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여행 (1) 강호지신(江湖之神)

[ 내 팔에 무슨 짓을 했길래 재생이 안 되는데!!? 이 새끼야 ]
마틴이 거대해진 눈을 번뜩이며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쳤다.
이건 마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바포메트의 기괴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아비가일을 한번 돌아본 셰퍼드는 윌리스에게 다가갔다.
“사제님 이 자에게 기도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셰퍼드가 부탁하자 윌리스가 다가와 마틴의 이마에 손을 대고 기도를 시작했다.
“악마는 한 번 들어갔던 몸에는 언제든지 다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보통은 은으로 된 단검을 어깨나 허벅지 같은 곳에 찔러 넣죠.”
"......."
“그래서 되도록이면 가족이나 친우분들은 만나지 못하도록 격리하는 겁니다.”
묶인 사람한테 칼을 밖아 넣는다니... 나는 이 곳의 사람들이 야만인인지 문명인인지 가늠이 안 된다.
마틴을 바라보던 셰퍼드는 정중한 말투로 나에게 물어왔다.
“기사님."
.. 기사님?
"기사님은 리버스펜타그렘 안에서 어떻게 신성력을 발휘하신 겁니까?”
셰퍼드 얘는 또 왜 이래? 불과 몇 시간 전까지는 나를 죽이겠다던 인간이...
“기사님이 모시는 신을 모신다면 저도 가능합니까?”
응 갑자기...? 개종이 이렇게 쉬운 거였어?
“진심입니까? 셰퍼드 씨의 신념에 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셰퍼드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다.
“저의 신념은 악마를 처단하는 것뿐입니다. 신념에 어긋나지 않은 선택이 될 겁니다.”
“데몬 베인의 칭호 때문은 아닙니까?”
역시, 뭔가 ‘꿈틀’하는 게 느껴진다. 그깟 칭호가 뭐라고...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인생의 뚜렷한 목표가 있다는 건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지요. 하지만 염려스러운 건 셰퍼드 씨의 말처럼 악마의 속삭임은 갈망을 파고든다는 겁니다.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신념을 바꾸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걱정 마. 셰퍼드 종교 없어.”
프레이아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좋은 말이긴 한데 너는 말을 좀 비약해서 하는 경향이 있단 말이지. 늙은이같이.”
너는 사람 신경을 거스르는 경향이 있고. 고약한 계집 같으니...
“내 호위 임무를 수행하느라 가르침을 다 받지 못해 수련이 모자라다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었지. 셰퍼드에게 도움을 준다면 내 너에게 큰 상을 내리겠노라. 원하는 것을 말하라.”
뭔 흉내를 내는 게냐?... 프레이아는 오른팔까지 쭉 뻗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가 뭘 원할 줄 알고?”
“... 나는 안 된다. 나는 이미 혼인 한 몸인지라.”
내가 그런 것까지 알 필요가 있니...?
“말했다시피 소저는 내 취향이 아니라네.”
“그럴 리가? 그렇다면 그대의 취향을 한 번 말해보게.”
“굳이 취향이라면... 조금은 성숙했으면 싶군.”
내가 이걸 왜 대꾸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젊고 아름다운 소저와 이런 사담을 나누는 것도 나름 즐거운 것 같아 대화를 이어갔다.
“아! 함께 다니던 아비가일 씨? 흠... 그런 사이였던가?”
나는 혹시나 아비가일이 듣고는 너스레를 떨까 겁이 나 한번 돌아보고는 프레이아에게 말했다.
“아니라네.. 조금 더 올려보게.”
“..... 자네 보기완 다르게 위험한 사내였군. 서책에서 보았네. 변태라고 하던가?”
하... 그래 이 와중에 이 무슨 쓸데없는 시간낭비인가 싶은 생각에 오늘 함께 싸웠던 사람들의 시신들이나 수습할까 싶어 일어났다.
“응? 한창 흥미진진한데 왜 자리를 뜨지?”
“..... 잠도 안 올 것 같아 함께 싸웠던 사람들의 시신이라도 수습할까 싶어 가보려 하네.”
“그냥 두게 ”
근처에서 사담을 듣고 있었는지 이안 파르코가 말해왔다.
“악마와 관련 된 사건이라 성왕청에서 나올 거니 그냥 두게. 지들도 밥값은 해야지.”
“흠..흠.. 밥값이라니... 성왕청의 조사관들이 현장을 조사해야 하니 현장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성왕청의 다이톤 지부에서 나올 테니 내일 점심 전에 다 끝날 겁니다.”
***
“그러니까... 생명의 젖줄인 강과 호수를 관장하시는 신이시고... 이름은 따로 없고 강호라 불리신다... 이 말씀이신 거죠.”
