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여행 (3) 아테니아(athenia)

“스틸 베인의 무덤이 파헤쳐졌다는구먼.”
“응? 애초에 죽은 게 아니라던데. 죽은 척하다가 무덤을 파고 나와서 도망친 거라는데.”
“에이~ 스틸 베인이 죽은 척을 했겠어? 애초에 못 죽인 거야. 타일런트가 허세 부리려고 헛소문을 낸 거지.”
처음 가보았던 이 땅의 객잔인 ‘두 마리 종마’ 여관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 그리고 목이 터져라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람들.
아무래도... 거친 남자들이 많이 모이는 도시라 그런지 활기가 넘치다 못해 복잡하기까지 하다.
중단전을 개방해 청력이 높아진 탓인지 사람들의 대화소리를 엿들을 수 있었는데 여기저기에서 ‘스틸 베인’에 대한 얘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스틸 베인... 무인들 사이에서는 꽤나 이름이 높은 자였던 걸까?’
“스틸 베인이 퍼플시티의 처녀를 납치해서 못된 짓을 하고 죽였다는구만.”
“응? 건 또 뭔 소린가? 타일런트 밑에 있는 기사커플을 죽였다는 얘기는 내 들었는데 그게 그 짓 하려고 그랬던 겐가?”
컥!!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프레이아 양이 자네한테 화가 나 방에서 안 나오는 걸 고맙게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네.”
프레이아와 다툰 걸 내심 탐탁잖게 생각하던 윌리스가 프레이아가 이 자리에 없는 걸 다행스러워하고 있다.
그렇겠지... 젊은 처자가 들을만한 이야기는 아닌 듯하니...
“기사님도 대단하십니다.”
프레이아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러 갔던 셰퍼드가 옆에 앉으면서 얘기했다... 뭐가 대단하다는 거지?
“아가씨가 저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나게 한 사람은 제가 모셔온 4년 동안 기사님이 처음입니다.”
나는 내심 놀랐다. 저 안하무인 프레이아가?
“기사님의 이름 때문에 더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셰퍼드. 말을 아끼게.”
셰퍼드의 말에 윌리스가 바로 반응했다... 왜 저러지?
이름? 스틸? 프레이아는 열일곱 살 때부터 베인하임에서 살았다... 결혼을 한 몸이다...
스틸 베인과 깊은 관계? 그렇다면 이 몸이 프레이아의 이름이나 모습에 반응을 안 했을 리 없지 않나? 혹시나 프레이아의 가족과 스틸 베인이 어떤 은원관계가 있는 건가?
“아이스만 군. 자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나?”
파르코...하여간 틈을 보일 수가 없네.
“사람들 대화에 ‘스틸’이라는 이름이 자주 언급되어 엿듣고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랑 이름이 같다 보니.”
“흐음, 저게 들린단 말인가?”
파르코가 능글맞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저거 지금 분명히 나를 놀리고 있는 거다.
“저 헛소리들이 어찌 무인의 귀에 안 들리겠습니까? 사제인 내 귀에도 이렇게 잘 들리는데. 경박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쯧쯧”
“그렇지요? 하하하”
나를 놀리고 있는 게 맞구나.
우당탕-
“스틸 베인이 그럴 리가 없잖아!!”
“없기는 뭐가 없어! 이 자식아! 놈이라고 뭐 퍽이나 다를 거 같아!!”
“놈? 노옴? 대공전하한테 놈이라고?”
우당탕-
스틸 베인 때문에 젊은 남자들 사이에서 싸움까지 났다.
그런데 대공전하?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래, 이건 기회다. 이 분위기면 뜬금없진 않을 거다.’
“스틸 베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기에 싸움까지 나는 겁니까?”
나는 셰퍼드와 윌리스를 돌아보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자네 진짜 특이한 사람이구만. 정말 수련에만 매진했나 보네. 젊은 남자 중에 스틸 베인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니 별일일세.”
허... 그 정도였어? 이거 또 잘못짚었나 보군...
“베인하임의 군주이신 드래곤 베인의 아드님이십니다.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현재 재위를 물려받으실 분이시죠. 저에게는 주군이십니다.”
“제국이 무너지고... 정통성이 남아있는 공작가문은 드래곤 베인 가문, 스칼렛 가문 둘 밖에 안 남았으니 페닌슐라에서는 가장 높은 사람 중에 한 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이건 또 뭔 소리야...? 대충 드래곤 베인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눈치챘지만 뭐? ... 베인하임의 군주? 내가? 형제 없어? 숙부는? 그런 사람이 홀로 만신창이가 돼서 생매장을 당했었다고?
“그렇다고는 해도 베인이 권력을 휘두른다거나 권위를 내세우는 집단은 아니네. 되레 권세를 부리는 건 스칼렛 가문이 심하지.”
“흠... 베인은 딱히 권위를 내세울 필요도 없겠지. 지나가는 곳이 다 쑥대밭이 되니.”
