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라의 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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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완결

신너
작품등록일 :
2024.10.02 00:38
최근연재일 :
2024.11.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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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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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6. 풀 밟는 남자 (9)

DUMMY




ep 06. 풀 밟는 남자 (9)



솔직히 잠들지 못했다.


어찌 잠들 수 있겠는가, 천호가 얼굴을 씹어 버리겠다는데.


그럼에도 세상 태평하게 청년은 내 옆구리를 발로 차며 잠들어 있다.

이런 세상에나...


구멍 뚫린 문풍지 사이로 볕이 들기 시작하자,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부스스하게 일어나 '슬슬 가볼까, 아저씨' 라고 중얼거리는 이놈은 정말이지...


준비하여 문을 나서니 마당에 천호가 두손을 모으고 마중나와 있었다.


나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 했지만,

청년은 마주모은 두손을 잡고 천호화 한참을 떠들다가 이내 작별을 아쉬워하며 발을 옮겼다.


어서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은 내 마음을 알았는지,

청년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내 발걸음을 훌쩍 넘어 훨씬 앞에 서서 걸어 갔다.


똑같은 나무.

똑같은 풀숲.

그다지 굴곡없는 언덕길.


"물어볼게 있는데..."


말없이 한참을 걷다, 문듯 생각이 난 궁금증을 청년에게 털어 놓았다.


"어떤거?"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았냐고.


그녀에 대해서.

요괴, 잡귀, 신성시 여기는 것, 받들어 모시는 대상, 신과 같은 존재, 신령.


황금색으로 윤기가 흐르는 단발의 머리칼.

선명하게 붉은 눈동자.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느냐, 라고.


"음, 아저씨 말도 일리는 있는데, 정확하게 보자면 틀리지 않았었나? 알았다기 보다는 넘겨 짚은 느낌? 그녀 본인이 정답을 다 얘기해버린 기분?"

"넘겨 짚었다?"

"나는 줄곧 구미호인줄 알았으니까."


구미호.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요괴 혹은 신수.


아홉개의 꼬리.

사람을 잡아 먹는 요물.


하지만 그녀는 구미호가 아니었다.


"하지만 천호였지."

"응, 천호님이었어."

"그렇게 다른가?"

"여전히 지식이 얕구나, 아저씨."


이 녀석은 또 바보 취급을...


"모습은 똑같지만 급이 다르다고, 급이."

"급?"

"단순히 오래 살아서. 겸사겸사 요사스러운 신통력도 얻은 덕분에 주위로부터 받들어지는 존재가 구미호. 보통 여우가 50년쯤 지나면 사람으로 둔갑 가능하다고 하니까. 그리고 천년을 살게 되면 옥황상제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거지. 너, 대단한데! 같은 느낌으로?"

"급이 높은 것 치고 표현은 가볍군... 그렇게 대단하게 되면 천호가 되는 개념인가?"

"느낌이야 느낌. 그런 느낌이란 거지. 뭐, 실제로는 좀 더 진중한 분위기일지도? 그리고 뭔가 대단하면 본인이 의도했든 안 했든 주변에 이름이 떨쳐지게 되고, 거기다 흐름까지 잘타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건 우리같은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냐?"

"그것도 그렇군."


인간의 세계나, 요괴의 세계나 같다는 말인가.

인간의 이치와 요괴의 이치가 동일.


아니지.

애초에 인간이 없다면 요괴도 없을 터.


인간이 인식하고 나서야 그때부터 요괴라는 대상이 생겨난다.


목격되고, 널리 퍼진다.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그리고 나쁜 소식은 좋은 소식보다 훨씬 빠른 발을 가지고 있지.


그래서 인간에게 이롭거나 착한 귀신보다 나쁜 귀신의 힘이 더 쎄다.


더 널리 알려졌기에.

보다 넓게 퍼졌기에.


위세가 등등하다.


