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13화>
평기사 험벨튼이 벌인 하극상 사건이 일단락되고서 찾아온 밤은 불안할 정도로 고요했다.
마치 태풍의 중심에 들어온 것처럼.
“하벤이 요정의 눈물을 가지고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동전만 한 울금색 호박석.
하벤 소유의 요정의 눈물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루멘이 한쪽 눈썹을 들었다 놨다.
“요정의 눈물이 귀하긴 엄청 귀해?”
무시하는 듯한 말투가 거슬릴 법도 한데 하벤은 순수하게 웃었다.
사실 무시하는 거라 느낄 필요가 없다.
요정의 눈물은 무려 가사 상태의 요정을 세계수의 수액으로 굳혀 만든 아티팩트니까.
희소성이야 말할 것도 없고 여러 이해가 충돌해 지체 높은 귀족 가문에서조차 구하기 힘든 아이템이다.
“나 한 번 써봐도 돼?”
“요정의 눈물을? 루멘 네가? 쓸 수 있으면 써봐.”
이 역시 무시하는 듯한 발언이었지만 루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티펙트네 뭐네 온갖 이름과 대의를 가져다 붙여도 전쟁을 위해 개발된 병기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으니까.
하벤의 반응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아이가 전쟁 병기를 다루는 것에 의문을 품지 않는 세상이 오히려 잘못된 거다.
“카르마는 영혼. 영혼은 생명력의 가장 큰 단위. 모든 업이 축적되는 곳. 피워내는 것은 강력한 의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듯한 주문을 들으며 하벤은 무언가 크게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일련의 과정을 거친 루멘의 손끝에서 기적이 발휘되었을 때는 입을 크게 벌렸다.
치유 마법은 서포터나 배우는 건데, 라며 중얼거리기도 했다.
“힐!”
루멘이 구현한 기적의 초록빛은 바로 앞에 칼리고를 향했다.
화상을 입은 왼쪽 어깨에 살포시 포개지며 자국조차 남기지 않고 말끔히 치유했다.
통증까지 가라앉자 칼리고가 두 눈을 끔뻑였다.
“씁······.”
요정의 눈물을 사용한 대가로 정신적 피로를 느낀 루멘이 휘청였다.
왼손으로 관자놀이를 짚고서 앓았다.
“이 요정은 성질머리가 상당히 괴팍하네.”
“쉽지 않지?”
방금까지의 심각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하벤이 키득거렸다.
그래도 괴팍한 게 비협조적인 것보다 훨씬 낫다.
그리 생각하며 루멘이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등에 멘 ‘수호검 이지스’의 검자루를 보았다.
특유의 빛을 감추기 위해 싸구려 천으로 감쌌음에도 신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하벤이 물었다.
“그나저나 요정의 눈물 사용법은 어디서 배운 거야?”
카르마가 없어서 회귀 전에는 빚까지 내서 샀었다.
사실을 밝히고픈 생각은 없기에 루멘은 언제나처럼 대답했다.
“꿈속 스승님한테.”
“너 그 말 되게 자주 하는 것 같은데, 그 꿈속 스승님이란 건 대체 뭐야?”
질문을 던진 건 하벤이 아니었다.
멀쩡해진 왼쪽 어깨를 빙빙 돌리며 칼리고가 말했다.
“나는 네가 누구한테 배우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야? 너한테도 언제나 배우고 있는데.”
“······나한테? 나한테 뭘 배우는데?”
“사람 꼴받게 하는 방법.”
루멘이 대놓고 비아냥거려도 칼리고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전장에서 보았던 루멘의 수준은 알던 것과 확연히 달랐으니까.
훈련을 빙자한 ‘정신 교육’ 시간에는 엄청나게 봐주고 있다는 걸 알아버렸기에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목숨은 하나니까 소중히 해야지.
하벤이 손뼉을 쳐 아이들의 이목을 모았다.
“그러고 보니 너희들, 요정의 눈물이 왜 붉은색인지 알고 있니?”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요정의 눈물은 제작 기간이 길어질수록 보석의 색이 붉어진다고 해. 왜 그런지 이유에 대해선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지만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무서운 이야기라도 하듯 표정을 굳힌 하벤이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요정의 피눈물이 섞여서 그렇대. 세계수의 수액에 담겨 굳혀지기 전, 요정은 계속 울부짖는다는 거야. 살려주세요. 제발 좀 꺼내주세요. ······왁!”
놀릴 심산으로 큰 소리를 내어도 아이들은 눈 하나 깜짝 않았다.
괜히 머쓱해진 하벤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재미없었나 보네.”
방금 이야기는 속설이지만 실제로 요정의 눈물은 투명할수록 상등품으로 취급된다.
살아있는 생명을 짓밟아 만드는 아티팩트니까.
티끌만큼의 죄책감이 반영된 걸지도 모른다고 루멘은 생각했다.
정작 성능은 보석 안에 잠든 ‘재료 요정’의 기량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뉘지만 말이다.
