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08. 이름 없는 이들 (2)

ep 08. 이름 없는 이들 (2)
"소체님은?"
가득 채운 술잔도,
찬 대장님의 큰 손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소꿉장난 같아 보였다.
사람의 신체 크기와 주량의 상관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여지를 주긴 했으나, 찬 대장님은 매번 다리가 휘청일 때까지 마시는 반면 그와 거의 비슷하게 속도를 맞추던 소체는 늘, 매번 멀쩡했으니 신체 크기와는 그다지 상관 없는게 아닌가... 하지만 소체를 일반 사람과 동일 선상에서 봐도 되려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아무래도 좋은 생각이 들었다.
샤화는 요령껏 적당한 취기가 돌 정도까지만 마시는 편이고,
닷치와 이온은 가게를 봐야하니 술은 입에 대질 않는다.
나 역시,
2잔 이상 들어가면 다음날이 힘들다.
소체가 매번 찬 대장님을 든든하게 상대해준 덕분에 샤화나 나, 특히 내가 편해졌다.
괴롭힘이 덜하다.
괴롭힘을 덜 당한다.
그런 소체가,
오늘은 없다.
"시화랑 같이 갔어요. 저기 밑에 장이 선다고 해서."
"아, 거기?"
계절이 바뀔 때 쯤 한 번씩, 전국을 떠도는 상인들이 모여 장을 세운다.
일반적인 식료품 등은 주변에서 상시 판매하고 있으나 타 지역, 혹은 물 건너에서 가져온 물건들은 떠돌이 상인들이 전문이라, 그들이 내놓는 신기한 약재나 그릇, 잡화 등은 눈요깃거리로서 충분했다.
운이 좋다면 타국의 가벼운 음식도 맛볼 수 있다.
강한 향신료가 취향인 사람도 있었고, 깊은 짠맛의 새로운 감성에 눈을 뜨는 사람도 있었다.
문화와 문화가 맞닿는 곳.
늘 일정하게 흘러가는 비슷하고 나른한 일상에 이만한 오락거리를 마다하는 이는 드물었다.
"시화 구경시켜 준다는 핑계로 소체도 겸사겸사 간 거 아니야? 처음일거잖아? 장 구경."
"음... 역시 그렇지?"
샤화의 말을 듣고 보니,
소체가 온 뒤로 처음 서는 장이구나.
그래서 그렇게 며칠 전부터 물어보며 들떴던 거였구나. 전혀 몰랐다.
"샤화 네 말대로 여기서 오래 살았던 우리들은 흥미 밖인데 말이야."
"내 창고에 오면 더 진귀한 걸 보여줄텐데."
"...진귀한게 아니라 놀랄거리겠지."
원숭이 뇌는 그곳에서 처음 봤다.
자지러진 나를 보며 낄낄 거리는 샤화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아, 찬 대장님은 안돼. 봐서는 안되는게 많거든."
"우리 사이에 섭섭하게 왜 그러냐, 백룡."
"어머, 정정할게. 우리 창고에는 불법처럼 보이는게 많으니까 안돼."
불법이 아니라 불법처럼... 이라 애매모호하게 말하는게 샤화 답다.
"...그러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심부름꾼아, 나중에 샤화네 창고에 가거든 재밌어 보이는거 몇 개만 가져다주라. 저번에 그 가죽 장갑은 제법 쓸만하던데? 질기고 튼튼해서."
"안 갈거에요. 절대 안 가."
찬 대장님과 샤화.
공과 사가 확실하다고 해야 할지.
공과 사가 구분없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여기 텐야는 이상한 곳이다.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나라의 앞면과 뒷면의 이야기가 줄줄 흘러 나온다.
그것도,
이런 작디 작은 구석에 위치한 탁자 몇 개밖에 없는 선술집에서.
"누군가가 내 가게를 험담을 하는 느낌이 들어."
주방에서 들리는 닷치의 중얼거림에 나는 흠칫 놀라 머릿속의 기억을 휘휘 저어가며 급하게 지웠다.
하지만 인간의 뇌라는게 참으로 고지식하고 고집불통이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생각이 나는 그런 녀석이었다.
의견을 고치지 않고 굳세게 버티는 면만 봐서는 성실하다고 해야 하나?
음... 이런 부분도 성실하다고 표현할 수 있나?
