르겠군."
"전혀 부끄러운 얼굴이 아닌데?"
"알지 못함을 부끄러워 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지."
"오, 아저씨는 배운 사람이었구나."
동아줄로 묶인 팔을 풀어주며 청년은 말했다.
푸는 솜씨 역시 익숙하다. 자주 했다는 듯이, 매번 해봤다는 듯이.
"우선 걸어가보자고, 아저씨. 뭐가 나올지도 모르고, 아니면 누구라도 만나면 여기가 어딘지 물어보자고."
"자꾸 아저씨라고 부를 셈이냐?"
"아저씨니까 아저씨라고 부르지."
청년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대부다."
있는 힘껏 발을 끌며, 나는 청년의 뒤를 따라 걸었다.
- 작가의말
매일 오후 8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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