구미호는 워낙에 유명한 요괴인지라... 신성함만 따지면 신령, 신수에 준하겠으나, 여우의 본성답게 워낙에 장난이 심하고 가끔 그러한 장난이 지나쳐 인간에게 해를 입혔다.

그래서 요괴로 가치가 깎인건가.


사람을 홀리고, 간을 빼먹고, 더욱 나아가 인간을 잡아 먹는다.


그래서 요괴.


신수이자 신령이자 요괴다.


요괴이기 때문에 퇴치를 당한다.

절체절명의 순간도 분명 있었을 터.

그런 생사여탈의 순간을 천년이나 살아남아 천호가 되었으니.

구미호와 같은 급으로 여겨지면 기분 나쁠만 하겠군.


"헌데 그녀는 천호라는 대단한 명칭으로 불리기에는 뭐라고 해야 할까..."

"맞아, 아저씨. 모질지가 못하더라고."

"착하다, 순하다 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 같았지만."

"응, 마음이 악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단호하지 못 한 거지."


그래, 악한 마음.

요괴가 가져야 할 기본 소양.


그러나 우리가 만난 천호는 악하지 않았다.


매섭거나 사나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결과, 우리는 무사히 마을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점은 정말로 감사한다.

천호에게도, 청년에게도.


"죽을 만들 때도 계속 지켜봤는데, 이상한 건 안 집어 넣더라고."

"아, 그래서 도와준다고 한거로군. 감시도 함께였단 말인가."

"아저씨 너무 순진한거 아니야?"


청년이 하핫! 하고 웃는다.


"위치는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깊고 깊은 산 속이잖아? 그곳에서 옷차림이 깔끔한 사람을 만났다고? 이게 말이 돼? 게다가 눈꽃처럼 새하얀 색, 얼룩은 커녕 한점 더러움도 없었지. 마을 주민이라고 해도 그럴 수 없고, 산 속에 집을 짓고 산다고 해도 우리와 비슷하거나 더 더러우면 더러웠지 그런 모습은 있을 수 없어. 당연히 귀신이지. 사람을 홀리는 귀신."

"사람을 홀리는 귀신이라..."

"천호님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우리 입장에선 덫이나 다름 없다고. 그도 그럴 것이 천호님의 언니들은 목격자들을 모조리 죽였을테니까."


목을 물어서.

머리를 씹어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 천호님은 그대로 살고 싶었던 거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런 발길이 닿지 않는 산 속에서 조용히 살고 싶었겠지. 하지만 천성은 사람을 좋아했던게 아닐까. 싫었다면 우리를 보자마자 도망을 갔거나 위협했을테니까."

"확실히... 그런 낌새는 없었지."

"그치? 그래서 문 밖에서 고민하지 않았을까."

"살려서 보내야 하나. 죽여서 묻어야 하나."

"그것 역시 천호님의 천성이라 생각해. 사람의 처우를 망설이는 신수라니... 들어본적 없다고. 내가 지금껏 들어왔던 구미호들은 다들 나쁜 방향으로 결말을 맞이했으니까."

"내가 알고 있는 내용도 그렇군."

"귀하지... 이런 존재는 너무 귀해. 천호님 너무 좋아. 특히 황금빛으로 빛나는 머릿결의 촉감이 아직도 손에 남아 있어. 너무 좋아. 아내로 삼고 싶을 정도로."

"뭐..."


다시 돌아갔을 때 살아 남는다면 말이지...

무릇 신앙의 탄생이란 이런 흐름일지도 모른다.


하긴,

청년의 말을 듣다보면 그다지 나쁜 요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좋은 요괴?


그런데 좋은 요괴가 있나?


천호란 그런 존재인가?


잘 모르겠다.


허나, 신과 마주해서 목숨을 건졌으니, 받들어 모셔야 할 수준이 아닌가.

우리가 만난 건 요괴가 아니라 신령임이 분명하다.


"아저씨, 저기 지붕들이 보여."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약속이라도 한 듯,

검은 옷에 복면을 한 사내들이 우리 앞을 가로 막았다.


