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15화>
어느 전쟁이 그렇듯 수장의 수급을 취하면 그 아래는 자연히 무너지기 마련이다.
“아······.”
오크 샤먼의 죽음은 하벤을 추격중이던 엘리트 오크들을 멈춰 세웠다.
하벤은 곧장 마법을 전개했고, 세 개의 고드름이 엘리트 오크들의 미간을 꿰뚫었다.
이로써 엘리트 오크까지 모조리 쓰러트렸지만 루멘과 하벤은 승리를 만끽하지 못했다.
어딘가 숨어있을 임프들을 찾아야했기에.
“하벤, 카르마 탐지는 할 줄 몰라?”
“카르마 탐지라니······ 떠돌이 마법사한테 너무 대단한 걸 바라는 거 아니냐?”
루멘은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검은 대형 막사를 중심으로 일곱의 새하얀 소형 막사가 배치되어있었다.
아예 후퇴한 게 아니라면 임프들은 분명 막사 안에 숨어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러면 저 막사들을 한 번에 쓸어버릴 마법은 쓸 수 있어?”
“규모가 상당히 커서 한 번에 쓸어버리는 건 무리야. 적어도 세 번 정도는 써야겠어.”
루멘도 보조 마법이라면 모를까, 하벤보다 뛰어난 공격 마법을 펼칠 재량이 없다.
나이아스 호수에서 얻은 9성급 대마법 ‘다이달로스’는 요정의 눈물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결국 직접 뛰기로 했다.
“가장 큰 막사를 기준으로 하벤은 오른쪽을, 나는 왼쪽을 찾아볼게!”
일전에 하벤이 말했듯, 임프가 스무 마리 정도 모이면 아주 잠깐이지만 지옥과 연결된 포탈을 열 수 있다.
지금 같은 상황이 누군들 달갑겠냐만 루멘에게는 특히나 그랬다.
하벤과 둘이서만 적진으로 쳐들어온 건 승리를 위한 선택이며, 전리품을 독식하기 위한 속셈이었으니까.
용병들에게 들은 ‘지하 경매’에 참여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콰아아!
루멘이 막사 하나를 뒤지고 나온 그때, 저편에서는 하벤이 일으킨 마법 폭풍에 두 동의 작은 막사가 쓰러지고 있었다.
뿌리뽑힌 뼈대가 부러지며 천막을 갈가리 찢었다.
저 안에 임프가 있었다면 분명 휩쓸려 죽었을 터.
루멘은 곧장 가장 큰 막사로 향했다.
말이 좋아서 막사지 루멘 일가가 사는 오두막보다 네 배가량 넓었다.
장식물이 미로처럼 놓여있었기에 한눈에 둘러보는 건 불가능했다.
박제한 인간의 머리나, 표본으로 뜬 뼈와 같은 흉물스러운 것들을 쓰러트리며 막사 내부를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임프는커녕 값진 물건 하나 건지지 못했다.
조급해진 루멘은 다음 막사로 향했다.
‘엘리트 오크와 오크 샤먼을 쓰러트리는데 예상보다 시간을 소비했어. 빨리 찾아야 해.’
이제는 입구를 찾는 수고조차도 들이지 않았다.
루멘은 검으로 막사를 찢으며 다녔고, 하벤 또한 보다 강력한 마법으로 막사를 무너트렸다.
그렇게 마지막 막사까지 뒤져보았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임프는 꼬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게 대체······ 승산이 안 보이니 그냥 퇴각한 건가? 아니, 군에 소속된 임프에게 항명이란 있을 수 없어.’
임프란 그런 악마니까.
‘오크 샤먼이 임프들에게만 퇴각 명령을 내렸을 리 만무하고. 평범한 임프들에게는 비행 능력이 없어.’
생각에 깊이 잠겼음에도 검을 쥔 손이 느슨해지기는커녕 오히려 힘이 들어갔다.