졸지에 내가 사랑했던 무림강호가 이곳에서는 신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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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나절이 지나 성왕청의 조사관들이라는 무리가 이곳에 당도했다.
이름이 알려진 이안 파르코와 두 명의 사제 그리고 신원보증이 있는 프레이아나 아비가일은 별다른 조사 없이 넘어갔다.
데몬헌터인 셰퍼드야 뭐 말할 것도 없었고... 조사관들이 상관 대하듯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달랐다.
“스틸 아이스만 씨 10급이시더군요. 기사님이시라면 5급이나 4급으로 시작하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따로 이유가 있으신가요?”
“음... 몰랐습니다. 제가 모시는 분은 많은 분들이 모시는 분이 아니시라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번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게 된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 몸의 기억인 듯한데 내 머릿속에서 ‘종교재판’이라는 것만큼은 피해야 한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그러시면 혹시 기사 서임은 안 받으신 겁니까? 흠... 상황이 조금 곤란한데요. 일단 저희와 같이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곤란한 상황인 것을 눈치챘는지 셰퍼드가 다가왔다.
“기사님의 성력은 이미 데몬헌터인 본인과 어시스를 모시는 체임벌린 사제님이 목도했네. 신원보증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설 테니 이쯤에서 마무리하게.”
“저... 저도 곤란하네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고...제 권한 밖이라.....”
나를 면담하고 있던 조사관이 뭔가 곤란한 듯했다. 중원에서도 마교에 대해 민감하듯 이곳은 악마라는 존재에 많이 민감한 것 같다.
“그러면 이 참에 아예 성왕청으로 가서 서임을 받으면 어떤가? 내 듣기로는 자네 정도면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네, 그건 가능합니다. 심문을 한 달 정도 유예하는 것은 제 권한에서 가능합니다. 대신에 한 달 내에 출석하지 않으시면..."
'응?... 왜 머뭇거려? 뭐가 있나?'
"외람되지만 재산은 성왕청으로 귀속되고 수배령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재산? 있지도 않은 재산을 무슨... 수배령은 좀 무섭긴 하네..
어쨌든 윌리스가 해법을 내놓았다.
이 것이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지금으로서는 판단이 서진 않지만 팔라딘이라는 것이 이 사회에서는 꽤나 존중받는 존재인 건 짐작해 볼 수 있다.
후광효과... 이 상황을 나에게 유리하도록 이끌어 간다면 내가 눈을 뜬 이 몸, 스틸 베인의 은원을 해결하고 내가 다짐한 의협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시면 신상명세만 간단히 기록하겠습니다. 성함은 스틸 아이스만... 모시는 신은 어떤 분이신지요?”
응? 내가 모시는 신. 일단 나는 불자이니 석가모니를 말해야 하나? 분명히 누구냐고 물어볼 텐데 그렇게 되면 설명하기 너무 힘든데.
내가 아는 바로는 체임벌린은 대지의 신... 윌리스는 태양의 신...
“....... 강호. 생명의 젖줄인 강과 호수의 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아, 호수의 신, 란슬롯의 팔라딘이셨습니까? 아니다. 강의 신, 나일의 팔라딘이시려나?”
“강과 호수를 관장하시는 이름 없는 신이십니다. 저희는 그저 강호라 모시며 기도를 올립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젖줄인 강과 호수를 관장하시는 신이시고... 이름은 따로 없고 강호라 불리신다... 이 말씀이신 거죠.”
졸지에 내가 사랑했던 무림강호가 이곳에서는 신이 되어버렸다.
“어이구.. 지금 등록된 신만 해도 백이 넘는데... 서류 작업을 또 해야 되네.”
셰퍼드에게 종교를 바꾸는 것은 신념을 바꾸는 것과 같다고 잔소리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건만... 개종을 넘어서 종교를 만들어 버리게 되다니.
“강호의 팔라딘, 스틸 아이스만... 예, 알겠습니다. 한 달 뒤에 오셔서 확인받으시고 이번 사건의 의뢰금과 포상금을 찾아가시면 됩니다.”
..... ‘강호의 팔라딘 스틸 아이스만’이라니... 중원으로 표현하자면 ‘무림맹의 멸마대주 화양연우’인 거잖아... 어이가 없네. 내가?
“뭘 또 그렇게 멍하게 히죽거리고 있나? 돈 얘기 들으니까 들떠? 하여간 윌리스 사제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신을 모신다는 사람들이 쯧쯧...”
프레이아가 다가와 내 즐거운 망상에 훼방을 놓았다. 이 처자는 쓸데없이 이죽거리는 경향이 있다.
