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지의 마녀 (3) 구배지례(九拜之禮)
셰퍼드와 단둘이 성왕청을 나와 마녀의 숲을 향했다.
거리는 남쪽으로 50킬로 정도 거리라 말했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자 도보로 약 하루거리라 말했다.
말을 타고 가면야 편하겠지만 마녀의 숲은 말이나 마차로는 가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마녀의 숲에서 나오는 기운 때문에 짐승들이 가까이 가려하지도 않는 데다 늪지가 많고 나무들이 빽빽해 말이 들어간다 해도 움직이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이유였다.
“그러고 보니 전에 말을 탔더니 말이 녹초가 되더군요.”
“베인을 태울 수 있는 말이 많지는 않습니다. 샤이어가 최고이지만 농가에서 볼 수 있는 더치드래프트나 포트리스에서 기병들이 종종 사용하는 클라이즈데일도 탈만 합니다.”
셰퍼드가 친절히 설명해 주면서 뭔가 머뭇거린다.
“언젠가 베인하임으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파르코의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냥 스틸 베인의 고향으로 돌아가 솔직하게 기억이 없다고 상황을 얘기하고 도움을 받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베인하임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영주의 아들이 행방불명이니 아무래도 조용하지만은 않을 텐데요.”
“대공자께서는 오년 전 그러니까 공자님이 열다섯 살 되던 해부터 이미 실종상태셨습니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열두 살에 스틸 베인의 칭호를 받으신 후 삼년 정도 베인하임 던전의 공략을 시도하시다 계속 실패하셨습니다.”
“.......”
“힘이 모자라니 수련을 하겠다며 성을 떠나신 그 후로 계속 연락이 없으셨습니다.”
나... 아니 스틸 베인 이놈도 보통은 아니었구나...
"가끔 소문이 들려오긴 했었습니다. 주로 누구를 죽였다거나 유적에서 난동을 부렸다는 등의 사소한 이야기 들이었습니다."
사소한 이야기..? 그게 왜 사소한 이야기야?
"어린 시절 모습이 남아있어 대공자님인 걸 알아보았지만 제 기억 속의 대공자님과 지금 앞에 계신 대공자님은 너무나 다른 사람 같아 놀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되레 선친이신 영주님을 많이 닮으셨습니다."
... 그렇겠지... 내 나이가 아버님에 더 가까울 테니.
“그리고 지난달에 타이런트 공작님이 대공자님의 사망을 공표했었습니다.”
결국은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이것이다.
내가 직접 겪었고.. 무덤을 파고 나왔으니까.
중요한 것은 목적이 무엇이었고 내가 죽은 이유가 무엇이었냐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내 누이가 어떻게 나오게 될지.
“타이런트는 뭘 근거로 내가 죽었다고 단정했을까요? 혹시... 스틸 베인을... 그러니까 저를 죽인 게 타일런트입니까?”
나는 내 누이의 손에 생매장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 누이와 타일런트의 관계... 그리고 내 고향 베인하임의 분위기를 알고자 셰퍼드에게 물었다.
셰퍼드는 왠지 무언가 고민하는 듯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저는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대공자님을 죽인 건 데몬 베인님이라 생각했습니다.”
“데몬 베인이라면 셰퍼드 씨의 스승님이나... 아버님 되시지 않습니까?”
“제 숙부님이시며 스승님이십니다. 드래곤 베인 영주님이 돌아가시고 일 년 넘게 베임하임의 영주 자리가 공석이었으니까요.”
데몬 베인이라는 자가 베인하임의 이인자인 걸까? 내 누이는 자격이 없나? 다른 형제들은 없는 건가?
“타일런트 공작님은 드래곤 베인 영주님의 둘도 없는 친우분이셨습니다. 아테니아 공녀님을 끔찍이 아끼시기에 공녀님이 베인하임의 영주자리에 오르도록 지원하고 있지만 외부에서 보는 평가와는 다르게 데몬 베인을 지지하는 베인들이 더욱 많습니다.”
“외부에서 보는 것과 베인하임 내부사정은 다르다는 얘기입니까?”
“타일런트 공작님은 법왕청의 건립을 추진할 만큼 세력도 강력하고 야심가이시기도 하니 외부에서는 공작님이 베인하임을 차지하려 하는 것처럼 비치겠지만 데몬 베인은 이를 이용해서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데몬베인 가문은 베인 치고는 정치를 좀 하는 가문이라...”