카르마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어쩔 수 없이 서포터가 되어서도 평생토록 검을 놓지 않은 루멘의 버릇이었다.
‘단체로 카르마를 모아 스텔스나 섀도우 베일 같은 은신 마법을 전개한 건가? 아니, 백 마리가 모인다 한들 그 녀석들의 수준으로는 상급 마법을 오래 유지하지 못해.’
카르마가 없기에 감지조차 할 수 없는 루멘의 고개가 자연히 하벤을 향했다.
“하벤! 아주 미세한 거라도 좋으니 주위에 카르마의 기척이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아?”
“마음이 급한 건 알겠는데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보다 이렇게나 뒤졌는데도 안 보이는 걸 보면 도망친 거 아니야?”
“그렇다면 좋겠는데······.”
루멘이 말끝을 흐린 그때였다.
그리 높지 않은 허공에 붉은 점이 떠올랐다.
균열을 일으키며 점차 커진 점은 이윽고 아이만 한 타원이 되었다.
타원의 안쪽을 채운 카르마는 잔바람에 흔들리는 수면처럼 붉게 너울지며 정적인 풍경을 내비쳤다.
피를 뒤집어쓴 듯 붉은 바위.
흐르는 건지 고인 건지 모를 용암.
지옥임을 단번에 알아본 루멘의 눈이 커졌다.
회귀 전이지만 무려 4년을 누볐었던 저 풍경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붉은 타원이 지옥과 연결된 포탈이라는 걸 확신하고 움직인 그때였다.
“반 로스우드를 유인해내면 부르라고 했거늘.”
포탈 너머에서 사나운 안광이 번뜩였다.
곧이어 두 줄기의 번개가 우렛소리를 내며 뻗어와 루멘과 하벤을 덮쳤다.
“으으윽······. 크헉······!”
꼼짝없이 직격당한 하벤이 경련하다 한쪽 무릎을 꿇었다.
루멘은 검을 세워 막았으나 땅을 디디고 선 두 다리가 밀리고 말았다.
검을 타고 흐른 전류에 감전되어 검자루를 더 단단히 쥐었고, 번개와 맞닿은 검신은 벌겋게 부풀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계였던 보급용 장검.
터지듯 부러지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가증스러운 반 로스우드는 온데간데없이 버러지 같은 인간놈들 뿐이구나.”
비교적 가벼운 발소리와는 다른 어마어마한 존재감.
공간이 전율했고, 루멘과 하벤의 시선이 자연스레 포탈로 향했다.
포탈이 닫히면서 한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실망스럽기 짝이 없으나 이 또한 운명의 인도겠지. 내 이름은 스톰팽이다. 이 몸을 목도한 것을 영광으로 알도록, 미천한 인간놈들.”
자신을 스톰팽이라 소개한 임프는 루멘보다 몸집이 조금 작았다.
피부는 노란색이었으며, 몸 곳곳에 늑대의 엄니처럼 생긴 검은 줄무늬가 있었다.
양손에 쥔 날이 완만하게 휜 쌍검에선 창백한 스파크가 튀어댔다.
스톰팽이라는 이름.
들어 본 기억이 있는 루멘의 눈매에 힘이 들어갔다.
“임프의 왕······.”
임프 중에서도 특출나게 강한 돌연변이 개체.
그들은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며 다른 임프들을 다스린다.
회귀 전에는 그래봐야 임프라고 무시했었지만 지금은······.
“골 아프게 됐네.”
마른침을 삼키는 루멘의 목울대가 짧게 흔들렸다.
느닷없이 강적이 등장했지만 그래도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임프의 왕을 토벌했다는 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공적이니까.
두둑한 보상은 말할 것도 없고, 로스우드를 비롯한 여러 가문에서 정식적으로 초대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용사의 성물을 찾기 위해 국경을 넘어야 하는 루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상황.
루멘의 곁에 선 하벤이 물었다.
“검도 부러졌는데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니야?”
“날아다니는 놈 상대로 어떻게 도망치게? 검이라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법이나 준비하셔.”
