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14화>
루멘의 계획을 전해 들은 병사와 용병들은 처음에 거부 의사를 드러냈다.
하루에 한 번, 많게는 두 번까지 진지를 옮긴다.
그렇게 되면 벌목은 자연스레 자기들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그루······ 아니, 두 그루씩만 벤다고 생각해요. 훈련 차원에서.”
훈련이란 모름지기 무기를 휘두르는 것 아닌가?
쓰지도 않을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는 게 어떻게 훈련이란 말인가?
반발은 더 심해졌고, 루멘은 하는 수 없이 시범을 보였다.
“나무를 베는 건 단순한 노동이 아니에요. 근력은 물론 지구력 향상에도 도움이 되고, 무엇보다 같은 자세로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건 고도의 집중력을 요해요.”
같은 곳을 거듭 타격한 끝에 두꺼운 나무 한 그루가 넘어갔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빨라 경악을 금치 못한 모두를 둘러보며 루멘이 미소했다.
“저는 나무꾼의 아들로서 언제나 나무를 베어왔어요. 제 강함의 비결은 꾸준한 나무 베기에서 비롯된 것이래도 과언이 아니에요.”
진짠가 싶으면서도 병사들은 도끼를 들었다.
능력이 부족해 병사가 되었으나 역시 기사가 되고픈 간절함으로 나무를 찍었다.
용병들도 마찬가지.
더 강해져 부귀영화를 누리고픈 그들에게 강함의 비결은 너무나도 매혹적인 단어였다.
“유사시에는 싸워야 하니까 모쪼록 무리는 하지 마세요.”
그래도 불안하니 루멘은 병사와 용병들을 세 개 조로 나누어 돌아가면서 벌목하도록 지시했다.
적습에 대비해 병사들을 주위에 배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반응은 사흘째 되는 날에 찾아왔다.
“바람이 심상치 않네.”
하늘을 헤아리던 하벤이 눈썹 사이를 좁혔다.
몽롱한 태양 아래로 떼구름이 흘러가며 때아닌 그림자가 숲에 내려앉았다.
바람이 강했으나 구름 또한 만만찮게 길어 밤과 같은 낮이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다들 울타리를 뽑아 뒤로 물러나세요. 그리고 횃불을······ 준비할 필요는 없겠네.”
양옆으로 불길이 치솟으며 주변이 환해졌다.
나무와 수풀과는 거리를 상당히 뒀음에도 불구하고 열기가 생생히 전해졌다.
루멘이 외쳤다.
“다들 위치로!”
신호를 받은 칼리고가 뿔피리를 불었다.
세 무리로 나뉜 궁병들이 저들끼리 모였고, 방패병들은 궁병들을 지키듯 감쌌다.
대형방패처럼 깎은 나무 울타리를 땅에 말뚝처럼 박았다.
그렇게 하나의 진지는 세 개의 진형이 되었다.
“험벨튼, 아센!”
“알겠소!”
“망할 꼬맹이, 지휘권을 줄 것처럼 말하더니 결국 하나부터 열까지 조종하려 드는군.”
남은 병사와 용병, 그리고 칼리고는 각 집단의 수장들이 인솔해 뒤로 빠졌다.
도망치는 게 아닌 때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묵직한 발소리에 땅이 진동하는가 싶더니 오크들이 불길 속에서 뛰쳐나왔다.
둔기나 도끼를 한 손에 하나씩 들고서 진형에 달려들었다.
“버텨! 우리가 뚫리면 다 죽는 거야!!”
방패병들은 사력을 다해 밀고 들어오는 오크들에게 저항했다.
방패 사이에 작은 틈을 둬 장창을 찔렀다 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게 가능한 병사가 없었다.
그 잠깐 훈련한대서 되는 게 아니기에 루멘은 대신 궁병을 운용하기로 했다.
“끄억!”
“화살, 화살이 날아온다!”
방패병들의 뒤에서 활이 구부러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사방팔방으로 쏘아진 화살이 오크의 초록빛 피부를 꿰뚫거나 땅에 박혔고, 불길 너머로 날아가는 것들도 종종 보였다.
화살 한 발로 오크의 미간이나 목을 꿰뚫어 죽이는 명사수는 이곳에 없다.
하지만 모두가 죽을 각오로 활시위를 당겼고 살고자 조준했다.
