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6. 풀 밟는 남자 (5)

ep 06. 풀 밟는 남자 (5)
툭툭 몸을 미는 낌새에 잠에서 깨어 처음 본 건 청년의 발이었다.
발로 밀어서 나를 깨우고 있었다.
불쾌감이나 모멸감보다는 이런 취급도 신선하군, 같은 자조적인 감상이 먼저 떠올랐다.
이 바닥에서 무엇을 따질소냐.
도망자인 입장에서 바닥에 등을 붙이고 잠을 청하는 일 자체가 부귀고 사기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물론, 나는 한번도 도망을 쳐본 기억이 없고, 도망을 칠 일 자체를 벌려본적 없으니 이런 감상은 책이나 술자리에서나 으레 들어왔던 가상의 체험에 가까웠다.
실제로 체험하고자 하니 정말이지...
앞으로 도망칠 일은 만들지 말자는 다짐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지금 살아남는다면 말이지.
"너무 곤히 자길래 일부러 안 깨웠어."
"그런가... 그건 미안하군."
야밤.
청년은 한가지 제안을 했다.
둘 다 잠들어 있으면 추격자가 왔을 때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하니, 한 명씩 번갈아 가면서 잠을 청하자고.
옳은 제안이길래 나는 흥쾌히 승낙했다.
야간 보초를 서는 병사와도 같은 역할 아니더냐. 이치에 들어맞는 제안이고 훌륭한 역할 분배다.
이 청년은 군 지식과 관련된 소양이 있나?
아니라면 앞서 추측한대로 도망과 연관된 일에 일가견이 있다거나, 혹은 자주 경험해본 일이라서?
물론, 도망이라는 일련의 행동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그 앞에 필연적으로 얽힌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사람을 헤치고 도망.
물건을 훔치고 도망.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
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다지 좋은 모습으로는 그려지지 않는군.
도망치는 일을 자주 경험해본 청년이라, 이 역시 마찬가지. 오히려 경계심이 먼저 든다.
차라리 군 관계자였으면 좋으련만, 행색이나 말투로 보아 그런 쪽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적어도 찬 놈은 다소 경박하긴 했어도 그 안에는 무쇠와도 같은 뚝심이 있었으나, 이 청년에겐 군인스런 그러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없이 가벼운 모양새.
언젠가 청년이 입에 올렸던 사무라이, 무사와 같은 계급은 아니더라도 칼을 쓰는 낭인 같아 보이긴 했지만, 이 역시 추측의 영역.
하지만,
지금 내게는 청년이 필요하다.
청년 곁에서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여, 언제가 되었든 언젠가는 다시 관아로 복귀해야 한다.
살아서 복귀해야 한다.
지금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는 청년이 필요하다.
괜한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불편한 질문을 하여 청년과 나의 관계를 악화시킬 이유는 없다.
모른척하며,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그저 흘러가며 조용히 있는 편이 무해할 것이다.
그런데 청년은 곤히 자고 있는 나를 그대로 둔 채,
혼자서 밤을 지새우며 보초를 섰단 말인가.
"아저씨 자는 모습이 애처로워서 도저히 못 깨우겠더라고. 나는 며칠 잠을 안 자도 끄덕없으니 괜찮아."
"미안하군. 덕분에 피로가 많이 풀렸다. 감사를 표하지."
사실이다.
오히려 침실이나 집무실에서 눈을 붙였을 때보다 더 깊이 잠들었다.
기절했다고 해도 무방할 수준.
하루종일 걸었던 피로 때문일까?
아니면 내일 해야 할 업무들이 머릿속을 헤집지 않아서 였을까?
당장 누군가가 쫓아오고 있다는데 밀린 업무가 문제일까보냐. 다시 잡혀가서 묶이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그래? 그러면 오늘은 좀 더 걸어보자고."
청년은 내가 건낸 겉옷을 받아 들고서는 어제처럼 앞장서서 걸었다.
해가 뜨기 직전, 멀리 보이는 산의 등줄기가 붉은 빛을 띄고 있을 때 걸음을 시작했으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나무들, 똑같은 외길, 똑같은 풍경만 지나간 채,
산등성이는 이내 아침에 봤던 모습과 흡사한 모양으로 붉게 물들어 갔다.
어제보다는 다리 상태가 많이 나아졌기에 보다 힘을 내서 걸었으나,
무엇하나, 누구하나 만나는 일 없이 허무하게 하루가 꼴딱 넘어가버렸다.
"오늘도 건수 없음, 인가."
청년의 짧은 탄식.
"방향은 맞는 거겠지?"
"아마도?"
"아마도라니..."
"그것도 그럴게."
발을 멈추지 않고 나아가며 말을 이어가는 청년.
"나는 이 나라가 처음이라고. 익숙할 리가 없지."
"그런가?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군."
그렇다.
본국에서 온 사람이다.
언제 왔는지는 모르지만, 괜시리 물어 봤다간 관계를 불편하게 하는 주제까지 나올성 싶어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건 그렇고,
아무튼 본국에서 온 사람이다.
우리나라의 지리를 물어보는 것도 어불성설 아닌가.
언제 어디서 왔는지, 이 땅의 사전지식이나 경험은 있는지와 같은 청년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보니, 제대로 가고 있나요? 라는 질문은 하찮은 우스갯소리가 되버렸다.
"뭐라도 나오면 좋으련만. 높이 솟은 나무와 잡풀이 가득한 땅 밖에 없으니 이거 슬슬 답답하네. 아저씨도 여전히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지?"
"안타깝게도 그러하다."
"하핫."
