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각성(5)

하무란은 즉시 자리를 떠나며 생각했다.
이번에는 나도 운이 좋았군.
언젠가 클라스크가 생기는 날에 다시 한 번 너와 싸우러 오겠다.
그땐 오늘의 일을 제대로 복수해주지.
그렇게 될 날을 기대하며 하무란이 망가지고 부서진 슈트들을 벗어 던지고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처음 등장했던 순간과는 달리 다소 초라해진 모습이었다.
전신에 입고 있던 사이버슈트를 벗어던져서인지 상당히 왜소하면서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그 모습으로 천천히 건물의 계단을 향해 걸어가더니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하무란이 떠나고 난 뒤 현장에는 존과 베카모레 두 사람만이 남겨져 있었다.
베카모레는 예상보다 훨씬 큰일을 치르고 나서인지 기운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사이오네틱 에너지와 클라스크에 대해 알려주려고 했던 것뿐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이야.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쓰러진 존의 모습을 보며 베카모레가 급히 네키를 호출했다.
크게 상처를 입은 존을 치료할 힐링램프를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사이오네틱 에너지를 이용해 출혈을 막고 램프를 사용해 치료하면 어렵긴 하겠지만 목숨은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미 피를 많이 흘린 상태여서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는 없었다.
애초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가만히 놔둬도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전투까지 치른다면 당장 죽어버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서 몸 상태를 확인해보니 심장에 이상이 생기거나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아직 스스로 지혈하는 법을 모르고 있어서 전투 중에 쓸데없이 피를 많이 흘린 것 같았다.
나중에라도 관련 교육을 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네키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그냥 걸어오는 것만이 아니라 힐링램프까지 챙겨서 와야 했으니 말이다.
계속해서 존의 상태를 확인하며 응급 처치를 해나가고 있던 상황에 마침내 네키가 힐링램프를 들고 나타났다.
즉시 네키에게 램프를 전달받고 치료를 시작했다.
출혈이 심한 부위부터 상처에 램프의 불빛을 비추었다.
녹색 빛을 내는 램프의 불빛에 닿은 부위에서부터 세포의 재생이 시작되었다.
빠르게 재생되기 시작한 세포들은 금방 상처부위들을 메꾸고 피가 세어나가는 것을 방지했다.
차근차근 상처부위들을 따라 움직이며 전신의 상처들을 치료했다.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상처부위들을 찾아내 치료하는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존을 완전히 치료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치료과정을 끝내고 기절하듯 쓰러져 있는 존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마침내 눈을 뜬 존에게 베카모레가 말했다.
“정신이 좀 드나? 기분이 어떻지?”
“어지러워요.”
“아마 피를 많이 흘려서 그럴 거다. 힐링팩터 같은 제대로 된 치료 장치가 없어서 말이야.”
베카모레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존이 가져왔던 힐링램프였다.
저게 이렇게 유용하게 사용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벌써 베카모레에게 여러 차례 도움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걸로 너를 치료하는 것도 벌써 두 번째군. 아마 처음은 밴디였겠지만.”
두 번째?
밴디 아저씨는 그때 그런 상처를 입고도 힐링램프로 자신을 치료해주셨던 건가?
다행히 착용하고 있던 목걸이는 다치지 않은 상태였다.
존은 그 목걸이를 손에 쥐고 감사의 마음을 대신했다.
밴디를 치료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가져갔던 것이었는데 오히려 자신이 치료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아직 어리고 나약한 상태로 누군가를 치료하고 보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상태에서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가 커다란 욕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성장을 해야 했다.
누군가를 지키고 보호하려면 그만한 힘을 가지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밴디 같은 희생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만약 더 강하게 성장할 수만 있다면 다시는 누군가를 잃는 아픔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또 다시 잃게 된다면 그 슬픔을 견딜 수 없게 될 것만 같았으니까.
밴디의 죽음은 그 자체로 존에게 큰 의미를 가져다주고 있었다.
아마 그런 사람을 다시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이 쓸쓸해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때 베카모레가 존에게 손을 내밀었다.
쓰러져 있는 존의 몸을 일으켜주기 위해서였다.
베카모레의 손을 잡고 일어서려는 찰나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능력을 각성해냈구나. 전격계의 초능력이라니. 이런 능력을 보는 건 나도 처음이군.”
전격계의 초능력.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사용했던 거라 어떻게 했는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능력을 각성했다는 사실이 기쁘게 느껴지고 있었다.
밴디가 전해준 클라스크.
그리고 자신만이 가진 고유한 초능력.
그것이 있으면 앞으로의 힘든 일들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단순하고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밴디가 전해준 그 클라스크와 목걸이가 존에게 새로운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이제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클라스크의 능력을 각성한 초능력자.
이 힘을 잘 컨트롤해서 밴디 아저씨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을 지켜주는 거야.
그렇게 다짐하는 사이 베카모레의 주의가 이어졌다.
“전격계의 능력은 치명적인 무기다. 그러니 사소한 감정으로 함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할 거다. 공격당한 사람은 분명히 죽게 될 테니까.”
공격당한 사람이 죽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자신이 가진 초능력이 꽤 무섭게 다가왔다.
혹시 능력을 제어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닐까?
사람들을 지키는 건 좋지만 가능하면 이 능력을 사용하고 싶지 않아.
