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의 성지 (1) 신탁(神託)

베빌리우스의 사제...
발람이 말하기로는 ‘마녀 그레모리’
스틸은 여인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어머나... 민망스러워라...”
그레모리의 입에서 나온 말과는 다르게 얼굴에는 전과 다름없이 교태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스틸 베인으로 돌아오면서 몸집이 커지니 옷이 다 찢어졌었다.
음기를 얼려 중요한 부분만 가리는 갑옷을 만들어도 되었겠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라고는 짐승들과 오스브레이커들 뿐이었다.
알몸의 스틸은 왠지 모를 해방감이 들기도 했고... 마기가 걷혀가는 숲의 기운이 나쁘지 않아 지금까지는 그대로 두었었다.
스틸은 약간의 수치심과 민망함에 음기를 얼려 하의에 갑주를 만들었다.
“그냥 두시어도... 됩니다... 무릇 제왕은... 창피를 몰라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허언으로 나를 휘두르려 하는구나... 이 여인이 진정 발람이 말했던 대로 마녀가 맞는 걸까?’
“그레모리... 여기까지 다 예상하고 저지른 일인가? 우리를 가지고 논 것인가?”
그레모리는 여전히 눈웃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가지고 놀다니요... 소녀 섭섭합니다.”
그레모리가 셰퍼드에게로 손을 뻗어 뭔가 주문 같은 걸 중얼거렸다.
스틸은 순간 셰퍼드에게 뭔가 수작을 걸려는 건가 싶어 몸을 던지려 했지만 전에 느꼈던 알 수 없는 선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셰퍼드의 초점 없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스... 스승님께서 왜 그런 차림으로 제 아내와....?”
‘아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역시나 환술에 걸려있었던 걸까?’
...환술? 어째 발람이랑 그레모리가 하는 방식이 비슷하다.
셰퍼드는 어리둥절해하며 자신의 품에 있던 썩은 통나무와 우리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더니 무언가 잘못된 것을 알아차렸다.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통나무를 집어던지며 자신의 검을 뽑았다.
“네...네 이년 서큐버스였던 겐가? 스승님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정신을 빼앗겼던 듯합니다. 저년에게서 떨어지십시오.”
몽마(夢魔) 서큐버스... 사람의 꿈에 나타나 정기를 뺏어가는 하급악마.
“어머나... 서큐버스라니요?... 사제지간에 나란히 소녀에게... 섭섭한 말씀만 던지십니다...”
셰퍼드의 흉흉한 검이 코앞까지 왔음에도 그레모리는 여전히 여유를 부리며 말을 이어가고 있다.
“제가... 본 미래에 셰퍼드님은 안 계셨답니다...”
그레모리는 무슨 말인지 의아하기만 한 스틸과 셰퍼드를 돌아보며 말을 이어갔다.
“해서 외로우실까 싶어... 제가 함께 해 드렸는데... 저로는... 만족스럽지... 않으셨나 봅니다...”
“다...닥치시오.”
어떤 환상에 빠졌던 건지 얼굴이 빨개져 당황해하는 셰퍼드이지만 스틸에게 의문점은 다른 것이었다.
예언... 환각... 발람의 방식과 유사하다.
이 여인은 발람과 관계가 있는 걸까? 아니면 베빌리아의 힘인가?
그레모리가 스틸을 돌아보며 싱긋 웃는다.
“베빌리아님의 권능이랍니다...예언과 허락... 갈망에 대한 허락...”
갈망에 대한 허락...? 뭔 소리야?
“갈망을 알고 싶으면... 마음을 엿보아야... 겠지요...”
... 낭패다... 이 여인은 마음을 읽는구나.
여전한 눈웃음을 머금은 채 그레모리가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잠시... 빌리겠습니다...”
그레모리가 내 손을 잡아왔다.
그리고는 내 손을 부드럽게 지나 내 손에 있던 발람의 내단을 어루만졌다.
“베빌리아님의... 정수입니다...”
발람의 내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베빌리아의 정수...?
스틸은 베빌리아의 정수를 그레모리에게 건넸다.
‘순순히 넘겨도 되나?’
미심쩍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상황이... 그리고 느낌이 베빌리아의 정수를 그레모리에게 넘기는 것이 옳다고 느껴졌다.