‘제아무리 요정의 눈물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불길을 소멸시키고 얼음으로 벽을 세울 정도면 9성 중에서 최소 4성. 넉넉잡아 5성급 마법사로 보면 되겠네.’
마법사는 2성만 되어도 용병과 모험가 파티에서 모셔가려고 다툴 정도다.
5성으로 추정되는 경지.
돈도 돈이지만 돈만으로 살 수 없는 진귀한 아티팩트, 요정의 눈물의 소유자.
‘하벤은 역시······.’
요정의 눈물이 장식된 목걸이를 움켜쥐며 루멘이 눈을 감았다 떴다.
저 멀리서 달려온 병사가 루멘과 하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쉬는 중에 미안하지만 험벨튼 님 좀 도와주시오. 이러다가 우리 모두 큰일 날지도 모르오.”
병사를 따라간 곳은 지금은 탈영한 학센이 쓰던 가장 큰 막사였다.
묶어놓은 학센이 어디로 사라진 거냐며 싸우던 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이 사태를 어떻게 책임질 거요?”
작전회의에 쓰이던 원탁은 용병들의 차지가 되어 그 용도를 달리했다.
하극상을 벌인 험벨튼을 세워두고서 단체로 몰아세우는 그들의 모습은 권력 다툼에 혈안이 된 중앙귀족을 보는 듯했다.
“학센이 탈영해버렸으니 이제 보급은 받을 수 없을 것 아니오?”
“어디 그뿐인가? 자칫하다간 반란군으로 몰려 다 죽게 생겼잖소!”
조금은 억울할 법도 한데 험벨튼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루멘은 험벨튼의 얼굴을 슬쩍 보았다가 시선을 옮겼다.
분명 눈이 맞았는데도 사전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용병은 루멘을 못 본 체했다.
학센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짐에 따라 협력관계가 끝이 난 것이다.
자그마한 입술을 비집고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평기사 하나 화살받이로 매달아 놓으면 뭐가 달라집니까? 함께 학센을 포박하고 감시까지 붙여놨었던 주제에 처벌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험벨튼이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지만 루멘은 나서기로 했다.
남은 용사의 성물을 회수하기 위해.
국경을 넘으려거든 대귀족의 협조가 필요하니까.
공적만 세우면 로스우드 가문과의 접점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설령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그쪽에서 보기엔 당신들 모두 똑같은 놈들이에요. 하극상을 저지른 평기사나, 구경만 하고 있었던 병사들이나, 고용된 용병들 전부요.”
원탁 위에 올라서서는 잘난 듯이 떠들어대는 루멘을 보며 용병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들어는 보자는 절반과 심드렁한 나머지.
모두가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서 가장 작았던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학센의 무능함을 방패로 세워 읍소하거나 도망쳐도 소용없을 거예요. 알고 보니 엄청난 귀족 가문의 자제였다는 출생의 비밀이나, 뒤를 봐주는 대귀족이 있거나, 국경을 넘을 게 아니라면 예외 없이 죽을 거예요. 그리고 당신과 당신의 목은 광장에 걸리겠죠. 본보기로요.”
루멘이 원탁 바깥에 선 험벨튼과 따로 놓인 테이블에 앉은 용병 대장을 가리켜 말했다.
탈영한 학센의 자리를 꿰찬 용병 대장은 학센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였다.
“그렇게 됐으니 꼴을 비웃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너는 소년병으로 징집된 거라 어지간해서는 처벌받지 않을 테니?”
용병 대장의 목소리는 무거웠으며 눈빛은 날카로웠다.
기세가 흉흉하여 평범한 아이라면 울음을 터트렸겠으나 루멘에게는 콩알만 한 강아지가 털을 곤두세우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남의 불행을 비웃는 취미는 없어서요. 이왕이면 다 함께 행복하게 살면 좋잖아요. 안 그래요?”
“방법이 있다는 건가?”
루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돼요. 그러면 보급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전체를 싸잡아 반란군으로 몰기에도 애매해지죠. 하극상을 벌인 기사님이야 벌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우리 알 바가 아니잖아요? 그렇죠?”
“전쟁에서 승리하면 된다? 말은 쉽게 하는군.”
용병 대장을 필두로 막사 안에 코웃음이 흘렀다.
“참패한 게 불과 오늘 아침이다. 지휘를 탓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 차이였지. 그런데도 이길 수 있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애는 애로군.”
“진 건 당신들이지 제가 아니니까요.”
순간, 막사 안의 잡음이 멎어버렸다.
“당신네 대장의 말이 맞아요. 귀족이 기르는 경비견도 되지 못하는 주제에 콧대만 높은 병사들과 흙먼지 좀 마셔본 게 무슨 대수라고 머리만 큰 당신들은 절대 이길 수 없어요. 협동한대도 마찬가지예요. 1에 1을 더해봐야 2지, 5가 아니잖아요?”
