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라의 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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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완결

신너
작품등록일 :
2024.10.02 00:38
최근연재일 :
2024.11.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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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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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8. 이름 없는 이들 (5)

DUMMY




ep 08. 이름 없는 이들 (5)



뻔한 결말이라고 해야 할지,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지.


관군 십여 명과 함께 도착한 거래 장소에는 쓰러져 있던 사내들도, 뒹굴던 천 덩어리들도, 심지어 짐승의 사체가 들어 있던 관 조차도 이미 사라져 있었다.


바닥에 그어진 수많은 발자국만이 그들의 동료가 도착해서 상황을 정리했고, 그 전에 한바탕 싸움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관군을 데리고 다시 여기로 돌아오는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기에 정리할 시간 역시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밖에 추측이 되지 않는 참상.


그렇다고 여기에 혼자 남아 얼마나 될지도 모를 동료들을 상대하며 언제 올지 모를 관군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옳은 판단이었다고 위로했다.


증인을 놓치고, 현장은 엉망이 되었지만,

적어도 증거물은 남았다.


이후는 관아의 일.


내가 나설 무대는 아니다.


오히려 나는 조사받아야 할 대상이 아닌가.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음날.


날이 많이 늦었음을 사유로 함께 식사하는 일 없이 헤어진 우리는 약속한대로 다음날 아침 북문 근처에서 만났다.


전날과는 다르게,

멀리서 보면 검은색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 짙은 녹색의 제복과 일반 갓보다 둘레가 작은 갓, 목엔 입과 코를 가리는 두건.


지역 문양이 수놓아진 두건.


전형적인 관군의 모습으로 나타난 부관님.

언제나 텐야로 찬 대장님을 모시러 왔던 그 모습이다.


그나마 어제와 동일한 건 발에 신은 군화와 허리에 찬 네 자루의 도검.

검집은 네 자루였으나, 꽂혀있는 도검은 세 자루.

빈 자리는 전날 파손된 그것이겠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가며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완수한 덕분에 부관님의 목숨을 넘어 나의 목숨까지 지켜질 수 있었다.


취향이 확고한 것이 아니라면,

새로운 칼을 구하는데 나도 힘을 보탤 생각이다.


연줄을 찾다보면 통관 업자도 소개받을 수 있을테지.

찬 대장님과 상의해서 깜짝 선물이라는 형태로 전달하면 될 터.


"어쨌거나 상황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고, 심부름꾼님의 기지 덕분에 증거물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기지라기 보단 보험이었지만 말이죠."


하나라도 손해를 덜 보려는 장사꾼 같은 생각이었으나,

언제 그랬더라... 샤화는 나보고 절대 장사는 하지 말라고 했다.

돈을 벌기는 커녕 불쌍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가게 한 켠까지 내줄 것만 같다고.


"그때도 말씀 드렸었나요? 함께 가길 잘 했다고. 덕분에 주요 참고인은 제가 되었습니다. 심부름꾼님께 폐를 끼치지 않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 여기고 있어요."

"하지만 관을 옮긴 건 제가..."


부관님은 조용히 검지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 앞으로 가져갔다.


"통과 시킨 건 접니다. 심부름꾼님만 책임을 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저는 그들의 방식을 적발했고, 운송 방법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주신 서류와 천 뭉치는 이번 일을 계획한 이들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되겠지요."


그러니 비밀이라고,

부관님은 말했다.


"종착지는 여기 였으나, 시작점은 항구와 가까운 마을이었을 겁니다. 물건을 받는 범인이 있다면 물건을 보낸 범인도 있겠지요. 제가 제 위치로 돌아가면, 그때 도움을 요청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여기는 아닙니다."

"신경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관아는 불편했거든요."


그랬다.

모든 사람이 관아를 불편해 하지만, 이번엔 특히 그랬다.


조사관 앞에 앉으면 할 말이 궁했다.

결국 물음에 답하고, 물음에 답하고, 물음에 답하다 보면 샤화 상회까지 영향이 미치게 된다.


그 부분만은 피하고 싶다.


심부름꾼은 의견을 가져선 안 되고,

하기로 했다면 의뢰자가 내건 조건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샤화 상회 라는 이름은 절대 입 밖에 내지 말 것.'


부관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런 마음 씀씀이는 솔직히 고마웠다.