“베빌리아님의 가장 큰 권능은 정화의 힘입니다.”
정화의 힘은 단순히 사특한 것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선한 기운은 더욱 깨끗하고 강력한 신성력으로... 마기는 더욱더 순수하고 강력한 마기의 힘으로 증폭시키는 것이 정화의 힘이다.
이 숲 전체에서 느껴지는 마기는 발람이나 오스브레이커의 힘이 아닌 베빌리아의 힘으로 증폭된 마기였다.
그레모리는 베빌리아의 정수를 품에 안은 채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솨아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인의 교태로운 몸짓과 행동이 천박하기까지 하다고 느꼈었건만 기도를 올리는 왠지 모를 성스럽기까지 한 모습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스승님 자리를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으.. 응?”
눈길을 떼지 못하던 사이 그레모리의 발밑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수원지라더니... 무슨 말인가 했더니 진짜 수원지였어?’
스틸은 그레모리를 깨워서 함께 나가야 하나... 잠시 망설였지만 그레모리의 저 의식을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셰펴드만 함께 공터를 벗어났다.
공터를 걷다 보니 그레모리의 발밑뿐 아니라 공터 전역에서 물이 솟아나고 있어 물은 어느새 발목 높이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제자야, 네 아내를 구해서 함께 가지 않아도 되겠느냐?”
이번 일이 어느 정도 끝나간다고 느낀 스틸은 셰퍼드에게 농을 던졌다.
“죄.. 죄송합니다.”
사실 스틸도 할 말은 없었다.
그레모리와 얽히면 본인도 모르게 저 여인의 페이스대로 말린다는 것을 스틸 자신도 느끼고 있다.
그것이 저항할 수 없는 악마의 속삭임인지... 운명에 이르게 하는 신의 이끌림인지... 알 수는 없었다.
공터의 어귀까지 왔을 땐 이미 물이 가슴팍까지 올라와 있었다.
먼저 고지대로 올라간 셰퍼드가 스틸에게 손을 뻗으려 돌아서다 멍하니 스틸의 어깨너머에 눈길을 빼앗기고 있었다.
셰퍼드가 스틸의 뒤쪽 먼 곳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기에 스틸 또한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 등평도수(登萍渡水)? 초상비(草上飛)?’
스틸은 무림인답게 물 위를 걷는 경공인 등평도수나 풀 끝을 밟고 내달리는 초상비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레모리는 경공을 펼치는 것도 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그저 물 위를 걸어오고 있었다.
그레모리는 어느새 스틸의 앞까지 와있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스틸은 범상치 않은 이 여인의 이름이 궁금한 것이 아니었다. 정체가 무엇인지? 어떠한 존재인지 궁금했다.
“저를 마녀라 생각하시면 마녀겠지만... 아시지 않나요?”
물에 흠뻑 젖어 속이 훤히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전에 느껴지던 천박스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되레 신성하다고까지 느껴지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넓은 공터를 채우고 있는 호수에서는 옅은 선기가 넓게 퍼져 나오고 있었다.
“당신이 베빌리아 입니까?”
스틸은 이 여인이 그레모리가 모신다는 그 베빌리아가 아닐까 싶어 묻자 여인이 옅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베빌리아는 더 이상 없습니다. 선지자의 챔피언이시여.”
선지자의 챔피언?
이 느낌은 뭘까?
스틸은 뭔가 알 수 없는 고양감에 가슴이 뛰었다.
“아름다운 호수이지 않은가요?”
이어서 여인의 입에서는 놀라운 얘기가 흘러나왔다.
“강과 호수의 신을 모시는 분에게 바치겠습니다. 이 땅은 이제 그대의 땅입니다.”
놀란 스틸이 뭔가 대답할 새도 없이 그레모리는 눈을 감았고 이내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자 맑은 선기가 호수로 넓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스틸은 급히 그레모리를 데리고 물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그레모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먼저 나와 있던 셰퍼드가 스틸을 바라보며 놀라움에 말을 이을 수 없다는 듯이 더듬더듬 얘기했다.
“신... 신탁(神託)을 받으셨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신탁을.. 받으신 겁니다.”
‘신탁?’
어안이 벙벙했다.
처음에는 그저 임기응변의 방편으로 강호의 신을 언급했을 뿐인데...
