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라딘 (2) 바포메트(baphomet)

서-걱--
한 마리의 ‘판’이 고립되어 있던 한 마법사에게 달려들어 순식간에 마법사의 목을 베어냈다.
이 마법사의 연산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다.
판이 이어서 근처에 있던 이안 파르코에게 내달리자 이안 파르코의 오른손 중지에 있던 반지가 하얀빛을 내뿜는가 싶더니 손에서 터져 나온 ‘홀리 볼트’가 날아가 판의 몸을 태우며 밀어냈다.
우--웅--
반지가 계속 빛을 발하자 이안 파르코의 오른손 전체가 어느새 하얗게 빛을 머금고 있었다.
“홀리 펀치!! 하하하 이건 좀 아닌가?”
이안 파르코는 판에게 달려들어 판의 거대한 몸통에 사정없이 주먹질을 해댔다.
신성력이 인첸트 된 이안 파르코의 주먹에 맞은 판의 몸은 어느새 잿더미가 되어 퍼져 가고 있었다.
‘ 파---------아-------’
최전방. 스틸이 가장 먼저 달려 나갔던 방향에서 신성력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은 끔찍했다.
스틸의 발밑에 있던 판이 고깃덩어리가 되어 사방으로 터져나간 것이다.
‘악마를 밟아 죽였다...?’
이안 파르코는 의아했다. 스틸에게서는 성유물은 고사하고 신성력이 부여된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하급악마라지만 악마를 밟아 죽이는 건 베인이나 자이언트도 불가능하다.
그리고는 스틸은 다른 판을 향해 또 달려들었다.
달려 나가는 속도가 포트리스의 웬만한 기사보다 빠르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 항마연환선퇴 」
발길질에 신성력이 터지면서 판이 산산조각이 난다는 것이었다.
‘일반 공격이 효과가 적다더니 파마의 기운을 담은 공격에는 더 취약한 것 같군... 뭔가 인과관계가 적용되는 것일까?’
잠깐의 내 교만 때문에 네 명이 죽었다.
다섯 마리의 판 중에 내가 둘을 죽였고... 이안 파르코가 어느새 판에게 공격 당하고 있던 프레이아에게 합세해 지금 두 마리째를 사냥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이름 모를 한 명의 마법사와 아비가일이 판을 상대하고 있었고 아비가일의 검은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다행히 꽤나 실력이 좋은 마법사인 듯하다. 아비가일의 검에 신성력을 부여하면서 본인도 공격마법을 쏟아냈고 아비가일이 상처 입으면 힐까지 뿌렸다.
나는 나머지 고트들을 손쉽게 처리했다. 왜인지 고트들은 나에게 덤벼들지도 도망가지도 못하고 낑낑대고 있으니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 아이스볼트 」
얼마 안 남은 고트들을 정리하며 아비가일 쪽으로 다가가고 있지만 상념이 떠나지를 않고 있다.
‘나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되었을 네 명이 죽었다...’
마지막 남은 판이 아비가일의 검에 쓰러지자 아비가일의 검에 신성력을 부여하고 있던 남자가 공손한 인사를 건네왔다.
“대지의 신 ‘어시스’님을 모시는 ‘어스 체임벌린’이라고 합니다.
‘윌리스와 같은 ‘사제’라는 부류인가...’
응? 그러고 보니 윌리스는 어디에 있지?
윌리스는 ‘레인저’들이 있는데 왜 사제와 마법사가 정찰을 나가야 하냐면서 노발대발했었다.
분명히 정찰대로 나와 있어야 할 윌리스가 안 보인다.
“토벌대에 ‘팔라딘’이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팔라딘...
무엇인지 알고 있다.
드래곤 베인에 대한 감정만큼이나 강하게 일렁였으니까...
소림의 나한무승이나 무당, 곤륜 같은 도가문파의 도사들 중에서도 퇴마행에 특화된 사람들이 있다.
생전에 나한무승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이곳에서 눈을 뜬 후 드루이드, 마탑... 몇 가지 알 수 없는 오해를 사게 된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이건 맘에 드는데...’
내가 나한무승이라니...그것도 퇴마사...
“네.. 네놈이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안다.”
스틸의 뿌듯한 표정을 보면서 프레이아는 생각했다.
‘자기 말을 따르지 않아 이런 사태가 벌어지게 됐다는 걸 내심 즐거워하고 있구나... 교만한 놈... 팔라딘이었으면 진작에 팔라딘이었다고 밝힐 것이지... 하여간 기사라는 것들은...’