"관아가 불편하지 않은 분은 없지요. 심부름꾼님께서 되도록 빨리, 그리고 무사히 이곳을 벗어나도록 돕는 일이 제 마지막 역할입니다. 저도 일 때문에 왔다고는 하나, 여기 분들은 타지 사람에 대한 융통성이 다소 부족하더군요. 같은 관군에게도 그러한데, 심부름꾼님께는 오죽하겠습니까. 그리고 이것."


돌돌, 동그랗게 말린 두루마리를 내게 건내는 부관님.


"어제 일을 간략하게 작성하였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찬 대장님께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심부름꾼님께서 그 전에 읽어보셔도 무방하고, 내용이 황당무계하여 아니다 싶으면 전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심부름꾼님께서 불필요한 오해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라 생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부관님. 여러모로 폐를 끼치네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어제 못 사주신 밥, 제가 돌아가면 함께 먹을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자신은 관아로 돌아가 이번 일을 마무리 해야 하니,

어서 가세요, 라고.


부관님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돌아가는 길은 올 때와 다르게 급히 서두르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썩어 들어가는 짐도 없었고, 다급한 마음도 없었다.


유명하다는 쌀을 사려는 계획은... 접었다.

도저히 관을 실었던 수레에 쌀 포대를 올려 놓을 용기가 나질 않았다.


누구나 하나쯤은 믿는 미신이 있지 않은가.

미신... 까지는 아니더라도 찝찝함은 있었다.

그게 입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한다면,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올 때 들렀던 주막에 도착하여 본래의 말로 교체하고,

다시 달리기 시작하여 늦은 밤이 되서야 성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체도 화성에 함께 가고 싶어 하였으나,

시화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는 일이라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덕분에 장의자에 앉아 소체의 징징거림을 듣고 있자니, 그제서야 성당에 다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이번 일도 역시나 엉망진창이었구나, 하고.


"응? 나 3줄 이상 적혀 있는 건 안 읽는데?"


다음날, 찬 대장님의 집무실.

부관님의 서신을 가져 왔다고 하니, 훈련도감 문 앞을 지키던 경비병은 순순히 길을 내주었다.


신뢰받고 있구나, 부관님.


찬 대장님의 집무실엔 일 때문에 몇 번 와봤지만,

부관님 없이 독대하는 건 처음이다.


그나저나 여전히 지저분한 책상.


두루마기를 내밀자 늘 그랬듯 세상만사 귀찮아 했지만,

부관님의 서신이라는 말에 왼팔로 책상 위를 쓸어 공간을 만들었다.


쓸리고 밀려서 바닥에 우수수 떨어지는 서류 뭉치들.

누가 어디서 보낸 건지는 모르지만, 일단 미안!


서신을 한참 읽어보다 탁! 하고 접는 찬 대장님.


"그래서?"

"...뭐가요."

"다친 곳은 없고?"

"부관님이 지켜주셔서 다행히 없어요."

"우리 부관 우수하지?"

"매우."


큭큭큭, 웃는다.


"관 실어 나른거... 누가 시켰는지 같은 시시한 건 안 물어보마. 어차피 너는 윤리나 도리 같은 이상한 소리를 하며 대답 안 할거니깐."

"배려가 자상하시네요."

"이거, 오는 길에 읽어는 봤냐?"


찬 대장님은 오른손에 쥔 서신을 흔들며 물었다.


"아뇨, 부관님께서 읽어봐도 된다고는 하셨는데, 왠지 읽으면 죄를 짓는 기분이라..."

"그 뭐시냐, 뭉치? 천 뭉치? 아무튼 뭔가로 돌돌 말려있던 그거. 아편은 아니라고 적혀 있네."

"아니에요?"


확실히 아편 같은 느낌이었는데.


"아편이 맞긴 맞는데, 아편은 아닌 그런거?"

"그게 뭐에요."

"나도 몰라. 암튼 그렇게 적혀 있어. 추측하자면 조잡하단 이야기지."


조잡하다?


"가짜? 그런 느낌일까? 뭐, 실물을 못 봐서야 제대로 설명을 못 하겠군."

"아편에 가짜도 있어요?"

"세상 모든 일은 가짜와 함께하지."

"......"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 권 대부가 예전에 했던 말이 기억나서 나도 써먹어 본거니까. 방금 나, 제법 멋있지 않았냐? 어허, 눈 좀 제발."


그건 그렇고,

라고 하며 앉은 의자에서 일어나는 찬 대장님.