‘베빌리아는 더 이상 없습니다. 선지자의 챔피언이시여.’
여신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이 땅을 나에게 준다고...?
그렇다면 이 곳이 강호의 성지가 되는 건가?
... 나는 이제 저 여신을 모셔야 되는 건가?
느닷없이 신병(神病)에 걸려 신내림을 받는 사람들이 이런 기분일까?
하지만 우선은... 눈앞에 일부터 처리하고 차차 알아봐야겠다.
압박체축술로 스틸 아이스만의 모습으로 바꿔야 할 테고
“셰퍼드...”
셰퍼드는 어느 때보다도 경건하게 대답해 왔다.
“옷을 좀 벗어 보거라.”
셰퍼드는 본인이 잘못들은 게 아닐까 싶었다.
“...네?”
“너는 베니쉬로 몸을 숨기면 되지 않느냐?”
“.......”
***
나는 셰퍼드의 로브를 스님들 가사 두르듯이 걸치고 성왕청으로 복귀하고 있다.
성왕청으로 복귀하기까지는 꼬박 하루를 가야 한다.
스틸 아이스만의 모습으로 압축했으니 오러코어가 작동하지 않아 음기의 갑옷을 만들어 하루를 꼬박 유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셰퍼드 역시 그 정도 긴 시간동안 베니쉬를 유지하면 몸에 무리가 많이 간다고 했다.
마녀의 숲에서 벗어나 조금 멀어지면 길을 오가는 여행객이 적잖이 있다.
좀 더 남쪽에 있는 ‘사자궁’이라는 유적으로 향하는 모험가들도 있고 북쪽의 성왕청으로 오가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마녀의 숲 때문에 서쪽으로 한참을 돌아 사자궁으로 내려갔다고 하는데 다시 숲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이 생기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메말랐던 베빌리아의 늪지 자리에 물이 다시 차면서 이미 선기가 마기를 밀어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성왕청으로 복귀하는 길에서 마주치게 되는 사람들이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우리도 서로의 모습을 쳐다보며 웃었다.
둘 다 꼴이 말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웃어?”
“죄송합니다.”
새로 생긴 호숫가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출발했건만 해가 질 때가 다 되어서야 성왕청이 보이기 시작했다.
곧 어두워질 때가 다 되어가건만 처음 성왕청에 왔을 때보다도 훨씬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어쩐지 분위기가 좀 어수선한 것 같지?”
딱히 답을 듣고 싶어 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셰퍼드는 대답했다.
“... 짐작 가는 것이 있습니다.”
스틸은 한 발짝 뒤에서 따라오던 셰퍼드를 돌아보았다.
“신탁... 성왕청에도 신탁을 받은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데몬헌터인 셰퍼드인 만큼 아무래도 성직자들과 접촉이 잦을 수밖에 없다.
그가 알기로 신탁이 내려온 것은 지난 몇 백 년간 없었다.
더군다나 어제처럼 신이 직접 현신하는 경우는 더더욱 없었다.
성왕청에는 삼신교의 주교들을 비롯해서 많은 주교들이 머물기도 한다.
신성력이 높은 주교들은 어제의 신탁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셰퍼드는 짐작하고 있었다.
“친히 현신하셨던 신탁이었으니만큼 영향을 받은 주교나 사제들이 있을 겁니다.
뿌우---
스틸과 셰퍼드가 성왕청에서도 보일만큼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자 성왕청의 성벽 위에서 나팔소리가 들렸다.
뎅- 뎅- 뎅-
이어서 종탑의 종소리까지 울렸다.
스틸과 셰퍼드가 성왕청에 가까워지자 길의 양옆으로 정복차림의 병사들이 일제히 도열했다.
그리고는 그 길을 따라 삼신교의 주교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스틸과 셰퍼드는 어안이 벙벙했다.
셰퍼드는 신탁을 느낀 사람들이 없잖아 있을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지만 이건 정도가 지나쳤다.
멀리에는 잔뜩 상기된 표정의 윌리스 사제도 보였다.
삼신교의 주교는 스틸의 앞에 나란히 섰다.
주교들중 한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성왕청의 기사님.”
...응? 내가 서임을 받았던가?
“고생하셨습니다.”
“무사귀환을 환영합니다.”
어째서인지 이미 성왕청 소속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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