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존과 듀란
한참의 시간 뒤 클라스크를 가지고 기지로 복귀한 라즐이 물건을 상부에 넘기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때 본부에서 대기하던 또 다른 베일런서 클록을 마주쳤다.
클록은 마구스가 적의 손에 당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큰 충격을 받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구스가 당했다는 게 사실인가?”
과연 그 말대로였다.
마구스는 적 한 무리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버닝라이트의 베카모레의 손에 당해버린 상황.
이것이 상부에 알려진다면 리버트를 담당하고 있는 안티플릭 부대의 입지가 난처해질 수 있는 일이었다.
지역 내에 파견을 나왔던 베일런서가 적의 손에 살해당하게 되어 버린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것이라면 마구스가 죽기 직전의 상황에서도 부대에 지원요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지원 요청을 하지 않았으니 위험에 처한 마구스를 도우러 갈 수 있었을 리 만무하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상부에서 파견한 인원이 적의 손에 살해당한 이상 그걸 이유로 납득해줄 지는 알 수 없었다.
특히나 마구스는 헤일론의 상급부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바드릭의 소속 부대원이었으니 그 파급력이 얼마나 클지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이 일로 완전히 열받아버린 상급 부대에서 어떤 명령이 떨어질지 생각하면 난처함이 밀려오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라즐은 떨리는 목소리로 클록의 물음에 답했다.
“방금 마구스님의 클라스크를 회수해서 부대에 인계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마구스님이 당하셨을 줄이야. 적은 대체 누구였던 거지? 적들은 확실히 제거한 건가?”
클록 역시 지금의 상황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설마하니 상급부대의 전투원인 마구스가 당해버릴 줄이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구스가 바드릭의 소속 부대원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그런 마구스의 죽임이 갖는 의미는 안티플릭 내부에서 결코 작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라즐은 클록을 향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존과 베카모레.
통칭 버닝라이트라는 조직을 이끌고 있는 클라스크를 가진 플리커 세력이었다.
원래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정보에 의하면 버닝라이트에 존재하는 위협적인 플리커는 베카모레 한 사람뿐이었지만 모르는 사이에 한 명이 늘어난 모양이었다.
“존 밀리어와 베카모레라는 놈들입니다. 버닝라이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모양인데 아쉽게도 마구스님의 클라스크를 확보하느라 제대로 추적을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놈들이 마구스님을 살해하고 무사히 도주까지 마쳤다니. 이 사실을 바드릭님이 아시면···.”
마구스에 관한 일은 라즐 역시 걱정하고 있던 사안이었다.
불길한 이야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버닝라이트라는 조직은 원래부터 눈에 거슬리던 존재.
상부에서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와준다면 이 기회에 귀찮은 녀석들을 없애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좋은 일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
라즐은 이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가기 위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당장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 상황에서 일을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정보가 필요할 듯했다.
때문에 라즐은 베카모레와 존 밀리어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다.
버닝라이트의 리더이자 베르세다 출신의 클라스크 능력자.
특별히 활용할만한 약점이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추가된 정보가 없는 이미 알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
그러나 새로 등장한 존 밀리어라는 인물은 예상외의 존재.
그에 대해 조사한다면 또 다른 활로가 열릴지도 몰랐다.
존 밀리어. 그에 대해 여러 가지 정보들을 살펴보던 중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그가 안티플릭의 일원이 되기 위해 입단 지원을 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의 주변인물 가운데에 최근 시험에 합격한 듀란이라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사실은 굉장한 흥미를 돋우고 있었고 라즐은 이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갈 생각이었다.
‘존 밀리어와 듀란 프리버. 이 둘의 사이를 조사하다보면 뭔가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라이시스님은 이 사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계십니까?”
결국 리버트 지역을 담당하는 퍼스트 베일런서인 라이시스의 결정이 가장 중요한 상황.
라이시스는 과연 이 사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커다란 문제를 앞두고 라즐은 라이시스의 결정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결정에 따라서 앞으로 자신들의 행동에 향방이 결정될 테니까.
“라이시스님도 곧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실 거다.”
라이시스의 참전.
그것은 플리커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갈림길이 될 수 있었다.
퍼스트 베일런서가 직접 놈들을 처단하기 위해 움직인다면 놈들을 처리하는 데에는 한 순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신은 그저 이 순간을 즐기면서 플리커들을 상대로 조금 놀아주기만 하면 될 일.
라즐은 그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자신만의 계획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 계획이 마음에 들었는지 작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일은 간단하게 처리될 것 같습니다. 그럼 저는 그 꼬마들을 데리고 놀아봐야겠군요.”
클록 역시 라즐의 성향을 알고 있는 듯 함게 웃음을 보였다.
“존 밀리어라는 놈인가? 네가 어떻게 데리고 놀지 기대가 되는군.”
평소에도 플리커들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던 라즐이었으니 이번에 플리커들을 제대로 가지고 놀다가 죽이는 모습을 구경할 좋은 기회였다.
“우선은 듀란이라는 아이를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듀란?”
“최근 입단 시험에 합격한 하급 병사입니다. 아무래도 그 존 밀리어라는 꼬마와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군. 샅샅이 뒤져서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아내도록.”
“존 밀리어와 관련된 내용들을 샅샅이 찾아내겠습니다.”
듀란에게서 얻어낸 정보들로 플리커들을 처리할 생각에 라즐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부터 클라스크는 선택받은 인류인 베일런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 그걸 훔쳐 쓰고 있는 플리커들을 가만히 내버려둔다면 저희들의 특별함을 더럽히는 일이 될 겁니다.”