흠... 데몬 베인이던 내 누이이던 내가 죽기만을 바라고 있었겠구나. 내 누이는 직접 움직였고... 데몬 베인은? 데몬 베인도 나를 노리고 있었으려나?
“대공자님이 죽음이 전해지기 전에도 데몬 베인을 지지하는 세력과 아테니아 공녀님을 지지하는 세력 그리고 가장 많은 세력인 스틸 베인님의 귀환을 기다리는 세력 이렇게 세 가지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제 죽음으로 인해 저를 지지하던 세력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대공자님의 죽음이 처음 전해졌을 때 대공자님의 귀환을 기다리던 세력 또한 많이 나뉘었다고 합니다만 죽음이 거짓이라는 소문이 다시 돌고 있으니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스틸 베인의 귀환을 바라는 세력이 가장 많았다는 걸 보면 정통성을 우선에 둔다는 말일 텐데... 아테니아보다 데몬 베인의 세력이 더 많다는 걸 보면 데몬 베인이 생각보다 훌륭하거나... 위험한 인물 일 수 있다는 거겠지.
“지금 상황에서 대공자님이 베인하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래... 이안 파르코도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피바람이 불거라고.
“베인의 칭호를 받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전대 베인에게 승계자로 인정을 받아 계승을 하거나...”
하거나...?
“죽여서 빼앗는 겁니다.”
“.......베인의 칭호를 빼앗긴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대공자님은 현재 유일한 계승자십니다. 이런 말씀 죄송합니다만 무시무시한 드래곤 베인이 아니라 스틸 베인이 드래곤 베인의 칭호를 계승한다면 공녀님과 데몬 베인님이 손을 잡고라도 공자님과 공자님을 지지하는 세력을 몰살시키게 될 겁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춰 하늘을 바라봤다.
‘하, 내가 살아있는 옥쇄였구나.’
스틸 베인의 은원... 이곳에서 협을 행하고 협을 전파하는 것...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최우선에 두어야 하는 것은 생존이었구나.’
“셰퍼드님도 데몬 베인을 지지하실 텐데요?”
“저는 대공자님을 지지합니다.”
셰퍼드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데몬 베인과 제 아버님과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조력자셨습니까? 경쟁자였습니까?”
궁금했다. 엄청난 강자라고 알려진 드래곤 베인과 베인하임의 이인자는 어떠한 관계였을지.
“경쟁자라니요? 어림도 없는 얘기입니다. 조력자도 감히 언급하기 힘든 관계입니다.”
응? 조력자도 경쟁자도 아니었다고?
“충신이셨습니다.”
아...
“셰퍼드님...”
셰퍼드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를 위해 데몬 베인이 되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어떤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 것 같다. 내가 보여줬던 파마(破魔)의 초식들을 본 이후로 태도가 급변하였으니.
“제가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놀래라... 셰퍼드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
"제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그렇다면 약속드리겠습니다. 그 자격.. 제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
우리는 목적지인 ‘마녀의 숲’에 도착하기 한식경(약 두 시간) 거리 남은 곳에서 자리를 잡고 야숙을 하기로 했다.
밤에 마녀의 숲에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니 이곳에서 푹 쉬고 해가 뜨면 마녀의 숲에 들어가자는 셰퍼드의 의견이었다.
나는 이 기회에 셰퍼드에게 가르침을 내릴까 고민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셰퍼드님은 오러를 ‘베니쉬’ 스킬에 다 쏟아 붓기 때문에 오러에 여유가 없다... 이 말씀이신 거죠?”
“예. 그렇습니다. 베니쉬가 원체 오러의 소모량이 많은 데다가... 그리고 신성력을 아직...배우지도... 각성도...못..해서..”
셰퍼드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셰퍼드는 자신의 배움이 깊지 못한 것을 못내 창피해하고 있다.
“호위 임무 때문에 배움을 다 받지 못했다는 얘기는 프레이아에게 들었습니다. 아, 프레이아 호위 임무를 주군께 받았다 하셨는데 주군이시라면 데몬 베인이나 드래곤 베인께 받은 임무 십니까?”
그러고 보니 프레이아는 어떤 연유로 베인의 남자를 호위로 거느리게 된 걸까?
“드래곤 베인 영주님께서 내리신 임무입니다.”