마탑이 베인을 싫어한다는 건 눈치챘지만 저 신중한 이안 파르코가 저런 말을 한다고? 더군다나 베인인 셰퍼드가 앞에 있는데?
“농담이네 셰퍼드. 여기저기 들리는 주군의 뒷담화에도 평정을 유지하기에 프레이아 양의 호위 때문에 그런가 싶어 궁금했네.”
셰퍼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 특기는 암살입니다. 그 말씀을 안 하셨다면 밤에 찾아뵈려 했습니다.”
“하하하. 미안하네. 내 말했지 않나? 내가 호기심을 못 참는 사람이라 미안하게 됐네. 대신 저녁은 내가 거하게 살 테니 마음 풀고 음식이나 더 주문하게.”
이 양반들이 뭔 농담을 이렇게 살벌하게들 해대. 심장 약한 사람은 저녁도 같이 못 먹겠네.
지금까지 은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척을 있는 듯 없는 듯 감추고 있던 셰퍼드가 겉옷을 벗고는 근육을 부풀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가만히 서있었다.
잠시 오른쪽으로 보았다가
잠시 왼쪽으로 보았다가...
싸움을 하던 사람들은 싸움을 멈추었고 정신이 없던 객잔 안이 조금씩 조용해질 즈음 셰퍼드와 객잔주인의 눈이 마주쳤다.
“음식을 좀 내오게. 가장 맛있는 요리로. 많이.”
낮고 굵지만 큰 목소리가 객잔에 울렸다.
우리가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객잔 안에서는 더 이상 스틸 베인의 이름은 들리지 않았다.
***
“이게 뭐냐?”
빙당호로(冰糖葫芦) 천상의 맛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전생의 나는 먹을 수 없었던 음식이다.
천음절맥인 나에게 차가운 음식은 독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요리와 함께 나왔던 과일을 몇 개 챙겨서 설탕물을 묻혀 프리징으로 얼렸다.
“사과의 의미네. 내 점잖지 못했네.”
사실이다. 내가 이 아이를 미워할 이유가 없다.
나는 생전에 여인을 멀리했었다.
그것이 단순한 친분을 다지는 거든 남녀 간의 관계에서든 한결같았다.
나의 자격지심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동정 섞인 눈빛도, 혐오스러운 눈빛도 모두 싫었다. 나를 밀어내기 전에 내가 먼저 밀어냈었다.
하지만 조카뻘이나 되겠나 싶은 이 아이에게 어른인 내가 그래서는 안 됐다.
게다가 이 아이는 스틸 베인과 무언가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것이 원한이던 인연이던 나는 이 아이에게 친절할 의무가 있다.
“센스 하고는... 사과의 의미라서 사과인 건가? 반짝반짝 예쁘네,”
다행히 프레이아는 접시를 엎거나 하지는 않았다.
“잠깐 들어올래?”
뭐? 이 야심한 밤에?
혼인을 올렸다 하지 않았나?
이 몸이 잘생겼기 때문에?
왜? 고작 빙당호로 몇 개에?
이 땅의 관습인가?
과일에 의미가 있는 건가?
“... 아니네. 야심한 밤에 어찌..”
“하하하 농담이다. 들어오겠다고 하면 접시로 얼굴을 깨........”
프레이아의 얼굴이 급격히 굳었다.
내 뒤에 분명히 무언가 있다.
무얼 봤기에 이리도 놀라는가?
나 또한 쉽사리 고개가 돌아가지가 않고 있다.
나는...? 나는 무엇을 느꼈기에 나 또한 이리 긴장을 하게 되는 건가?
“아테니아 님을 뵙습니다.”
어느새 나타난 셰퍼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 베인이 있다 하여 와 봤는데."
목소리가 들리자 소름이 돋아났다.
내가 분명히 들어 본 목소리다.
"네년은 본가로 돌아갔다 들었건만 이런 곳에서 밀회를 즐기고 있었던 겐가?”
‘어디서 들었지?’
기억 속의 목소리가 아니다.
내가 분명히 들어 본 목소리다.
저벅.. 저벅.. 저벅,,
나와 프레이아 사이로 걸어 들어왔다.
지금의 나보다 크다...
6척이 넘는 키에 근육질 몸
그리고... 여인이다.
우드득-
이 여인이 빙당호로를 집어 들어 입에 넣어 씹었다.
“달달하구먼 아주 달달해. 달달하게 잘 지내고 있나 봐.”
이내 나를 돌아보았다.
뚫어질 듯.. 정말 얼굴이 뚫어질 듯이 빤히 쳐다보았다.
“너... 아주 기분 나쁜 얼굴을 가지고 있구나.”
프레이아와의 첫 대면의 기억이 떠올랐다. 프레이아는 대뜸 나에게 기분 나쁜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니...
이름에 이어서 얼굴까지 기분 나쁘다는 말을 들었다.
생전에나 지금이나 여인들을 날 왜 이다지도 기분 나빠하는지...