“내 분명 그대에게 관심 없다 하지 않았는가? 쓸데없는 관심은 삼가해 주게.”
“무.. 무슨 거지같은 소리를 하는 게냐? 윌리스 사제님의 말을 전달하러 왔을 뿐이다. 그리고!! 신을 모신다는 기사가 이렇게 사회성이 없어서야!! 관심이 있건 말건 사람이 말을 걸면 대화할 줄도 알아야지!! 누군 뭐 퍽이나 한가해서 말 건 줄 알아!!!”
프레이아가 얼굴까지 뻘게져서 따지고 들었다. 하긴... 신경을 거스른다 해도 젊은 처자한테 할 말은 아니었다 싶기는 하다.
“미안하게 되었네.”
“아우. 씨!! 더 짜증 나!! 윌리스 사제님한테나 가봐!!”
고얀...것...성깔머리 하고는.
“셰퍼드 씨, 그대의 아가씨는 늘 저럽니까?”
왠지 셰퍼드가 근처에 있을 것 같아 말하자 역시나 허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 보통은 아가씨께 기사님처럼 대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
윌리스 사제는 성왕청까지의 여정을 본인과 함께 하기를 권했다.
성왕청은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도보로는 나흘에서 닷새는 걸릴만한 거리라 한다. 다이톤으로 돌아갔다 가면 하루는 더 걸릴 테니 이곳에서 바로 출발하자고 했다.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 거절은 고사하고 든든하기까지 하다. 한 가지 아니 두 가지만 제하면 말이다.
“프레이아와 셰퍼드 씨가 함께 간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성가시긴 하다만 납득은 간다. 이들은 원래부터 일행이었고 내가 이 일행의 수행길에 동행을 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성왕청에 딱히 볼일도 없으시다면서 굳이 왜?”
“이런 무지한!! 마탑의 메이지께서 동행을 해주신다는데 엎드려 절을 드리지는 못할망정 이유는 물어 뭐 하겠느냐? 혹여 네가 메이지의 의중을 듣는다 해도 그 깊은 뜻을 이해나 하겠느냐?”
프레이아... 이 고약한 것이 또 언성을 높였다.
이안 파르코가 마탑의 메이지라는 것은 조사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밝혀졌다. 마탑이라는 존재가 ‘마법을 사용하는 지체 높은 집단’이라는 것은 대충 유추해 볼 수 있었지만 저 고약한 프레이아가 웃어른 모시듯 깍듯하게 모시는 걸 보니 생각보다도 대단한 집단인 것 같은데... 내가 저런 집단의 한 사람이었다고 오해받았던 것이 새삼스럽다.
“별 거 아니네. 내가 자네한테 호기심이 좀 동해서 그런 거니 별 걱정 말게 우리가 원래 궁금한 건 못 참는 사람들이라 그러네.”
걱정 말라고? 걱정이 되는데. 그 혈교주 같은 작자와 마주했을 때보다도 더 걱정이 되는데.
그리고 걱정이 되는 건 또 있다. 아비가일...
“아비가일 내가..”
“아, 걱정 말고 다녀와. 팀에 무려 ‘팔라딘’이 생긴다는데. 자자, 이건 여비에 보태고 스틸, 지금 돈 가진 거 하나도 없잖아.”
아비가일은 마음을 좀 추스른 건지 예전의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나 싶었던 것도 잠시...
“동료를 잃는 게 처음도 아니고...”
그래... 친우에게 배신당하고... 떠나보내고 하는 것이 어디 하루아침에 마음에서 털어낼 일이겠는가? 나 또한 어릴 적이나 나이를 먹어서나.....
‘하기사 내가 생전에 친우라 부를만한 사람이나 있었나...’
잠깐 상념에 잠겨있던 사이 셰퍼드가 커다란 마차 하나를 몰고 오자 조금 전 나와 말을 나누던 조사관이 셰퍼드에게로 달려갔다.
“이 마차는 우리가 좀 빌리겠네.”
“저... 이 마차는 성왕청 다이톤지부의 재산이라... 제가 빌려드리고 말고 할 권한이 없습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가? 그리고 어차피 목적지는 성왕청이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조사관은 곤란한 듯 허둥지둥 지필묵(紙筆墨)을 꺼내 셰퍼드에게 내밀었다.
“그러시면... 서류라도 한 장 간단하게 작성해 주십시오....”
셰퍼드는 커다란 손에 먹을 쏟고는 종이에 그대로 찍어서 조사관에게 내밀었다.
“내용은 자네가 알아서 적게. 난 글을 모르네.”
이렇게 새로운 일행들과의 짧은 여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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