그렇다라고 한다면 성실함도 방향성에 따라 매번 긍정적이라고는 하지 못 할 부류일지도 모르겠다.
커다란 접시를 탁자 위에 올려 놓고 자리에 앉는 닷치.
아까 전에 찬 대장님이랑 같이 꽂았던 염통 꼬치가 산처럼 쌓여 있다.
"이것도 식기전에 먹어."
"나 이거 너무 좋아!"
눈 마주치면 매번 싸우는 사이더라도,
닷치는 늘 백룡 몫의 염통 꼬치를 따로 챙겨 줬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잘 먹어주는 사람을, 아무리 무뚝뚝한 닷치라도 매정하게 외면하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여기는 곧 비워줘야되요. 주인장 말로는 다음달 중순까지는 어떻게 해달라던데."
닷치는 자리에 앉자마자 찬 대장님께 보고를 하듯 하나씩, 순서대로 말을 나열해갔다.
"딱 봐도 낡았잖수. 비 올 때는 빗물 받을 바가지도 부족할 정도라니깐. 쥐는 좀 그만 봤으면 좋겠고. 그나마 저렴한게 유일한 장점이었는데..."
"그래서? 너 주인장이랑 싸웠냐? 그래서 주인장이 비워 달라든? 너도 성질 좀 죽이지 그랬냐."
"찬 나리는 날 뭘로 보는거요."
"닷치로 보는데."
"닷치로 보시겠지."
"소이치로 오라버니로 보시겠죠?"
"망나니 칼잡이?"
샤악! 샤악!
"왜 나한테만 그래!"
"흰 도마뱀... 이렇게 근면 성실하게 매일 매일 하루도 안 빠지고 장사하는 내가 망나니?"
"그러면 주인장이랑 왜 싸웠어?"
"안 싸웠어!"
안 싸웠어!
안 싸웠다고!
누가 싸웠다고!
나는 그런말 한 마디도 안 했다고!
괴성을 지르는 닷치.
아, 안 싸웠구나.
나는 또 저기 기댄 칼들이 피를 부른줄 알았네.
"여기 건물이 썩고 썩어서 무너질 것 같다고! 그래서 무너뜨리고 새로 짓는다고!"
"어머, 처음부터 말하지 그랬어."
"앜!"
닷치가 오니치로가 됐다.
조금 재밌는, 얼굴이 붉게 물든 오니치로가 됐다.
술은 한 잔도 안 마셨음에도,
이 가게에 술은 혼자 다 마신 것처럼 검붉게 물들었다.
"그래서 갈 곳은 알아봤고?"
찬 대장님의 물음.
"고민중이긴 한데..."
"어떤 고민?"
닷치가 머리를 박박 긁으며 찡그리는 와중에 이온이 말을 이어갔다.
애초에 닷치는 고민과는 거리가 먼 사내이긴 했다.
"찬 대장님, 혹시 주변에 저희가 장사를 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외지인인 저희는 주변 정세에 어두워서요."
"그렇지. 혹여 사기라도 당하면 안되니까."
"네, 소이치로 오라버니가 사기를 당하게 되면 사기꾼의 목숨이 위험해져요."
칼이 피를 부른다!
"그것도 그렇군. 원하는 조건은 있냐? 너네들도 여기서 장사한지 좀 됐으니 뭐라도 바라는게 있을 것 아니냐."
"지금보다 좀 더 컸으면 좋겠수다."
닷치의 말에 입으로 가던 술잔이 멈춰버린 찬 대장님.
샤화가 놀리듯 곁에 붙는다.
"뭐야? 드디어 돈 맛을 알아버렸어? 어느새 장사꾼이 다 됐네? 돈독이 올랐구나, 닷치. 칼잡이가 장사에 눈이 떴어요?"
"찬 대장님이랑 흰 도마뱀 너네들 무리가 우루루 몰려와 앉으면 다른 손님 받을 자리가 없어서 그런다! 그리고 찬 대장님은 맨날 외상이잖수!"
"오늘도 외상인데?"
"앜!"
조금 재밌는 오니치로가 됐다.
조만간 저기 기댄 칼들이 닷치의 얼굴처럼 붉게 물들지도 모르겠다.
빚을 진 채무자가 칼 맞는 일은,
여기선 그다지 귀한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여기보다 좀 더 넓은 곳이라... 샤화 넌 아는 곳 없냐?"