아무리 상대가 적이라고 해도. 살인이라니.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안티플릭이 된 후라도 플리커를 쓰러뜨린 다음 붙잡아 감옥에 가두려고 했던 거지 죽여 없애겠다는 생각을 했던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이 능력을 써야 하는 날이 오지는 않을까?
그것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날이 곧 다가오게 될지도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게 지금 당장의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잠시 일어서서 멍하니 고민을 하고 있던 존이 비틀거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심한 출혈을 일으킨 뒤라 그런지 어지럼증이 밀려왔던 것이었다.
네키는 비틀대는 존의 몸을 붙잡고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좀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 고마워.”
그 말에 존 역시 공감하고 있었다.
하무란에게 입었던 공격의 데미지와 함께 심각했던 출혈의 피해가 회복되기 전까지는 얌전히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베카모레에게 이야기하고 떠나는 동안 잠시 걷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괴로움이 느껴졌다.
계속해서 어지러움과 현기증이 몰려왔던 것이다.
정말이지 몸 상태가 엉망이었다.
겨우 한 번의 전투로 이 정도의 치명상을 입게 될 줄이야.
만약 하무란이 비 능력자가 아니라 안티플릭 같은 초능력 전투원이었다면?
상상하기도 힘든 끔찍한 결과를 치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베카모레가 제 때에 공격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하무란이 전격을 맞고 죽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목숨을 건 싸움이라는 건 아직 어린 소년인 존에게 너무 이른 것일지도 몰랐다.
상대는 모두 전투의 전문가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렇게 자신의 눈앞에 닥쳐 있는 현실을 느끼며 존은 방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간 뒤에는 조금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취하던 도중 자신이 쓰러져 있는 동안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궁금했던 존이 넷에 접속해 정보를 찾아봤다.
하지만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엄청난 변화들과 사뭇 다른 느낌에 머릿속이 뒤숭숭해졌다.
그러던 중 한 가지 눈에 띄는 기사를 발견했다.
플리커에게 살해당한 소년.
대략 삼 일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플리커에게 살해당한 소년이라니?
존은 그 불길해 보이는 내용의 소식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확인하지 못하는 사이 누군가가 플리커들에게 살해당하기라도 했다는 건지 진실을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생각지도 못한 내용의 말들이 적혀 있었다.
리버트 인근의 야산에서 베일런서 라즐을 습격하고 도주하던 플리커 무리에 의해 18세 소년이 살해당했다는 내용의 이야기.
이건 아무리 봐도 자신에 대한 내용의 이야기였다.
내가 플리커들에게 살해당했다고?
존은 플리커에게 살해당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을 살해하려고 했던 건 라이시스이지 않았던가?
믿기지 않는 이야기들 속에서 밴디를 살해한 라이시스는 오히려 영웅이 되어 있었다.
충격이었다.
밴디를 살해한 라이시스가 영웅?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안티플릭은 그동안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속여 왔던 건가?
이런 상황 속에서 존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자신이 플리커들에게 살해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떻게든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과 자신을 살해하려고 했던 사람은 플리커가 아니라 안티플릭의 라이시스였다는 걸 알려야 했다.
존은 무작정 밖으로 나가 집으로 향하려 했다.
그런데 돌아간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상태였다.
어떻게든 돌아갈 방법은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막상 돌아간 뒤에 가족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난감했던 것이다.
자신의 말을 제대로 믿어줄지도 의문이었으며 안티플릭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가족들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으로 머뭇대는 사이 존의 앞에 베카모레가 나타났다.
“여기 나와서 뭐하고 있는 거지?”
막 치료를 끝낸 상태라 몸도 좋지 않을 텐데 바깥을 서성거리는 모습은 조금 의아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나 뒤이은 존의 말에 어렵지 않게 그 행동을 납득할 수 있었다.
“제가 플리커들한테 살해당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 사실은 베카모레 역시 알고 있는 것이었다.
안티플릭이 자신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방송을 통해 가짜 정보를 푼 것이었다.
하지만 존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밴디의 클라스크를 이어받고 플리커가 되려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그들이 제대로 인지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베카모레는 존의 상태를 진정시키려 했다.
상대가 뭐라고 떠들던 간에 현재의 상황에 집중하면서 앞으로의 일에 대비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 말을 신경 쓸 필요 없다. 그 말처럼 진짜로 죽은 것도 아니지 않나?”
베카모레의 말처럼 아직 자신이 죽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 걱정됐다.
존은 그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그래도 가족들은 제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 아니에요?”
가족들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은 갑작스럽게 이 일에 휘말린 것이었으니까.
“가족들에게는 따로 얘기해두겠다. 지금은 몸을 회복하는데 전념하도록.”
베카모레의 말 덕분인지 조금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앞으로 있을 문제들이 해결된 것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가족들에게 말은 전해질 거라는 생각에.
하지만 이 일은 그렇게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닐지 몰랐다.
존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해 들은 것은 그의 가족들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듀란은 존이 플리커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커다란 절망감을 느꼈다.
플리커들에 의해 자신의 친구인 존이 살해당했다니?
이 사실은 절망감을 넘어 거대한 분노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곧 헤어날 수 없는 엄청난 크기의 증오심이 되어 밀려왔다.
처음에는 단순한 의무감으로 안티플릭이 되려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존을 살해한 플리커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증오심이 밀려왔다.
그리고 눈물을 참으며 조용히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들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제거하리라.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