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초출 (1) 사기종인(舍己從人)

이 몸으로 눈을 뜬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오크무리에게서 자이언트로 오해받은 상황이 있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알 수 없는 모멸감과 분노가 솟아올랐었다.
눈앞의 이 남자가 혹시나 베인 일족이 아닌가 싶어 한번 던져 봤을 뿐이건만
‘이건 효과가 너무 과한데...’
셰퍼드라 불리던 이 남자는 분노를 넘어 침통하기까지 한 듯한 표정이다.
“.........”
“.........”
“.........”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도 얼어붙어있다.
‘마치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모든 것을 부정당한 느낌?’
오크에게 자이언트로 오해를 받았을 때를 떠올려 보니 딱 그런 기분이었다.
‘베인의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이었구나...’
너무 늦게 깨달았다.
스틸 베인의 기억과 감정이 조금씩 돌아오면서 이제야 깨달은 사실이다.
“아... 죄송합니다. 저희 신입이 세상물정을 아직 잘 모릅니다. 아니,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하...”
마틴이 서둘러 나서며 애써 변명하기는 했지만 소용이 없는 듯하다.
셰퍼드는 거대한 얼음몽둥이가 된 검을 아무렇지 않게 어깨에 걸쳐 메고는 돌아서서 문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이내 나를 돌아보며 얼음같이 차가운 눈으로 읊조렸다.
“네놈의 대가리는 때가 되면 정당하게 터트려주마.”
조금 전의 흥분된 느낌은 싹 걷어내고 냉정함과 살기만이 남은 기도였다.
아마도.. 대가리를 터트리겠다는 저자의 말은 진심일 것이다.
지금 당장 드잡이를 한다면 분명히 주변의 사람들이 말릴 테니 진짜로 내 머리를 으깨기 위해 지금 한발 물러서는 것뿐이다.
“하... 그런 방정맞은 소리를 해대다니 스틸이라는 이름을 달고 사니 네가 뭐라고 된다고 생각하나 보지?”
프레이아가 본인이 한 짓은 생각 안 하고 뻔뻔한 말을 해왔다.
어른스럽지 못하게 대처한 내 잘못도 있지만 애초에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이 여인의 오만방자함에서 이 사달이 시작되었다.
이 여인이 지체 높은 집안의 여식이라는 것쯤은 짐작이 간다.
아마도 귀족이라는 부류...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가까이하는 것이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아직 판단이 안 선다.
“그래? 그러면 내가 뭐라도 된다고 해보자.”
“뭐?”
“뭐라도 되면 해도 되는 말이었던가?”
“후... 젊은이, 정말 몰라서 그랬던 것 같으니 알아두게. 베인하임의 남자에겍 외지의 사람이 자이언트라고 부르는 건 대단히 큰 모욕이네... ‘베인’의 칭호를 받지 못했거나 칭호를 빼앗긴 베인을 조롱할 때 하는 표현이기도 하니 말일세.”
윌리스 팀장의 차분한 설명에 마틴이 얘기를 거들었다.
“베인들 끼리는 서로 자이언트라 부르긴 하지만... 너처럼 애송이로 보이는 애가 베인을 자이언트라 불렀으니...후... 야... 이거 너를 베인한테서 지켜주려면 고생 좀 해야겠는데.”
이건 좀 의외인데?
마틴이 그 거대한 근육덩어리한테서 나를 지켜주겠다고?
마틴의 마음도 기껍지만 귀족의 여인과 척을 진 것보다도 베인의 위협을 더 큰 위험요소로 인지하는 것을 봐서는 귀족이라는 신분 자체가 그다지 큰 위협은 아니라는 건가?
그나저나 칭호가 없는 베인을 자이언트라고 부른다라... 왜 인생을 부정당한 기분이었는지 알 것도 같군.
‘크게 실수한 것 같기는 한데... 따지고 보면 나도 베인이니까 해도 되는 말이지 않나?’
“어이가 없군. 무식하면 그냥 입이라도 다물고 있었으면 될 것을.”
아비가일이 다시 쏘아붙이듯이 비난해 왔다.
이 어린것은 이 와중에도 본인의 잘못은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구나.
내 따끔하게 한마디 해줘야겠다.
“그대는 전쟁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뜬금없이 뭔 소리야?”
“늙은이들의 명예와 욕심을 위해 충성스러운 젊은이들이 죽어나가는 것이 전쟁이다.”
전생에 장로들 때문에 죄 없는 2대 제자, 3대 제자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무수히 보았었지...