"많지. 없을 수가 없지. 많기야 하지만, 꼬치 팔아서 낼 수 있는 비용이 아닐텐데. 하루종일 판다면 어찌 될지도?"
"흰 도마뱀, 네 속셈을 내가 모를까? 잔뜩 빚을 지게 해서 노예로 부려먹을 생각이겠지."
"너무 그렇게 나를 잘 알아도 기분 나쁜데 말이지..."
찬 대장님 앞에 놓인 술이 다 떨어지자,
이온이 눈치좋게 금방 새 술을 대령했다.
하얀 도자기로 된 병에 담긴 청주.
마시기 좋도록 적당하게 데운 덕분에 따뜻한 김이 올라 온다.
"샤화네가 소개하는 건 너무 고급이란 말이지. 닷치가 삐까뻔쩍한 주방에 서 있는 모습은 그다지 상상이 안 되는데?"
"찬 나리도 그런 취향은 아니잖수."
"그렇지. 나는 그런데서 술 못 마셔. 오히려 적응이 안되서 몸을 떨다가 그만 토를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건 단순히 민폐라고."
"아니, 안 어울리는 네 모습을 보고 토를 한다고."
"앜!"
찬 대장님은 술잔에 든 술이 식기 전 단숨에 들이켰다.
으으으.
배에서부터 올라오는 따뜻한 만족감.
"닷치랑 이온. 새로운 자리는 주변에 알아볼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이쪽으로 빠삭할 것 같은 사람을 하나 알고 있거든."
"신세 좀 질게요, 찬 대장님."
"고맙수."
"감사 표시는 문제가 해결되고 난 뒤에 해. 나중에 잘 안되면 서로 뻘쭘하니깐."
셋이서 말하는 틈을 타,
샤화의 의자가 내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온다.
착! 하고,
어깨가 닿을랑말랑.
"이봐, 심부름꾼."
"왜."
"뭐야, 왜 그렇게 경계해?"
"경계 안 해도 될 주제야?"
"아니, 그건 아닐 듯?"
아, 이런.
"일 하나 해주라."
"어떤 일인데?"
샤화가 사람 좋게 미소 짓는다.
머릿속 경계 수위가 빨갛게 빛나기 시작.
물이 급격하게 불어나기 전에 도망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자칫 잘못해서 방심하면 이미 물이 넘쳐 낭패, 수몰되고 만다.
저건 분명 사람을 홀릴 때 쓰는 미소다.
"쉬운 일이야."
"......"
입을 닫은 채 묵묵히 샤화를 쳐다본다.
백룡의 눈이 반짝반짝.
분명,
샤화가 주문한 건 중 어려운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이 정도로? 싶은 쉬운 일도 있었다. 간편하고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쉽고 어려운 정도는 내가 판단하지, 의뢰자가 판단하게 두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의뢰자가 하는 말은 대부분 과소평가되어 있으니까.
이건 간단한 일이야, 라고 하며 수고가 드는 일에 대한 보수를 깎으려는 자들도 많다.
이건 쉬운 일이야, 라고 하며 실패 했을 때에 책임을 돌리려는 자들도 많다.
샤화는 그런 부류의 저질들과는 급을 달리 했지만,
보통 저런 말과 저런 표정을 짓는 건 2가지를 염두에 두었을 때다.
어려운 일을 쉽다고 속여서 나를 골탕먹이려고 하거나,
정말 쉬운 일이지만 내켜하지 않는 나를 꼬시기 위함이거나.
하지만 지금까지의 인연이 있었던 만큼,
나는 순순히 골탕을 먹어 주거나, 순순히 꼬심을 당해줬다.
그만큼 샤화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까.
손해와 이익의 저울질.
샤화에게 만큼은 뒤로 미뤄두었다.
"혹시 비밀로 해야 돼?"
"눈치가 빠르네."
세상에나.
이건 어찌할 도리도 없이 당첨이네.
"날짜는 이틀 뒤 아침, 서문 앞. 그날 괜찮아?"
"응, 그날은 별다른 일정 없어. 아마도?"
"해 줄꺼야?"
"해야지. 누가 뭐래도 샤화의 부탁이니까, 당연히 해야지."
아,
방금 어깨가 닿았다.
- 작가의말
매일 오후 8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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