프레이아도 짐작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 많은 인원을 함정으로 인도했다는 것을... 그리고 스틸이 했던 말을 곱씹어보고 있었다.
‘늙은이의 명예와 욕심을 위해 충성스러운 젊을이들을 희생하는 것...’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본인의 욕망을 위해 백명이 넘는 사람을 함정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에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암투와 계략, 묘략... 책에서 보거나 이야기로만 들어보았던 것을 몸으로 경험해 보니 치가 떨리는 모멸감과 공포가 밀려들었다.
하지만 스틸의 저 태도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교만한 놈!! 악마의 존재를 확신했다면 그대가 무리를 이끌었어야 했지 않은가!!?”
“교만... 그래, 안 그래도 나의 교만을 반성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어린 계집이 아픈 곳을 파고드는구나...
“웃기는 소리 마라. 넌 분명히 웃고 있었다.”
“이쁜이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여기 좀 돕지.”
사자후에 당해 쓰러져 꿈틀대던 고트들을 처리하던 프레이아가 우리를 중재했다.
“아니네, 하던 거 하시게. 이쪽은 다 끝나가네.”
두 팔을 양쪽으로 뻗고서 돌아다니던 이안 파르코의 말이 끝나자.
수십 마리의 고트에게서 불길이 솟았다.
“이렇게 하면 마나를 더 아낄 수 있지. 술식을 몬스터의 인에 심어 두고 한 번에 발화시키는 거네.”
이안 파르코가 엄청난 광경을 만들어 내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털며 다가왔다.
“아무래도... 윌리스 사제가 가장 의심스럽겠지.”
누군가를 함부로 의심한다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라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나 또한 의심스러운 사람이 있다.
“그... 그렇지 않을 겁니다. 윌리스 사제님이 세속적인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은 아닙니다.”
“세속적인 것과 사리사욕이 다른 건 또 무언가?”
“그... 그것이...”
이 소저가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하긴, 조금 전까지 동료라고 믿고 등을 맡기던 사람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면 믿어지지가 않겠지.
더군다나 윌리스는 신을 모시는 사제... 그것도 ‘현자’라던가? 꽤나 존경받는 위치의 인물이었으니 그런 사람이 백 명이 넘는 사람을 함정으로 끌어 들었다면 보통 일이 아니겠지.
내 생각이 맞다면 아비가일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네 생각이 맞네. 윌리스는 아니네. 아마도 근처 어디선가 전전긍긍하고 있을 거네.”
“네? 그게 또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건 윌리스한테 듣도록 하게. 원래 현자라는 자들은 아는 것이 많은 만큼 쓸데없는 걱정도 많은 사람들이라.”
지금까지 보아왔던 정황만으로도 이 이안 파르코라는 사람은 분명히 범상치가 않다. 괜히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자, 결정하도록 하세. 조금이라도 시간이 있을 때 후퇴하고 다음을 기약하겠는가? 아니면 결계가 걷힐 때까지 기다리겠는가?”
“저는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체임벌린 사제가 먼저 의사를 밝혔다.
“여러분들도 동료분들의 수급은 나중에 수습하시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아니... 사제라는 자가 이리도 측은지심이 없단 말인가? 지금 저곳에 백여 명이 살심에 뒤덮여 있는데 자리를 뜨겠다는 말인가?
정적을 깨고 이안 파르코가 입을 열었다.
“결계가 걷혔을 때 저 안에 살아있는 사람은 몇 없을 거네.”
“....!!”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을 말해 줬지만 그건 모두의 희망을 꺾는 말이었다.
“리버스펜타그램 안에서는 신성력이 무효화되고 저주는 강화되거든. 아마도 저 안에 있는 악마는 ‘바포메트’... 상급의 악마 중 하나라... 저들로는 힘들 거네.”
“신성력이 무효화된다고요? ..마틴..."
“아비가일... 마틴은 무사할 거야.”
“그렇지? 도망가지 않을 거지? 스틸? 우리 마틴 구해야지.”
마틴은 무사할 거다...
‘흉수는 마틴이니까...’
작은 단서이지만 윌리스가 후퇴를 주장할 단초를 제공한 건 마틴이었다. 그리고... 그 한마디에 ‘현자’라는 남자의 판단이 이상하리만치 흐려졌다.
‘외부의 힘이 작용했다.’
이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자, 스틸군 왜 마틴이 무사할 거라 생각하지.”
“.......”
“대답하기 곤란한가?”
이안 파르코의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이들과 지낸 건 고작 며칠이다.