“칼리고 녀석 괜찮겠지?”
들어오라는 듯 아무런 견제가 없는 정면을 달리며 하벤이 말했다.
바로 옆에서 루멘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이상하고 성격이 글러 먹었지만 그렇게 쉽게 죽을 녀석은 아니야.”
“루멘 너······ 칼리고에게는 묘하게 박하단 말이야. 친구끼리 사이좋게 지내.”
“친구는 개뿔. 나는 그딴 친구 둔 적 없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기에 루멘과 하벤은 오래지 않아 적의 본진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나무고 수풀이고 죄다 밀어 둥글게 내놓은 평지는 투기장을 보는 듯했다.
바깥에 난 나무들은 벽이었고, 그 안에는 검투사들이 모여있는.
다만 머릿수는 악마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순순히 들여보낼 줄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예상하였음에도 막상 맞닥뜨리니 불안해진 하벤이 혀를 찼다.
일반적인 오크보다 강한 엘리트 오크가 대략 스무 마리.
임프의 수는 그보다 조금 더 많았다.
다들 깔끔하게 도열해서는 루멘과 하벤을 맞이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네 수장과 함께.
“멍청하게도 기어들어 왔군. 열등한 인간들.”
악마들의 수장인 ‘오크 샤먼’은 일반적인 오크에 비해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
새의 깃털을 엮어 만든 장식을 매끄러운 머리에 둘렀으며, 세 마리의 오크가 떠받치는 가 위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서 앉아있었다.
“죽여라.”
오크 샤먼이 산양의 머리뼈가 장식된 지팡이를 뻗자 엘리트 오크와 임프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병사들이 상대하고 있는 오크보다 덩치가 큰 엘리트 오크의 공격은 묵직했다.
쌍도끼뿐만 아니라 대검이나 장창을 능숙하게 뻗으며 루멘과 하벤을 위협했다.
“너를 못 믿는 건 아닌데······ 아니, 솔직히 조금 미심쩍기도 한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이제와서 도망이라도 치게? 됐으니까 마법이나 갈겨!”
루멘은 검을 뽑았다.
이지스가 아닌 보급용 장검으로 엘리트 오크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검을 절묘한 각도로 기울이거나 뻗어 쇄도해오는 힘을 기술로 응수했다.
그렇게 루멘이 빈틈을 만들면 하벤이 마법을 쏘았다.
워낙 정신이 없다 보니 잘못 조준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루멘이 적을 밀어 맞도록 만들었다.
‘이 녀석······.’
남들이 보기엔 오랜기간 호흡을 맞춘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루멘이 일방적으로 하벤에게 맞춰주고 있었다.
번거로운 요소를 거의 해결해줘서 접대를 받는 듯한 기분마저 드는 전투법.
하벤은 이러한 전투법에 대해 알고 있다.
전투에 능한 서포터들의 방식이다.
서포터의 많은 역할 중 하나는 파티원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니까.
물론 루멘 자체의 활약도 대단했다.
“이 작은 인간. 뭔가 이상하다.”
“저렇게 작은 인간이 이렇게나 강하다니. 드워프를 보는 것 같다.”
방어할 때는 허공을 유연하게 유영하다가 일순 기세를 바꾸어 예리하게 뻗어오는 검격에 엘리트 오크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갑옷을 입었으면 미세한 틈새를 찔렀으며, 방패를 들고 돌진하면 통과시킨 뒤 등을 베었다.
양옆으로 공격이 파고들 때면 유연하게 빠져나가며 반격했다.
엘리트 오크를 방패 삼아 임프의 화염구를 피하거나 검신 위로 굴려 다른 엘리트 오크의 얼굴에 던질 적엔 오크 샤먼마저도 혀를 내둘렀다.
“저 작은 인간은 위험하다. 훗날 투신이라 불릴 재목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오크 샤먼은 임프들을 뒤로 물려 ‘특별한 지시’를 내렸다.
그러고는 가마에서 내려 참전했다.
오크 샤먼은 카르마를 개방하고 마법을 깨우친 오크에게 내려진 특별한 칭호다.
신체가 아닌 마법적 지식을 수양하기에 체형이 호리호리해지고 무기술을 잊었다.
그러나 전투만을 위해 습득한 마법은 칼날보다도 위협적이었다.