이런 상황에도 웃는게냐.
"아~ 뭐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푸념에 가깝게 내뱉은 말이 씨가 되었는지,
어둠이 깊게 내리기 직전 우리는 하얗게 차려입은 여인을 만나게 된다.
저 멀리서 발견했을 때는 나무에 묶인 천이 아닐까, 의심했다.
점점 가까이 다가가니 사람의 형태다.
흰색의 저고리, 넓고 깊게 펄쳐진 치마.
그리고 차려입은 옷과 똑같은 새하얀 색의 쓰개로 머리를 덮은 여인.
덕분에 간신히 입만 보일 뿐, 눈과 코가 가려져 전체적인 표정은 알 수 없다.
옷차림새로 짐작하여 여인이라 칭했지만, 실제로는 어떠할지...
온통 녹빛으로 만연한 깊은 산 속에서 더렵혀진 구석 없는 새하얀 여인을 만나, 낯설거나 잘 맞지 않는 이질감이 들 법도 했으나,
그것보다는 이틀만에 만난 사람에대한 반가움이 우리 두사람의 감정을 압도했다.
"사람이다! 사람이구나!"
"아저씨, 그렇게 소리지르면 놀라잖아."
달려오는 우리를 보았으면 어처구니가 없어 기가 막히거나, 두려워할 법도 한데,
여인은 그저 고개만 우리를 향해 돌릴 뿐, 앞으로 모은 손과 발은 그 자리 그대로 유지했다.
앞서 말한 쓰개 덕분에 얼굴이 보이질 않아 표정을 알 수 없었으나, 행동으로 미뤄보면 아마 평안 그 자체였을 것이다.
앞은 볼 수 있나?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깊이 눌러 쓴 모습.
얼굴은 가려지다 못해 어두운 밤처럼 보였다.
"이리 깊은 산 속에 어쩐 일이신지요."
여성의 목소리.
차림새와 동일한 여성.
말본새에서 깊은 지성이 드러나, 나는 마치 관아에 다시 들어온듯한 행복감에 빠져 고양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횡설수설 있는대로 말을 꺼냈다.
"우리는 길을 잃었소! 이틀이나 걸었는데 아무것도 안 나와서..."
"아저씨, 진정해. 이 분은 우리를 보고도 도망가지 않았어. 아, 물론 우리가 나쁜 사람이란 뜻은 아니야."
여인이 입을 가리고 큭큭 웃었다.
"재밌는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시군요. 하지만 재미로 길을 잃으신건 아닌듯 보입니다."
"그 말이 맞아. 어수선하게 전하긴 했지만 여기 아저씨가 했던 말처럼 이틀이나 이 산을 헤맸다고. 보는 것처럼 꼴이 말이 아니지."
"깊고 험한 곳입니다. 길을 잃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산짐승의 밥이 되는 일도 종종 일어납니다."
"산짐승도 못 만났고, 산짐승의 밥이 된 사람도 못 만났어. 그럼, 우리는 운이 좋았던거네?"
"다행스럽게도 운이 좋았지요."
서로 마주보고 웃는다.
저럴 정신이 있나?
청년도 간만에 만난 사람이라 꽤나 들떠 보였다.
"좋은 운을 좀 더 길게 이어갔으면 하는데."
"어떤 말씀이신지요?"
청년의 시선은 여인의 치마를 향해 있었다.
"하룻밤이라도 좋으니, 우리를 재워줄 수 있을까?"
"어이, 아무리 그래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 너무 심한 부탁 아닌가?"
나의 제지에도, 청년은 말을 이어갔다.
"내 추측이지만, 한나절 더 걷는다고 해서 마을이 보일 것 같지는 않아. 그리고 당신도 마을에서 온 것처럼 보이지는 않고. 한참을 걸어 왔다기엔 치마가 너무 깨끗해. 그렇다면 가까운 위치에 머무르는 거처가 있다는 얘기지. 그리고 목적을 가지고 여기로 온 것 같지도 않아보여. 그... 이것도 추측이긴 한데, 아무런 짐도 없이... 그러니까 준비도 없이 여기까지, 그리고 곧 해가 질 무렵인데도 여자 혼자서 이런 깊은 곳에 있지는 않을거란 말이지. 굳이 사유를 붙이자면 산보? 산책 정도의 용무가 아닐까 싶은데."
여인은 다시금 입을 가리고 웃는다.
여전히 눈은 보이질 않아, 실제로 웃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보기보다 더 재밌으신 분... 말씀하신대로 산책이라 해두죠. 가까운 거리에 집이 있는 것도 맞습니다. 관찰력이 우수한 분이시군요."
"관찰력은 아니고, 이것 저것 보이는대로 넘겨 짚었어. 맞으면 맞는거고, 틀리면 어쩔 수 없고. 틀려도 더이상 잃을게 없거든."
"제 신뢰를 잃을 수도 있지요."
"아, 그건 곤란한데."
나를 남겨놓고,
젊은이 둘이서 정분이 났나.
아저씨를 외롭게 하지 말아줘.
"해가 진다만."
보다못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결코 좋지 못한 마음이 들어서는 아니다.
"저희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혼자 사는 곳이긴 하지만 손님 방은 마련되어 있으니, 하룻밤 묶는데엔 불편함이 없으실 겁니다."
"역시! 운이 좋았던거 맞지?"
"그러게 말입니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별말씀을."
여인의 곁을 청년이 걷고,
내가 그 뒤를 따라가는 모양새로,
우리는 산 속에서 만난 여인의 집으로 초대 받았다.
- 작가의말
매일 오후 8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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