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맹한 베인 (3) 다인슬라이프(dainsleif)

산길 초입의 어두운 공동묘지.
흉흉한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와 검은 로브를 걸친 남자가 한 무리의 수하들과 함께 말을 달려와 머무르고 있다.
전투의 흔적을 살피던 마법사가 흑의 기사에게 말을 건넨다.
“누군가 도와준 것 같군.”
“응? 스틸 똘마니 놈들은 다 죽였을 텐데?”
“아니... 놈들이 아니다.”
마법사는 흙을 만지며 말을 이어갔다.
“이건... 아무리 봐도 익스플로전의 흔적이다.”
“뭐? 마나 익스플로전? 마법사가 도왔다는 소린가.”
“그것도 최소한 5서클.”
“5서클이면... 별 문제 없잖아.”
기사의 반문에 마법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최소한으로 잡아도 5서클이다.”
마법사는 뭔가 의아한 듯 전투의 흔적을 계속 살펴보고 있다.
“폭파반경으로 봐서는 3서클 수준이다만... 위력은 5서클 이상...”
마법사의 말에 흑의 기사가 의아함을 가진다.
“꽤나 노련한 마법사가 붙었나 보네. 그런데, 그게 딱히 문제가 되나?”
“... 문제는 그걸로 끝이 아니라는 거지.”
“뭔데 그렇게 뜸 들여?”
“마나의 잔향이 없다.”
“뭐?”
마나의 잔향이 없다는 말에 흑의 기사는 표정이 급격히 굳는다.
“마나 익스플로전은 마나가 타고 남은 잔향이 남을 수밖에 없어...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잔향이 남아있질 않아.”
“오러 익스플로전... 아니다. 그건 더 말이 안 된다.”
흑의 기사의 오러 익스플로전이라는 말에 이번에는 마법사가 피식 웃는다.
“시전자를 중심으로 한 구형태의 오러 익스프로전이라...”
“하하하하 그냥 해본 소리야.”
“왜? 차라리 메테오 아니냐고 해보지.”
“어쨌든 결론은 났네.”
“그래. 마탑이다.”
꿀꺽-
흑의 기사는 마른침을 삼켰다.
“마탑에서 베인 놈을 도울 이유가 있나?”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 베인하임이 가지고 있는 던전을 탐내는 놈들이 어디 한둘...”
“.......!!”
흑의 기사와 마법사가 뭔가 생각난 듯 난감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문스톤.....”
마법사가 낮게 읊조린 ‘문스톤’
베인하임에 전해 내려오는 극음의 기운을 담을 수 있는 절대빙정의 이름이다.
“하... 그러게 그냥 배를 가르고 꺼내자니까.”
마법사의 말에 흑의 기사가 무서운 눈으로 마법사를 노려보며 말한다.
“아직은 그냥 빙정 쪼가리일 뿐이다...만월의 씨앗이라는 건 아무도 몰라.”
“후... 이제 알게 되겠지. 마탑을 피해 다닐 이유가 하나 더 늘었네.”
이때 스틸 베인의 무덤 자리를 살피던 은색을 띈 화려한 갑옷 차림의 기사가 건들거리며 흑의 기사에게로 다가왔다.
“베인 놈들... 몸뚱이 하나는 기가 막히는구나. 그걸 회복하고 무덤에서 기어 나왔네.”
“.......”
“뭐 해? 쫓지 않고. 그러게 진즉에 목을 따라니까 말 안 듣더니만. 쯧!”
은색의 기사가 흑의 기사를 다그쳤다.
.......
잠시간의 정적...
“우리는 손을 떼겠다.”
흑의 기사의 말에 은색 기사는 표정이 변해 호통을 친다.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 위약금만 세배다!! 알아?”
“아니, 위약금은 없다.”
흑의 기사 대답에 은색의 기사 표정이 더욱 구겨진다.
“하!! 놀고들 있네. 위약금이 문제가 아니라 주군께서 이일을 아시면 니들 목이 제자리에 붙어나 있겠냐?”
“마탑이 개입되어 있다는 얘기는 없었다. 지금까지 한 일만 해도 돈값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
챙-
은색 갑옷의 기사가 검을 뽑았다.
검에는 검붉은 오러가 넘실거린다.
그리고는 흑의 기사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대었다.
“하여간 이 용병 놈들은 말로 해서는 들어 처먹는 법이 없지?”
“틀렸다, 타산이 맞는 만큼만 의뢰를 수행하는 게 계산이 맞지.”
흑의 기사는 은색 기사의 흉흉한 오러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알지 않나? 내가 충성하는 건 ‘대가’다. 계산이 맞지 않는 의뢰에 목숨을 걸 생각은 없다.”
챙-!!!
흑의 기사가 검을 뽑아냄과 동시에 은색 기사의 검을 반으로 갈랐다.
“그리고 그대도 타산이 안 맞는 상대에게 함부로 검을 들이밀진 말아야지.”