오른손에 쥐고 있던 서신을 양손으로 잡고 촥! 촥! 찢어버렸다.


되도록 많이.

되도록 잘게.


무슨 글씨가 적혀 있었는지,

누가 적었는지 모르게.


"그렇게 찢어도 괜찮아요?"

"내 머릿속에 다 저장해놨으니 괜찮아. 야, 야.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니깐. 이래뵈도 기억해야 할 건 꼭 기억한다고. 날 믿어."

"...차라리 부관님을 믿겠습니다."

"아, 나도 부관을 믿지. 아주 잘 믿지. 정말 우수하잖냐."

"매우."


큭큭큭, 웃는다.


"근데 부관 얘기를 하니 짜증이 슬슬 밀려오네."

"왜요?"

"거기 놈들이 급하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지원을 보냈는데, 이번 일을 핑계로 며칠 더 부관을 써먹겠지. 똥통 같은 놈들... 알잖냐, 우리 부관 일처리 하나는 확실한거."

"알지요."

"기회다 싶겠지, 망할 놈들. 이거, 며칠이나 더 걸릴지 모르겠네. 원래라면 오늘이 복귀일인데... 저 서류들 언제 다 처리하냐."


원래부터 정리 안 되어 있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서도.

여기서 내가 할 말은 아니라 그저 입만 꾹 닫고 있었다.


찬 대장님은 커다란 팔을 내 어깨에 둘렀다.


"이 가슴 아픔을 해결하려면 낮술 밖에 없겠지?"

"...부관님은 안 계시니 괜찮을거고, 권 대부님께서 화를 내실텐데요."

"지금부터 권 대부를 꼬시러 갈거야. 너도 함께다."


오랜만에 봽게 된 권 대부님은 언제나의 그 모습이셨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소리를 꽥!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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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ep 08. 이름 없는 이들 (6) -시즌1 종료- 24.11.23 11 0 12쪽
» ep 08. 이름 없는 이들 (5) 24.11.22 9 0 10쪽
54 ep 08. 이름 없는 이들 (4) 24.11.21 9 0 9쪽
53 ep 08. 이름 없는 이들 (3) 24.11.20 13 0 10쪽
52 ep 08. 이름 없는 이들 (2) 24.11.19 10 0 11쪽
51 ep 08. 이름 없는 이들 (1) 24.11.18 12 0 10쪽
50 ep 07. 꼬리 아홉개 (7) 24.11.17 12 0 10쪽
49 ep 07. 꼬리 아홉개 (6) 24.11.16 12 0 10쪽
48 ep 07. 꼬리 아홉개 (5) 24.11.15 12 0 10쪽
47 ep 07. 꼬리 아홉개 (4) 24.11.14 14 0 10쪽
46 ep 07. 꼬리 아홉개 (3) 24.11.13 15 0 11쪽
45 ep 07. 꼬리 아홉개 (2) 24.11.12 16 0 9쪽
44 ep 07. 꼬리 아홉개 (1) 24.11.11 17 0 10쪽
43 ep 06. 풀 밟는 남자 (9) 24.11.10 20 0 11쪽
42 ep 06. 풀 밟는 남자 (8) 24.11.09 17 0 10쪽
41 ep 06. 풀 밟는 남자 (7) 24.11.08 16 0 10쪽
40 ep 06. 풀 밟는 남자 (6) 24.11.07 17 0 10쪽
39 ep 06. 풀 밟는 남자 (5) 24.11.06 19 0 10쪽
38 ep 06. 풀 밟는 남자 (4) 24.11.05 17 0 10쪽
37 ep 06. 풀 밟는 남자 (3) 24.11.04 16 0 10쪽
36 ep 06. 풀 밟는 남자 (2) 24.11.03 17 0 10쪽
35 ep 06. 풀 밟는 남자 (1) 24.11.02 20 0 10쪽
34 ep 05. 인형사 (9) 24.11.01 20 0 11쪽
33 ep 05. 인형사 (8) 24.10.31 23 0 11쪽
32 ep 05. 인형사 (7) 24.10.30 23 0 11쪽
31 ep 05. 인형사 (6) 24.10.29 22 0 10쪽
30 ep 05. 인형사 (5) 24.10.28 27 0 9쪽
29 ep 05. 인형사 (4) 24.10.27 27 0 10쪽
28 ep 05. 인형사 (3) 24.10.26 3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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