부러진 장검을 버린 루멘이 등에 멘 수호검 이지스를 뽑았다.
검이 발하는 아름다운 반짝임에 홀린 하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하벤을 지키듯 앞으로 나아가며 검을 세운 루멘은 스톰팽이 쏘아낸 번개를 막았다.
이지스가 내뿜는 신묘한 기운 덕에 방금처럼 감전되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전력으로 버틸 수 있었고, 아주 조금 뒤로 밀리는 정도로 그쳤다.
이번 공격은.
“나를 목도한 순간부터 너희에게는 죽음뿐이다!”
스톰팽이 머리 위로 든 쌍검을 교차시키자 전기가 치솟았다.
하늘을 뒤덮은 구름으로부터 눈부신 섬광이 번쩍이며 천둥을 수반한 빛기둥이 떨어졌다.
청백색으로 빛나는 기둥은 번개라기엔 두꺼웠으나 성질은 동일했다.
“숙여!”
무릎을 굽힌 하벤이 양손으로 땅을 짚었다.
지면이 울리는가 싶더니 흙이 솟구쳐 루멘과 하벤의 머리 위를 감쌌다.
빛기둥을 막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지만 흙은 무한히 솟구쳤다.
끝에 가서는 빛기둥을 완전히 상쇄하고야 말았다.
“원은 순환. 안에 채워진 것은 세상. 영혼을 불살라 구현하려는 것은 오래된 기적.”
다리를 편 하벤의 오른손에서 요정의 눈물이 빛을 뿜었다.
소용돌이치는 카르마는 곧 화염이 되었으며, 거대한 도마뱀의 형태를 하고서 실버팽에게 아가리를 벌렸다.
4성급 공격 마법인 샐러맨더다.
“샐러맨더!”
불도마뱀이 토해낸 화염이 실버팽을 덮쳤다.
부채꼴로 퍼진 화염은 막사는 물론 맞은편의 나무들까지 불살랐다.
타다만 재가 뺨을 스쳤지만 루멘의 시선은 오로지 정면만을 향했다.
화염 속에서 일렁이는 그림자를 예의주시하며 검을 모로 잡았다.
“요정의 눈물과 신묘한 기운을 내뿜는 검이라.”
섬뜩한 웃음소리.
날카로운 섬광이 화염 속에서 삐져나왔고, 소리는 바로 다음 순간에 울렸다.
“분에 넘치는 보물들을 가지고 있군!”
부채꼴로 퍼지던 화염과 불도마뱀이, 샐러맨더라는 마법 자체가 소멸됐다.
스톰팽의 쌍검에 의해서.
쌍검이 특별히 뛰어난 아이템이라서가 아니다.
쌍검의 날에 붙어 불꽃처럼 타오르는 카르마.
모두의 눈에 보일 정도로 강렬히 타오르는 ‘영혼의 불꽃’이 하벤의 마법을 포식한 것이다.
하벤이 혀를 찼다.
잠깐 사이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영혼의 불꽃까지 피워내는 임프라······. 전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지만 이건 좀 심하네.”
특정 경지에오르면 카르마는 특수성을 띠게 된다.
전력으로 개방하면 불꽃의 형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게 바로 ‘영혼의 불꽃’이다.
마법사처럼 등급을 매긴다면 9성 중에 최소 5성급.
검자루를 그러쥔 루멘이 옅게 웃었다.
“하벤, 임프의 왕을 토벌하고 받을 포상금과 명성이 탐나지 않아?”
“······이길 수 있는 거야?”
“하벤이 도와주면 충분히 가능해. 그러니까 내게 목숨을 맡겨줘. 아, 참고로 저놈의 검은 내가 먼저 점찍었으니까 눈독 들이지 말아줘.”
스톰팽이 달려온다.
혀를 내빼며, 눈앞의 인간들이 가진 보물을 뺏기 위해.
번개를 두른 쌍검을 휘둘렀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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