“애초의 그대가 오만방자함을 떨지만 않았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사단이었다는 말이다.”
“뭔.. 뭔 같잖은 소리를 하고 있어? 너 따위에게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어디 있다고...!!”
물론 상황을 대단히 비약해서 얘기했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늙은이가 젊을이를 갈굴 때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지.
대꾸도 못할 만큼 비약해서 입을 닫게 만드는 것.
생전에 병약한 몸으로 가문의 무인들을 갈굴 때 사용하던 내 초식이다.
“너야말로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고 꺼졌으면 될 것을... 내 앞으로 네놈을 지켜보도록 하겠다.”
프레이아가 거의 부들부들 떨 듯이 노려보며 말해왔다.
참... 버릇없이 자란 소저이지 않은가?
아비가 누구인지 심히 궁금하군...
“... 사양하겠네. 그대는 내 취향이 아닌지라.”
***
“아악!!! 짜증 나!!”
화가 잔뜩 난 프레이아가 길에 돌멩이를 멀리 차 보내며 허공에 대고 말했다.
“짝퉁 스틸!! 그 뺀질한 자식은 내손으로 작살을 낼 테니까 셰퍼드는 나서지 마!!”
지위 높은 가문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외모의 영애.
그리고 어린 나이에 6급 모험가가 될 정도의 실력까지.
평생 모욕이라는 걸 당해본적이 없는 프레이아의 눈에는 살기가 감돌았다.
“아가씨. 저는 주군께서 임명한 아가씨의 호위입니다. 언제라도 아가씨의 챔피언(대리 결투인)으로 나설 수 있습니다.”
셰퍼드의 대답이었다.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작은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알지. 그걸 누가 몰라?”
“그 자가 제 손에 죽는다면 그건 아가씨의 손에 죽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프레이아는 잠시 주춤하는가 싶었지만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그래서는 분이 안 풀려. 고트 토벌전에서 놈이 잠시라도 고립되면 내가 놈을 칠 거야. 내가 신호를 주면 셰퍼드는 저놈 동료들 주의나 적당히 끌어 줘.”
.
.
.
‘고트 토벌전’
다이톤 북쪽 ‘거해궁’이라는 유적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농가마을 ‘콘부츠’
옥수수를 대량으로 재배하는 마을이다.
유적에서 벗어난 ‘고트’ 무리가 콘부츠의 옥수수재배에 큰 피해를 주고 있어 마을 차원에서 모험가 길드에 의뢰를 했다고 한다.
꽤나 규모가 있는 부농이라 의뢰금도 컸고 수많은 모험가들이 동원되었다.
보이는 것만 해도 백 명은 족히 되어 보인다.
고트는 염소나 양이랑 비슷하게 생긴 반인반수의 하급 몬스터라고 한다.
웬만한 성인 한두 명이면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다고 하는데 문제는 그 숫자이다.
원래는 유적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몬스터이지만 유적에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수백 마리가 수시로 옥수수밭을 뜯어대니 콘부츠 마을의 사병만으로는 감당이 안되어서 아예 고트 둥지로 쳐들어가 토벌해 달라는 의뢰이다.
“어이 스틸, 난 분명히 말렸다.”
마틴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틴과 아비가일은 이번 토벌전에서 빠지자고 했었다.
이해는 간다.
토벌대의 앞쪽에서 말에 올라있는 저 발칙한 여자는 아직도 수시로 눈을 흘기며 돌아보고 있다.
“그래, 어차피 용돈벌이나 하고 너 경험이나 좀 쌓게 해 주려는 거였어. 그냥 돌아가자.”
아비가일도 마틴의 말에 맞장구를 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우선은 약한 몬스터 무리가 수백 마리라 하니 지금 내 수준을 파악하는 데 더없이 좋은 기회이지 않은가.
또한 이곳 사람들의 무력 수준도 얼추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나와 악연이 생긴 저 거인과 발칙한 소저의 수준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리고 아론에게 배운 ‘아이스볼트’ 이번 전투에서 한번 다듬어 보고 싶다.
이렇게 자잘한 이유만 해도 세 가지나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혹시 사기종인(舍己從人)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사기.. 뭐? 사기 치자고? 우리 그런 건 안 해. 인마.”
마틴 다운 대답이다.
이 친구도 참 알기 쉬운 사람이라 다행이라 해야 할지..