그 말처럼 베일런서들은 스스로를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라즐은 계속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스스로의 특별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클라스크가 가진 힘은 우주 전체를 뒤져봐도 찾을 수 없는 독특하고 고귀한 능력입니다. 그런 클라스크를 가지고 있다는 건 바로 저희가 이 우주 전체를 지배할 자격이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그걸 공짜로 가져가려 하다니.”
라즐이 손짓과 함게 몇 차례 혀를 차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과연 훌륭한 생각이다.”
클록 역시 라즐의 말에 공감하는 모양이었다.
순수하게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아 클라스크를 이식받는 베일런서와 달리 플리커들은 그저 훔친 클라스크로 초능력을 사용한다.
베일런서인 클록의 입장에서도 그리 좋게 보이지는 않는 일이었다.
라즐의 말처럼 그에 어울리는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클라스크를 이식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클록의 앞에서 다시 한 번 라즐이 큰 소리로 외쳤다.
“감히 하덴 스커님과 함께 우주를 지배할 안티플릭에 대항한 자에게 어떤 최후가 기다리는지 똑똑히 보여주겠다!”
강한 자신감을 보이던 라즐은 그 자리에 서서 커다란 웃음소리를 흘렸다.
왠지모를 불길함이 느껴지는 웃음소리.
존은 이런 커다란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까?
라즐의 꿍꿍이가 아직은 완전하게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존은 베카모레와 함께 본부로 돌아간 참이었다.
여러 문제로 일이 복잡해진 상황.
마구스를 잡아냈다는 것 자체만 놓고 본다면 분명히 좋은 소식이 맞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단순하게 베일런서 하나를 잡아냈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 그것이 불러올 2차적인 문제들을 고민해야 했던 것이다.
안티플릭의 전력을 순간적으로 줄여내긴 했지만 그 줄어든 전력은 금방 다시 채워질 것이고 오히려 마구스를 뛰어넘는 적들을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이런 상황 속에서 플리커로서 일을 풀어나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생존과 전투 그리고 아직 미숙한 자신들의 실력으로 이 모든 일들을 헤쳐 나갈 수 있을지 의문만을 남겨둔 채로 기지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생각지 못했던 의외의 인물들이 존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살아 있었구나? 존!”
“엄마?”
존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당장 부모님의 품에 달려가 안긴 존이 북받치는 감정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을 가족들.
그리고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알릴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낀 존이 서로를 붙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살아 있었구나, 정말 다행이다. 존.”
“바로 얼마 전에 깨어나긴 했지만 전 괜찮아요. 이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있고 아프지도 않아요.”
“그러게 그런 데를 왜 가서는···.”
과거 밴디를 만나기 위해서 무작정 달려 나갔었던 일.
그 일이 시작이 돼 지금의 상황까지 온 것이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안티플릭은 자신이 생각하던 정의의 세력이 아니었다.
지금은 플리커가 된 것이 오히려 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말도 없이 떠나서 죄송해요.”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자신이 플리커가 된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한 생각이 들기는 했다.
플리커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받게 되는 대우와 차별 그리고 맞이하게 될 수많은 위험성들을 다 알고 계실 텐데.
만약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다면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바로 조금 전까지도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면서 살아 돌아온 것이었지만 당장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괜히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이야기해야 할 일.
존은 지금이 자신이 플리커가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할 좋은 타이밍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고생했으니까 이제 집에 가자.”
자신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려 하는 어머니.
너무나도 그리웠던 손길이었다.
마치 그 손을 붙잡고 따라가면 이전처럼 모든 게 평화로웠던 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그걸 알고 있던 존은 힘겹게 그 손을 뿌리치고 이제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 이제 돌아갈 수 없어요. 플리커가 되기로 결정했거든요.”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니?”
예상대로 부모님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으셨다.
그 걱정과 놀람이 섞인 모습으로 존의 아버지가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플리커가 되기로 결정했다니?”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전 이제 플리커가 돼서 사람들을 위해 안티플릭과 싸울 생각이에요.”
존의 말에 아버지가 크게 놀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안티플릭과 싸우겠다니? 대체 무슨 수로?”
클라스크를 가지고 초능력을 사용하는 안티플릭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
그런데 지금 존은 그런 이야기를 입에 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
“제 몸에는 이미 플리커의 클라스크가 심어져 있어요. 거기다가 좀 전에는 안티플릭의 베일런서까지 쓰러뜨린 뒤여서 이제 평범한 일상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요.”
“베일런서를 쓰러뜨렸다고?”
너무나도 충격적인 존의 말이 이어지자 두 사람은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기껏 살아 돌아온 아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폭탄 같은 삶을 살겠다고 나서다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오질 않았다.
그러다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들을 응원하기로 작정을 했는지 글릿이 기합을 넣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안티플릭이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단다. 플리커가 되기로 했다면 차라리 잘 됐구나. 플리커가 돼서 못된 안티플릭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렴!”
“어.. 엄마···.”
글릿의 응원에 힘을 얻었는지 존이 조금 더 밝은 표정이 되어서 이야기했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는 걱정 끼치는 일 없게 잘 할게요.”
힘들게 이야기했던 일에 오히려 응원까지 받게 되니 괜히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조금 걱정을 하긴 했지만 존을 응원하는 건 존의 아버지 유스 밀리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이왕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면 열심히 노력해 보거라. 플리커로서 사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네가 결정한 일이라면 분명 잘 해낼 수 있겠지.”
그렇게 가족들의 응원을 받으며 존은 앞으로의 삶에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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