“아이스 볼트!”
휘몰아치는 카르마의 폭풍이 성질을 바꾸어 열 개의 고드름이 되었다.
어떠한 물리력이 작용하지 않았음에도 고드름들은 오크 샤먼의 적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 끝이 화살보다도 뾰족했다.
“루멘 숙여!”
하벤이 오른손을 뻗었다.
청백색 섬광을 번쩍이며 힘껏 뻗어나간 가느다란 전기가 전이를 거듭하며 열 개의 고드름을 순식간에 격추했다.
4성급 마법, 체인 라이트닝이었다.
하벤을 호위하며 루멘이 말했다.
“오크 샤먼이랑 붙으면 이길 수 있겠어?”
기민한 루멘의 발을 붙잡을 방법을 깨달은 악마들은 하벤에게 달려들었다.
그럴수록 하벤은 루멘의 뒤에 숨었다.
“질 것 같지는 않은데 네가 하는 게 빠르지 않을까?”
“그건 버리고 가도 된다는 말이지?”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인마!”
다리를 걸어 하벤을 넘어트린 루멘이 몸을 살짝 숙였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넓적한 도끼날이 지나갔다.
왼손으로 하벤의 팔을 잡고 일으킴과 동시에 루멘은 오른손에 쥔 검을 내질렀다.
“크학······.”
배를 찔린 엘리트 오크가 피를 토하며 도끼를 놓았다.
땅에 떨어지기 직전, 한발짝 물러나며 회전한 루멘이 도끼를 검으로 쳐냈다.
빙그르르 돌며 날아간 도끼가 다른 엘리트 오크의 팔을 잘랐다.
‘젠장, 역시 무리인가.’
루멘이 혀를 찼다.
최대한 신경을 썼음에도 검에 금이 가고 말았다.
보급용 장검의 한계였다.
‘남은 엘리트 오크는 여섯 마리.’
오크 샤먼의 견제도 감당해야하고, 뒤로 물러난 임프들도 신경 쓰였다.
스무 마리 정도의 임프는 간혹 터무니없는 짓을 벌이니까.
엘리트 오크와 검을 맞댄 루멘의 옆에서 하벤과 샤먼 오크의 마법이 충돌했다.
성질이 다른 두 마법의 폭발에 휘말린 루멘의 몸이 날았다.
경이로운 균형 감각으로 넘어지지는 않았으나 하벤에게서 멀어지고 말았다.
“하벤!”
세 마리의 엘리트 오크가 하벤에게 달려든다.
창을 뻗고, 도끼를 휘둘렀으며, 대검을 내리쳤다.
다급해진 루멘은 오른팔을 뒤트는 화상의 고통조차 잊고서 도약했다.
발끝으로 땅을 힘껏 밀었지만 방금까진 단단했던 흙바닥이 모래사장처럼 느껴져 추진력이 붙지 않았다.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것 같아 검이라도 던지려는 찰나였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오크 샤먼한테 가!”
양팔을 넓게 벌린 하벤의 앞으로 반투명한 보호막이 전개됐다.
보호막은 방패만큼 견고하진 않았지만 몇 번의 공격을 견딜 정도는 되었다.
공격에 의해 생긴 금과 금이 이어지며 균열이 된 그때, 하벤이 양손을 모았다.
두 주먹만 한 크기로 수축된 보호막의 파편이 터지듯 퍼져나가며 엘리트 오크들을 난자했다.
쓰러지는 엘리트 오크들의 너머로 남은 세 마리를 보며 하벤이 외쳤다.
“빨리!”
그제야 마음 놓고 움직인 루멘의 몸이 솟구쳤다.
위기를 느낀 오크 샤먼은 뒤로 도망치며 마법을 난사했다.
하지만 하루도 빼먹지 않고 단련해온 루멘의 다리는 마법사보다 빨랐다.
“끝이다!”
순식간에 따라잡은 루멘이 장검을 양손으로 잡고서 비스듬하게 올려쳤다.
마법을 베면서 나아간 검날이 오크 샤먼의 상반신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갈비뼈를 부러트렸다.
충분히 치명상이지만 루멘은 제자리에서 한 바퀴 회전하며 검을 재차 휘둘렀다.
서걱, 하고 오크 샤먼의 머리가 튀어올랐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좋은 저녁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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