첩첩산중도 이런 첩첩산중이 없다.

또냐... 싶어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날붙이는... 다행스럽게도 없었으나 위압적인 태도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

어디, 위병... 위병이라도 빨리 찾아야...


순간,


사내들이 모두 허리를 크게 굽혀 크게 인사.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어, 수고~ 수고~"


청년이 오른손을 살짝 올려 사내들에게 호응.

원래 그랬다는 듯, 처음부터 이랬다는 듯.

익숙하고 능숙한 모양새.


"말씀하셨던 시일이 지나, 혹여 사고를 당하신게 아닌가 싶어 걱정하던 차였습니다."

"아~ 중간에 일이 좀 있어서. 어울리다 보니 좀 늦었어."


사내들의 시선은 조금씩 조금씩 나를 향했다.

이를 의식한듯, 청년이 서둘러 눈치를 줬다.


"아저씨, 작은 마을이기는 하지만 관아 비스무리한 것 정도는 있을거야. 거기서 도움을 요청하면 무사히 집에 갈 수 있겠지."

"그렇군. 감사를 표하지."

"뭘, 별말씀을."

"그건 그렇고... 헤어지기 전에 이름을 알고 싶은데."

"나?"


고민하는 청년.

한참을 땅을 보고, 하늘을 보고, 눈동자를 굴리다가,


"효우."


그제서야 말을 한다.


"이름이 효우인가."

"응, 그래도 금방 잊어 버리는게 좋을거야."

"왜지?"


효우는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마치 효우 주변에 서 있는 사내들을 소개하는 것처럼.


"선하게 보이지는 않잖아? 우리들. 빠르게 잊어줬으면 고맙겠어. 그게 아저씨 신변에도 도움이 될거고."

"그런가..."


말을 하던 도중,

한 사내가 효우에게 다가갔다.


"당주님."

"응?"

"후일을 생각하면 지금 없애두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사내는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노골적인 적대.


"아냐. 도중에 일이 좀 있었는데, 아저씨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으니 너희는 모른척 해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당주님."

"모른척 하라고."


들은적 있는 울림이다.


낮게 깔린 위협적인 목소리.


천호가 나에게 맹세를 언급했을 때와 똑같이,

고압적이고 사람을 찍어 내리는 위압감.


효우는 지긋이 눌렀다.

낮게 깔린 목소리는 사내를 어찌할 줄 모르게 함과 동시에 전체를 지배하고, 더이상 이견이 없도록 만들었다.


"그럼, 아저씨도 잘 살아~ 혹시라도 나중에 만나게되면 불 빨리 피우는 방법 알려줄게~"


하핫! 하는 웃음소리를 끝으로,

효우는 사내들과 함께 마을 골목길 사이로 걸어가 이내 안보이게 되었다.


이후,

초소의 병사들에게 도움을 받아, 살던 곳으로 복귀한지 며칠 뒤.


돌아온 날로부터 만하루를 꼴딱 자버린 후,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늘 그래왔던 것처럼 본래의 자리로 출근했다.

내가 돌아왔단 소식에 찬 놈이 집으로 쳐들어와 나를 계속 흔들지만 않았어도 피로가 좀 더 풀렸을 것을...

사용인들의 말에 의하면 결국 찬 놈의 멱살을 움켜쥔 채 기절하듯 잠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동문 근처의 막사.

수도에서 온 손님 일행이 내일이면 돌아가기에 최종 확인을 위한 현장 점검.


단순 얼굴만 비치면 상관없는 연례 행사였으나, 성격상 그냥 지나칠 순 없는 일.


한 손에 다 쥐어지지 않는 문서 다발을 책상에 앉아 하나씩 살펴본다.


문제 없음.

이것도 문제 없음.


"뭐 먹냐?"


찬 놈과 부관이 천막을 걷고 들어 왔다.