잠시 뜸을 들였던 셰퍼드는 말을 이어갔다.
"영주님께 임무를 내려주시지 않았다면 어차피 데몬 베인님의 손에 제거될 상황이었습니다."
후계자 문제의 갈등이거나 배움을 따라오지 못하는 후계자 후보에 대한 처벌이려나? ... 어느 쪽이어도 비정하구나.
"데몬베인 가문의 사정인 것 같으니 캐묻지 않겠습니다. 아버님은 어째서 프레이아에게 베인을 호위로 붙이신 겁니까?"
...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프레이아 아가씨께 직접 듣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가능성은 두 가지이다.
내 아내이거나.. 내 새어머니 이거나..
둘 중에 어느 한쪽이라도 나에게는 낭패이지 않은가?
스틸 베인의 기억이 반응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된다. 열다섯에 집을 나와 연락도 없었다고 하니...
셰퍼드도 내가 뭔가 눈치챈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차라리 끝까지 모르는 체하는 것이 속은 편할 것 같지만 나중에라도 프레이아가 내 정체를 알게 된다면 배신감이 많이 들 텐데...
확실한 건 모른다.
내 예상이 틀리기를 바라자.
“말이 좀 샜습니다만...”
셰퍼드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무림인들이 왜 사승관계(師承關係)를 그다지도 중히 여겼는지 알 것 같다.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니까... 만약에 셰퍼드가 이후에 나를 배신하게 된다면 나는 큰 적을 내 손으로 만드는 꼴이니까.
“저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또다시 셰퍼드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
나는 구배지례(九拜之禮) 중 계수배(稽首拜 군신,부모,사제 사이에 윗사람에게 올리는 격식)를 알려주고 셰퍼드에게서 계수배를 받았다.
“앞으로 하대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어린놈이 하대하겠다는데... 바로 감사하다는 말이 나오네.
“내 너에게 기를 흘려 넣을 테니 진기의 흐름을 기억하고 또 기억해 숨 쉬듯이 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셰퍼드에게 진기도인(眞氣導引)을 하기 위해 등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낯선 상황에 당황스럽기도 할 터인데 셰퍼드는 내가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잘 따라왔다. 하긴... 그래야지. 내 그대의 염원을 이뤄주는 것인데.
나는 기를 흘려 넣어 셰퍼드의 혈맥을 뚫어가며 일 주천 하여 기를 단전으로 갈무리했다.
셰퍼드의 선천진기를 끌어내 단전을 구축하려는데...
...!!
겪어 보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심장... 셰퍼드의 심장에서 기가 폭발하듯 퍼져 나오고 있다.
‘오러?’
색목인들이 말했던 ‘오러 코어’라는 것이 뭔지 알 것 같다.
오러 코어는 오러를... 다시 말해 내공을 만들어 내는 기관인 것이다.
나는 뿜어져 나오는 셰퍼드의 오러를 급하게 혈맥에 돌리고 셰퍼드의 단전을 구축해 가며 단전에 갈무리해 주었다.
하지만...
나의 진기에 반응한 셰퍼드의 오러 코어는 폭발적으로 오러를 뿜어냈다. 내 얕은 깨달음으로는 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뭐냐? 이 엄청난 내공의 방출량은?’
베인이 왜 그리 강한 존재로 인식되는지 알 것 같다. 스틸 베인의 몸만 해도 혈맥도 단전도 광활했었다.
‘흡성대법(吸星大法)...’
음기가 쌓이면 사기가 되고 결국은 마기가 된다.
나는 앞으로 상대해야 될 적들이 악마라는 걸 인지하면서 생각해 낸 위험한 대법이다.
내가 익힌 구음심법은 음기와 내공 사이의 치환이다.
구음심법으로 마기를 내공으로 치환해 흡수한다면 악마를 상대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먼 기억 속에서 흡성대법의 구결을 찾아냈지만 아직 실행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야 한다.
이대로면 우리 둘 다 주화입마에 빠지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내 인생에 주화입마에 빠지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하다.
마치 천무지체라도 되듯이 원하는 족족 초식을 해내 보인 스틸 베인의 몸 아닌가?
「 흡성대법(吸星大法) 」
슈-우-우-욱-
“으 아아악!!”
손바닥이 불타는 듯 느껴지더니 어느새 얼어붙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짜 사기적인 몸뚱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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