응? 눈앞에 무언가 나타났다.
퍽-
정신이 멍하다.
아니, 간신히 서있기는 하지만 순간적으로 정신이 날아갔던 듯하다.
나는 지금 호신냉기를 전신에 두르고 있다. 그 호신냉기를 뚫고 들어 온 충격이 이만큼인 거다.
“어라? 안 쓰러져?”
두 번째 주먹이 날아왔다.
‘지금의 상태로는 못 피한다.’
「 사량발천근(四两拨千斤) 」
힘의 차이가 날 때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하는 초식.
나는 날아오는 주먹을 장권으로 밀어 흘려나간 힘을 역으로 잡아당기며 사권의 만부투신... 상대를 업어 메치는 초식으로 이어갔다.
「 만부투신(挽負投身) 」
파- 앙-
내 내공과 상대방의 오러가 충돌했다.
상대방은 만부투신을 뿌리치고 물러났다.
“너 제법 하는 놈이었구나.”
빙글빙글 웃는 표정으로 투기를 끌어올리는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요동을 친다.
분명히 이 몸에게 강한 기억이 있는 여인이다.
바포메트를 만났을 때보다도 더 큰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여인이 투기를 끌어올리자 셰퍼드가 여인의 앞으로 뛰어 들어와 이 여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을 했다.
“아테니아 님 이분은...”
퍼-억-
“이 자이언트 새끼가 누구 앞을 가로막아.”
퍼-억- 퍼-억-
셰퍼드의 배를 발로 걷어차 자빠트리더니 발길질을 해대며 소리쳤다.
“오해십니다. 이 분은 성왕청의 팔라딘이십니다.”
“... 그래서 그걸 뭘 어쩌라고?”
퍼-억- 퍼-억-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발길질을 계속 해댔다.
「 전질보(箭疾步) 」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소림 심의파의 보법 상대방과의 거리를 단숨에 좁히는 전질보를 펼치며 여인에게 금나수를 뻗어 다리를 잡았다.
여인은 내가 팔라딘이라는 말을 들어서인지 바로 손을 쓰진 않고 나를 쳐다만 보고 았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듯하오. 우리는 솔라를 모시는 윌리스 사제와 마탑의 메이지 이안 파르코 님과 함께 성왕청으로의 동행을 하고 있을 뿐이오.”
여인은 내 손을 뿌리치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며 말했다.
“누구랑 동행인지 뭔지는 안 궁금하고.”
프레이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저 년을 보면 그냥 빡이 쳐서 말이지.”
저벅. 저벅. 저벅,,
그리고는 다시 내게 다가왔다.
퍼-억-
여인이 발길질에 셰퍼드의 턱이 크게 흔들렸다.
“니가 대신 맞아. 이 새끼야.”
나는 여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만하시오.”
여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자식이...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만하고 사과하시오.”
“뭐?”
여인은 같잖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대가 누구인지는 내 알 바 없고 셰퍼드와 프레이아에게 사과하시오.”
“하... 씨, 떨거지 같은 것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가지가지한다. 진짜...”
후- 웅-
싸늘한 표정으로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여인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못 피한다.
내 수준으로는 사량발천근으로도 흘리지 못한다.
「 철포수(鉄布袖) 」
철포수, 옷소매에 내력을 넣어 방패처럼 활용하는 초식이다.
내 옷이 승려의 옷소매처럼 넓지는 않아 방어할 수 있는 범위는 좁지만 주먹질은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다.
철포수를 펼쳐 여인의 주먹을 막았다. 임기응변이었지만 효과는 있었던 듯하다.
왜냐면 여인이 강기를 뽑아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퍼-억- 퍼-억-
여인의 강기가 실린 주먹에 내 철포수가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반탄기(反彈氣)를 펼칠 수는 없다.
내 경지에 강기를 상대로 반탄기를 펼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셰퍼드나 프레이아가 휩쓸릴 수도 있다.
「 용조수(龍爪手) 」
오형권 용권의 용조수.
방어만으로는 이 여인을 물러나게 하지 못할 것 같아 알고 있는 유일한 조법(손톱을 사용하는 무공)인 용조수를 펼쳤다.
내 내공으로는 강기가 실린 주먹을 버티지 못한다.
가주님은 조법을 보고 ‘여인들처럼 할퀴면서 싸우는 게냐?’며 면박을 주시기도 했었지만 조법으로 내공을 손끝에 집약하지 않으면 저 강기를 막아 낼 수 없다.
파-앙- 파-앙-
강기가 실린 여인의 주먹과 내 조법이 수없이 맞부딪혔다.
퍼-억-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지만 시간이 자날수록 여인의 주먹이 내 얼굴에...
퍼-억-
명치에...
퍼-억-
또다시 얼굴에...
퍼-억- 퍼-억- 퍼-억-
머리가 울린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정신이 점점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테니아 공녀. ”
이안 파르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녀께서도 피 많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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