은색 기사가 분노에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어간다.
“이...이 자식이... 기사의 충성심은 계산 따위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 충성이라는 것도 사람을 좀 봐가면서 해야지. 타이런트 같은 개새끼에게 뭘 목숨까지 바치려 드는지 원.”
“다인슬라이프!! 네 이놈!!”
은색의 기사가 잘린 검에서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내며 달려들었다.
흑의 기사 다인슬라이프는 돌진하는 은색 기사의 옆으로 돌아 나갔다.
마치 발레의 터닝을 보는 듯한 매끄러운 동작으로 은색기사의 사이드를 너무나 쉽게 점했다.
서걱-
그리고는 은색기사 흉갑의 작은 틈사이로 몸을 베어냈다.
오러 블레이드까지 뽑아낸 풀 플레이트의 기사를 너무나도 쉽게 두 개의 덩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이래저래 타산이 안 맞는군.”
다인슬라이프는 별일 아니었다는 듯이 검에 뭍은 피를 닦아내며 부하들에게 간단하게 지시를 내린다.
“이놈 이름 뭐였지? 에드가였나? 스틸의 무덤에 이 놈을 묻고 주변 정리들 해라.”
부하 중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한 명이 다가와 다인슬라이프에게 뭔가 말을 건넨다.
“단장, 에드가 놈 갑옷이랑 뭐 이것저것 좀 챙겨가도 되겠나?”
“아후... 피터 아저씨, 에드가는 스틸 베인이 죽인 거야.”
“응? 그게 뭔 소린가?”
“에드가는 스틸 베인이 죽여서 자기 무덤에 숨긴 건데 아저씨가 에드가 갑옷을 어떻게 입고 다녀?”
피터가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렇군. 우린 모르는 거네.”
“그래. 마을에 적당히 예쁜 여자 한 명 죽여서 같이 묻어.”
“응? 여자 시체는 뭐 하려고?”
“에드가는 이 낭만적인 장소에서 사랑을 속삭이다 무덤에서 기어 나온 스틸 베인 손에 죽었거든. 에드가 놈이 여자 꽁무니 따라다니는 거 아니면 혼자 돌아다닐 위인이 아니잖아.”
... 피터가 경외의 눈빛으로 다인슬라이프를 바라보자 다인슬라이프는 비웃음이 섞인 어조로 말했다.
“쓸데없이 죽인 것도 미안한데 낭만적인 이야기라도 만들어 드려야지.”
*****
쿠르르륵 - -
[인간. 이곳에 발을 들일 수는 없다,]
돼지얼굴에 거대한 인간의 몸
게다가 인간의 말까지 한다.
마귀..? 요괴..? 저팔계 같은 건가?
퇴마행을 나가시는 스님과 도사들에게 마귀나 요괴에 대해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접하는 것은 처음이다.
‘마기에 가깝다...’
가문의 집법당으로 압송되어 온 십만대산의 마인들은 본 적이 꽤 있기에 마기가 어떤 것인지는 잘 알고 있다.
기세는 마치 사나운 짐승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호흡의 흐름은 마기에 가깝다...
[쿠륵? 인간. 돌아가라.]
[오크는 오늘 인간 죽일 기분이 아니다.]
[인간 아니다. 자이언트가 오크의 숲에 무슨 볼일인가?]
‘자이언트?’
뭔지 모르겠지만 확 올라오는 게 몹시 불쾌한 기분이 든다. 이 몸의 기억인 건가?’
그나저나 시끄러운 존재들이다.
호흡에 마기가 섞여 있는 탓인지 귀를 때리는 사나운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길을 잃어 이곳으로 흘러들어왔을 뿐이네. 바로 떠나겠네.”
[인간이 오크의 성지를 더럽혔다.]
[인간 아니다. 자이언트. 죽여야 한다.]
[자이언트. 오크의 성지를 뺏으러 왔다.]
자이언트.. 그래 기억에 있다.
아마도 이 몸의 기억이겠지.
안 그래도 자이언트라고 불리니 왠지 기분이 나빴다. 마치 이 몸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한 듯한 모멸감...
“나는 자이언트 같은 게 아니...”
슈웅-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저팔계가 도끼를 던져왔다.
타악-
날아든 도끼를 가볍게 잡아내 줬다.
부법을 따로 배운 적은 없지만 이 몸이라면 이 정도는 얼마든지 낚아채 줄 수 있다.
[자이언트가 맞다.]
[인간, 오크의 도끼 받아내지 못한다.]
[자이언트가 성지를 뺏으러 왔다.]
뭐지? 덤벼 들 기세인데...
7척 정도의 키에 근육량이 많다.
지금이 이 몸보다는 작지만 지금까지 봐 온 어떠한 사람보다도 크다.
‘외공의 고수...’
호흡에 마기가 흐를 뿐 마기를 운용하지는 않는다.
후 우 웅-
앞에 있던 저팔계가 대도를 휘둘렀다.