소리의 공백은 유일한 목소리를 증폭시켰고, 모두의 가슴에는 같은 메아리가 울렸다.
“하지만 저는 달라요. 저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고, 당신들의 목숨을 구해줄 수도 있어요. 한참은 어린 꼬마가 설쳐대는 게 꼴 보기 싫은 분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어쩌겠어요? 아쉬운 쪽에서 굽혀야지.”
“······무슨 계획인지 이야기나 좀 들어 보죠. 말이 좀 그렇긴 해도 이 꼬마가 우리 중에 가장 강한 건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까요.”
그 말을 한 것은 루멘과 사전에 이야기를 나눴었던 용병이었다.
끝이 뭉뚝하게 닳은 검지로 군데군데 휑한 머리를 멋쩍게 긁적였다.
루멘이 말했다.
“일단 지금 있는 울타리들부터 새로 깎을 거예요. 파비스(Pavise)만 한 크기로요. 다들 파비스 알죠? 밑이 툭 튀어나와서 말뚝처럼 땅에 박기 쉽게 만들어진 네모난 대형방패요.”
대답은 없었으나 무언의 긍정으로 보기에 무방했다.
“그리고 막사는 하나만 둘 거예요. 설치와 해체에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는 없으니 최대한 작게요. 그밖에 쓸모없는 것들은 전부 버릴 거예요.”
“진지를 옮기기 좋게 만들려는 건가?”
“네. 우리는 하루에 한 번, 많게는 두 번까지 진지를 앞으로 옮길 거니까요.”
진지를 앞으로 옮긴다.
적을 더 가까이하겠다는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다름 아닌 사전에 이야기를 나눴었던 용병이었다.
“여기서 더 들어가겠다고? 지금도 저쪽에서 불 한번 지르면 꼼짝없이 다 타죽게 생겼는데?”
“그래서 말씀드렸잖아요. 쓸모없는 거 버리고 최대한 가볍게 가자고요. 언제든 정리할 수 있게. 여차하면 버리고 도망칠 수 있도록. 악마들이 몰래 뒤로 돌아와 불을 지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깔끔하게 벌목하고 수풀도 뿌리 뽑아 길을 낼 거니까.”
“이게 무슨······ 너도 불은 물로 끄면 된다는 거냐? 네 일행인 마법사를 시켜서? 네가 학센이랑 다를 게 대체 뭐냐?”
“흥분하지 말고 잘 들으세요.”
용병의 앞으로 걸어간 루멘이 쭈그려 앉았다.
꼬마라고는 믿기지 않는 위압감에 용병은 어깨를 흠칫 떨고 말았다.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거예요. 나무와 수풀을 전부 치우고 길을 만들면서요. 그리고 숲에는 끝이 있죠. 악마들은 자기들이 유리한 숲에서 나가려 하지 않을 거고요.”
“······너 설마 선공을 유도할 작정이냐? 적이 들어오면 우리를 미끼로 던져놓고 네 일행과 함께 적장을 치려는 거고?”
“미끼라니요. 당신들은 방어 진형을 구축해놓고 적들을 잡아두거나 유인해서 도망치면 되는데. 가장 어려운 일을 도맡아주는 것에 감사하셔야죠.”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맨입으로 해주려는 건 아닌 모양이군.”
용병 대장이 말했다.
루멘이 다리를 펴고 일어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용될 때 받은 선금의 절반, 전쟁에서 승리하고 받을 잔금의 9할을 주세요. 목숨값치고는 싸죠?”
“선금의 절반도 모자라 잔금의 9할을 달라고? 네가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냐?”
용병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섰다.
원탁 위에 선 루멘이 가장 큰 것은 여전했으나 차이가 꽤 좁혀졌다.
루멘이 말했다.
“선금의 절반. 잔금은 9할하고 나머지 절반.”
“줄여도 모자랄 판에 늘리겠다고?”
“선금의 절반. 잔금은 그냥 전부 내놔요.”
“······.”
용병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선금까지 전부 내놓으라 할 판이었으니까.
그래서 자기네 대장이 대거리를 할 적에는 탄식하는 이도 있었다.
“반드시 성공할 것처럼 말한다만 그러다 실패하면 어떻게 책임질 거지?”
“실패할 리도 없거니와 그런 걸 따질 필요가 있을까요? 가만히 있다간 지금까지 벌어놓은 재산을 전부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 반역자로 몰려 죽을 텐데. 오히려 감사할 상황 아닌가?”
루멘의 말에 넘어간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합리적이라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걸어볼 가치는 있다.
용병 대장도 결국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겠다. 돈은 일이 전부 끝난 뒤에 지급하도록 하지.”
그러자 루멘이 한쪽 눈썹을 들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선금으로 절반 먼저 주고, 전부 끝난 뒤에 나머지 절반을 줘야지.”
거래가 성사된 이후.
루멘은 병사들을 찾아 같은 이유를 들먹이며 돈을 뜯었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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