이 세계에서 눈을 뜬 후 어디에 비할 바 없는 큰 도움을 받은 은인 같은 사람들이지만 이들에게 딱히 정이 든 건 아니다.
얼마든지 의심하고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마틴과 아비가일은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 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혹여나 연인일 수도 있다. 연인이었을 수도 있고.
아비가일 앞에서 마틴이 흉수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파르코씨께서는 당신이 바포매트에게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체임벌린 사제가 이안 파르코에게 물었다.
“흠... 놈이 리버스펜타그램을 다시 소환하지 못할 만큼 힘이 빠지고... 몇 분이 도와주신다면 쫓아버리는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상급악마 운운하더니만 맞붙어 싸울 수 있다고?
“아, 누구 하나는 마틴이라는 친구를 맡아준다면 말이죠.”
아비가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결계가 아직 걷힐 기미가 안 보이는 걸 보니 셰퍼드라는 친구가 선전하고 있는 듯하군. 첫 번째 문제는 해결된 듯합니다.
프레이아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마... 마틴이 왜? 그게 무슨 말이죠?”
“ ‘비교적 고트의 공격이 뜸한 남쪽으로 퇴로를 잡고 후퇴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 길가에 옥수수나무들 때문에 여기가 되레 안전지대처럼 느껴지고 있거든.’ 마틴이 했던 말이었죠.”
... 나야 수십 년을 소림 장서각에서 필사를 맡으며 기억력을 키워 왔다지만 이안 파르코 이양반도 기억력이 보통이 아닐세.
“아니 그 말이 왜...?”
“숲에 나무를 숨기는 것이네. 악마들이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지. 이때 윌리스에게 언령을 심었을 거네. 남쪽으로 가야 한다고.”
“.......”
“아마도 전투가 일어나기 얼마 전에 마틴에게 바포메트가 스며들었을 것이고.”
아비가일의 뒤편으로 잠깐 동안 느꼈던 마기.
가깝지 않은 곳에서 느껴졌다 생각했건만 바로 코앞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니... 나는 정말 멀어도 한참 멀었구나.
“그.. 그렇죠? 마틴에게 악마가 씌운 거죠? 이 교활한 악마... 마틴... 마틴은 무사할까요?”
아비가일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아마도 그전에 마틴과 바포메트 사이에 거래가 있었을 거네.”
“아니... 그럴 리 없어요.....”
이안 파르코의 입이서 아비가일이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나왔다.
아비가일이 침통한 표정으로 읊조리자 어느새 프레이아가 다가가 아비가일의 어깨를 안아주고 있었다.
‘동병상련인가...’
불과 조금 전까지 프레이아는 본인이 믿고 의지하던 사람을 의심했었다.
지금 아비가일의 마음을 가장 이해하는 것은 프레이아일 것이다.
‘의외의 구석이 있군.’
“아무리 악마라도 주인의 허락 없이는 몸을 잠식할 순 없지. 이걸 악마와의 거래라고 부르더군. 유감이네.”
이 세상도 참 잔인한 세상이구나. 아비가일의 표정을 보니 내 마음도 찢어지는 듯하다.
“흠... 소드 유저 상태가 이러니 전위에 설만한 사람이 마땅치 않군...어떻게 한다... 아, 체임벌린 사제께서는 떠나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후... 제가 빠지면 여러분들 모두 자리를 뜰 거라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곳이 제 무덤이 된다면 이게 다 ‘어시스’님의 뜻이겠지요.”
호오... 사제가 현자가 된다더니 그런 생각이었구나.
“파르코님 말씀이 맞다면... 마틴은 제가 상대하겠어요. 그래야 해요.”
“기각이네.”
이안 파르코... 단호하구나.
“소드 유저가 악마와 거래를 했다면 무엇이겠나? 아마도 저 결계가 걷히면 나오게 되는 건 ‘오러 유저’ 마틴일 거네.”
“.......”
“마틴은 스틸이 맡고, 아비가일, 자네한테 그 정도 각오가 섰다면 차라리 바포메트한테 한방 먹일 생각을 하게.”
‘짝- 짝- 짝- 짝- 짝-’
진법 안에서 한 남자... 저걸 남자라고 해야 할지... 여자라고 해야 할지... 아니, 인간이 맞기는 한 건가?
[ 와우~ 쉬트!! 계집들만 살려 놓으라 했는데 이렇게나 많이 살아남았을 줄은 몰랐네요 ]
진법에서 나온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존재가 환호성을 지르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우-드-드-득-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진법이 우리를 향해 덮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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