“내 사욕을 버리고 타인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이만한 인원이 힘없는 양민들을 돕기 위해 움직이는데 우리만 빠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틴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뭔 소리야? 돈 벌자고 하는 일인데.”
아비가일은 한술 더 떠서 깔깔거리며 말한다.
“와하하 암만 세상물정 모른다지만 콘부츠 마을은 페닌슐라 통 털어도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동네인데 뭔 힘없는 양민이야? 하하하.”
나는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쟁을 벌이자고 하는 말이 아니니 말이다.
“그러면 더 좋지 않습니까? 협을 행하고 보상까지 얻고,”
같은 업에 종사하는 사람 백명 가까이 모인 무리에게 싸움이 두려워 발을 빼는 모습을 보인다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는 겪이 된다.
이곳에서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은 이상 이만한 몸뚱이로 피할 생각부터 하게 된다면 앞으로 그 무엇도 헤쳐 나가지 못할 것이다.
“나도 모르겠다... 뭐, 전에 하겐용병단한테 한 거 봐서는 너도 한 가닥 하는 거 같긴 하다만 혹시나 난전 중에 저 베인 놈하고 마주치게 되면 그냥 도망가라. 베인을 상대로 도망간 거면 아무도 뭐라 안 할 테니.”
이 까칠하던 사내가 며칠 만에 정이 들어 나를 이다지도 걱정해 준다니 이름 높은 기사가 사사한 가르침은 명문정파 후기지수의 그것과 다름이 없구나.
“아이 씨... 본전 뽑으려면 멀었는데.”
“.......”
“와하하하 스틸, 저 베인 아저씨가 덤비면 그냥 누나 뒤에 숨어. 저 아저씨 미인한테 약한 거 같으니까.....어머, 뭘 그리 빤히 쳐다봐.”
미안하지만 아비가일 너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다.
아비가일의 어깨 너머...
너무나 순식간이라 거리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느꼈다.
어른 키보다 훌쩍 높은 옥수수밭이 넓게 퍼져있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중단전을 개방해 예민해진 기감으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내 평생에 잊을 수 없었던 기도.....
너무나 이질적이고 강렬해 절대 잊을 수 없었던 그 느낌.
‘마기...’
조금 전 느껴졌던 건 분명히 마기였다.
... 어떻게 해야 하지?
우선은 이 무리의 인솔자에게 행군을 멈추도록 해야 한다.
“아비가일, 혹시 이 토벌대의 지휘관 누구인지 아십니까?”
“어머나 스틸, 누나라고 부르라니까. 그렇게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이름 부르니까 누나 설레잖아~~”
아...아비가일... 제발 좀...
“급조한 토벌대라 딱히 지휘관은 없는데.. 흠, 윌리스 팀장님이 그나마 고참이고 등급도 제일 높지 아마? 3등급이던가?”
윌리스 팀장... 프레이아 옆에 있던 사제복장의 남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어, 스틸! 이 타이밍에 윌리스 팀장님을 만나러 간다고?”
“야, 임마!! 안 보여도 셰퍼드는 윌리스팀장 근처에 있어!!”
뒤에서 마틴과 아비가일이 소리치는 게 들리기는 했지만 나는 사람들을 비집고 행렬의 앞쪽으로 올라갔다.
제발 그 덩치랑 마주치지만 말자고 생각하며 나아갔지만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틈을 타서 사과라도 하러 온 건가? 제법 머리를 굴렸다만 나에 대해 너무 모르는군.”
‘하... 이 남자는 이 커다란 덩치로 어떻게 내 기감에 걸리지도 않고 다가오는 건지...’
“그대에게는 내가 말실수를 한 것 같으니 사과할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쉬이 사과를 받아줄 성격으로는 안보이더군.”
“잘 알면서 뭐 하러 왔나? 혹시나 그 뺀질한 얼굴로 아가씨라도 달래 보라고 동료들이 부추기던가?”
이 남자 생긴 것과 다르게 달변일세.
사람 신경 긁을 줄도 알고.
“어, 뭐야 싸움난 거야?”
“저 친구들 길드에서부터 티격태격하더니만 끝난 거 아니었어?”
“둘이 빠지라 그래. 토벌 시작도 하기 전에 분위기 망치게 뭐 하는 거야?”
“베인 일족한테? 자네가 가서 한번 말해보게.”
“에이... 그건 좀..”
여기저기서 웅성임이 번졌다.
그나저나 행렬의 앞쪽에 있던 이 덩치가 멈춰 선 덕분에 행군이 멈추었다.
절반은 성공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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