"점심 시간이라 배식을 하더군. 얘기해서 하나 얻어 왔지."

"주먹밥? 평소에는 안 먹지 않았나?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부관이 차를 내왔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뭐, 생각하기 나름이지. 소중한 곡식인데 감사하게 먹어야겠단 마음이 들더라고. 참, 전에 얘기했던 그 명단 말인데..."


찬 놈은 품에서 꾸깃꾸깃한 종이들을 꺼냈다.


"이거? 안 그래도 이번 행사가 끝나면 네가 말한대로 다시 교육할 시간을 마련할까 하는데."

"잠깐 줘봐."


나는 찬 놈에게 명단을 건내받자마자 길게 찢어 버렸다.


찢고,

다시 한번 더 잡아서 찢고,

적혀진 글씨가 보기 어려울 정도까지 찢었다.


"감면이다. 없었던 일로 하지."


찬 놈의 입이 좋은 듯, 이상한 듯 미묘하게 웃는다.


"천하의 권 대부님한테 무슨 바람이 불었나?"

"처음 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서툰 법이니까."


나답지 않게 신이 나서 거들먹거린 태도가 뒤늦게 부끄러움으로 올라와, 이를 무마하고자 받아든 찻잔을 단순에 들이켰고,


이내 모두 뱉어버렸다.


앗, 뜨거.





ep 06. 풀 밟는 남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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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ep 08. 이름 없는 이들 (6) -시즌1 종료- 24.11.23 11 0 12쪽
55 ep 08. 이름 없는 이들 (5) 24.11.22 8 0 10쪽
54 ep 08. 이름 없는 이들 (4) 24.11.21 9 0 9쪽
53 ep 08. 이름 없는 이들 (3) 24.11.20 13 0 10쪽
52 ep 08. 이름 없는 이들 (2) 24.11.19 10 0 11쪽
51 ep 08. 이름 없는 이들 (1) 24.11.18 12 0 10쪽
50 ep 07. 꼬리 아홉개 (7) 24.11.17 12 0 10쪽
49 ep 07. 꼬리 아홉개 (6) 24.11.16 12 0 10쪽
48 ep 07. 꼬리 아홉개 (5) 24.11.15 12 0 10쪽
47 ep 07. 꼬리 아홉개 (4) 24.11.14 14 0 10쪽
46 ep 07. 꼬리 아홉개 (3) 24.11.13 15 0 11쪽
45 ep 07. 꼬리 아홉개 (2) 24.11.12 16 0 9쪽
44 ep 07. 꼬리 아홉개 (1) 24.11.11 17 0 10쪽
» ep 06. 풀 밟는 남자 (9) 24.11.10 20 0 11쪽
42 ep 06. 풀 밟는 남자 (8) 24.11.09 17 0 10쪽
41 ep 06. 풀 밟는 남자 (7) 24.11.08 16 0 10쪽
40 ep 06. 풀 밟는 남자 (6) 24.11.07 17 0 10쪽
39 ep 06. 풀 밟는 남자 (5) 24.11.06 19 0 10쪽
38 ep 06. 풀 밟는 남자 (4) 24.11.05 17 0 10쪽
37 ep 06. 풀 밟는 남자 (3) 24.11.04 16 0 10쪽
36 ep 06. 풀 밟는 남자 (2) 24.11.03 17 0 10쪽
35 ep 06. 풀 밟는 남자 (1) 24.11.02 20 0 10쪽
34 ep 05. 인형사 (9) 24.11.01 20 0 11쪽
33 ep 05. 인형사 (8) 24.10.31 23 0 11쪽
32 ep 05. 인형사 (7) 24.10.30 23 0 11쪽
31 ep 05. 인형사 (6) 24.10.29 22 0 10쪽
30 ep 05. 인형사 (5) 24.10.28 27 0 9쪽
29 ep 05. 인형사 (4) 24.10.27 27 0 10쪽
28 ep 05. 인형사 (3) 24.10.26 3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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