빠르지 않아 몸을 젖혀 쉽게 피할 수 있었지만 도풍에 앞머리가 휘날릴 정도였다.
“내가 물러나 주면 그대들도 물러나겠는가?”
이 몸뚱이라면 한번 붙어볼까도 싶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와의 싸움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게다가 저들은 수가 너무나 많다 족히 스물 이상은 되어 보인다.
[간교한 자이언트. 믿지 않는다.]
저팔계가 계속 덤벼온다.
어쩔 수 없다.
나도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생각은 없다.
「 호권!! 대호조법!! 」
「 하아앗!!” 」
콰앙!!
오형권 중 호권의 조법이다.
호랑이가 서서 앞발로 상대를 후려치는 형상의 초식.
호권의 기합은 특이하다.
석가모니의 호통인 ‘사자후’만큼은 아니지만 내공을 끌어올릴 수 있다면 마기를 제압하는데 효과가 있다.
‘대호조법’ 딱히 살초는 아니지만 이 몸뚱이로 무공을 펼치면 그 자체로 살초가 된다.
보라. 저 커다란 저팔계가 가슴을 부여잡고 뒤로 밀려났다.
‘응?’
선두에 있던 저팔계가 팔을 뻗어 다른 저팔계들을 막아서고는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다.
툭-
대장으로 보이는 저 저팔계가 무기를 내려놓고는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
[ 그대는 드루이드와 어떤 관계인가? ]
...응? 두... 뭐?
***
오크의 마을로 향하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오크’라 칭했다.
내가 산왕의 드루이드라면 나를 도울 것이고 내가 자이언트라면 나를 죽일 것이라는 솔직한 말로 위협했다.
그들이 대사제와 내가 만나면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라 해 따라나서기로 했다. 그냥 뒤돌아 도망쳐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낯선 산행길에서 짐승과도 같은 이들을 따돌리는 것보다는 이들의 대사제라는 자를 만나보는 것이 살아날 확률이 더 높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가 자이언트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니까...’
내가 전혀 모르는 세상이다.
작은 언행 하나에도 신중한 판단을 거쳐야 한다.
음식이 나왔을 때 의심부터 했어야 한다고 다짐했건만 다짐과는 다르게 음식을 보자 눈이 돌아갔다.
이 몸은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을 굶었던 건지 음식을 보자마자 예절이나 의심은 걷어차버리고 일단 먹어야겠다는 심정으로 음식을 흡입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음식은 보기와 다르게 너무나 맛있었다.
‘어윽! 이건 못 먹겠다.’
[손댄 음식 다 먹어야 한다.]
... 신중했어야 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느낀 것이 한 가지 있다.
‘이들은 나에게 호의적으로 변했다.’
이 세계에서 지내기 위해서는 일단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아야 한다.
그중에 선결되어야 할 사안은 나에게 우호적인 부류와 악의적인 부류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나에게 적대적이었으나 어느 순간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그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
“..... 왜 나에게 이리 친절을 베푸는 것인가?”
[드루이드는 숲을 지켜준다.]
[그대는 산왕의 가호를 받는 드루이드다.]
‘산왕...? 호랑이를 말하는 것 같은데. 용권을 썼으면 난리 났었겠네.’
‘드래곤’.. 용을 생각하니 머릿속에서 더없이 강렬하게 떠오르는 이름이다.
“드래곤 또한 신성한 존재인가?”
[드래곤!! 죽여야 한다!!]
[드래곤을 보았는가?]
[전쟁이다!! 드래곤과 전쟁이다!!]
‘... 물어보길 잘했네.’
[위대한 드래곤 슬래이어!!]
[우와아!! 드래곤 베인!!]
‘응? 드래곤 베인?’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이 북받치는 감정은 뭐지?
분노? 슬픔?... 그리움?
[베인? 그대는 베인인가?]
[드루이드가 베인인가?]
갑자기 뭐지...?
분위기가 달라졌다.
잠깐은 환호하는 분위기이기도 했던 거 같은데...
[오크 베인... 죽인다.]
‘오크 베인?’
[오크보다 크고 자이언트보다 작다.]
[베인이 유일하다.]
[이 땅을 노리는 자다.]
[그대는 오크 베인인가?]
“... 나는 그대들보다 크지 않다네.”
[그대는 오크보다 크다.]
“... 나는...”
뭐지? 정신이 몽롱하다.
긴장이 풀려 피로가 몰려오는 것인가?
이렇게 갑자기?
[이제야 약기운이 도는가?]
오크 무리 사이에서 털이 희끗희끗한 오크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다.
오크들이 길을 터주면서 공손하게 대하는 걸 봐서 이자가 이들의 우두머리인 것 같다.
[강맹하다. 이자는 베인이 맞다.]
“나... 는... 베......”
감겨오는 시선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몽둥이를 들고 나에게 달려드는 오크무리의 모습이었다.
.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