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16화>
루멘과 하벤은 전력을 다했다.
특히나 루멘은 지금 낼 수 있는 기량을 최대한 발휘했다.
경이로운 신체 능력과 회복력 덕에 싸우는 중에도 끊임없이 성장했다.
그럼에도 스톰팽을 쓰러트릴 수 없었다.
“너희 둘, 특히 작은 녀석은 인간 주제에 제법이로군. 하지만 묘한 위화감이 느껴져.”
스톰팽은 뇌전의 창을 쏘거나 하늘에서 번개를 떨어트렸다.
쌍검을 연신 휘둘러 전기를 사방팔방 흩뿌려댔다.
하벤의 다양한 마법도, 루멘의 자유로운 검술도 접근조차 하질 못하니 빛을 보지 못했다.
“······칼리고 쪽은 어떨까? 괜찮을까?”
하벤은 관자놀이를 짚고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정신적 피로를 호소하며 식은땀을 뻘뻘 흘려댔다.
요정의 눈물을 남용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루멘이 대답했다.
“제대로 말해뒀으니 괜찮을 거야.”
“너는 그 사람들을 믿어?”
“그 사람들의 살고자 하는 마음을 믿어.”
검을 잡은 자세를 바꾼 루멘이 옅게 웃었다.
“그러니 괜한 걱정은 말고 싸움에 집중해. 솔직히 졸병을 상대하는 그쪽보다 우리가 훨씬 위험하니까!”
방어할 때는 부드럽게 움직이다가 공격할 때는 날카로워지는 루멘의 검술도 굉장히 까다롭다.
하지만 무엇보다 거슬리는 건 보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눈 깜짝할 새에 거리를 좁혀와선 검을 자기 팔처럼 휘둘러댔다.
스톰팽이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카르마가 개방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라니······ 이 녀석은 위험해. 카르마를 개방하고 장성하게 되면 지옥에 큰 위협이 될 게 분명하다.’
새싹일 때 밟아야 한다.
뿌리 뽑아서 죽여버린다.
전기로 지지고 쌍검으로 목을 베어서.
“라이트닝 레인!”
천둥이 울렸다.
거뭇해진 구름에서 가느다란 번갯줄기가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전력으로 피해도 모자랄 판에 루멘은 스톰팽에게 향했다.
튼튼한 두 다리로 땅을 박차고서 거리를 좁혔다.
한줄기의 번개가 절묘하게 루멘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는 찰나였다.
“그렇게는 안 되지!”
무언가의 안무처럼 하벤이 팔을 휘저었다.
작은 파도가 루멘의 머리 위로 드리우며 떨어지는 번개를 모조리 막아주었다.
전류는 수면으로 흐른다는 성질을 이용한 방어법.
피해 달아나는 스톰팽을 끈질기게 추격한 루멘의 검이 날카로운 궤적을 그렸다.
서걱!
“윽!”
단순히 검에 베였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왼쪽 가슴부터 배꼽의 오른쪽 옆까지 이어지는 상처.
심장처럼 뛰며 불로 지진 듯한 작열통이 인다.
‘검의 효과인가? 아니면 꼬맹이의 검술? 그것도 아니면······.’
뭐가 됐든 성가신 녀석이다.
이어지는 루멘의 휘두르기를 쌍검으로 맞받아치며 스톰팽이 카르마를 끌어올렸다.
“에테르니아까지 와서 인간 꼬맹이에게 베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뭘 그런 걸로 놀라? 이제 곧 죽을 텐데.”
“네가 말이냐?”
루멘을 힘껏 밀쳐낸 스톰팽의 쌍검에서 전기가 쏘아졌다.
반원에 가까운 형태로 쏘아진 그것은 카르마에 의해 형태를 갖춘 검의 예기, ‘검기’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어중이떠중이들에게는 검기로 보일지 몰라도 루멘에게는 어설픈 흉내에 지나지 않았다.
‘카르마를 무식하게 뭉쳐서 쏜 거거나 마법의 일종이라면!’
손목을 비틀어 검신이 스톰팽을 향하도록 잡은 루멘이 회전했다.
쇄도해오는 전기를 검신에 갈무리한 뒤, 손목을 되돌리며 검을 비스듬한 각도로 내리쳤다.
“크악!”
전기를 두르고서 먼젓번에 베었던 곳을 또다시 파고드는 정밀한 검격.
안 그래도 작열통 때문에 치유가 느린데, 더욱 깊어진 상처의 틈새로 전기까지 스며든다.
강력한 전기 내성이 있대도 내장을 직접 지지는 건 스톰팽이라도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 자세가 무너졌고, 빈틈을 놓치지 않은 루멘은 곧바로 목을 노렸다.
“이놈이!”
스톰팽은 쌍검으로 맞받아치려고 했다.
그러나 충돌 직전의 순간, 쌍검을 절묘하게 비껴간 루멘의 검이 가파른 곡선을 그리며 스톰팽의 옆구리를 베었다.
“······하!”
연속으로 공격을 허용했음에도 스톰팽은 기세를 잃지 않았다.
손을 뻗어 루멘의 옷자락을 틀어쥐었다.
베인다는 걸 인지한 순간에 뻗은 것이라 루멘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인간들에게는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말이 있다지.”
잔혹하게 웃은 스톰팽이 루멘의 왼쪽 어깨를 깨물었다.
그러고는 카르마를 끌어올리며 깊게 폐호흡을 하였다.
상대의 카르마를 흡수하는 악마들의 고유한 특성 ‘포식’을 사용했다.
‘······음?’
루멘의 피와 찢어진 피부, 조금의 살점을 마시며 스톰팽이 눈살을 찌푸렸다.
당연한 것이 없어 한 줌의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공허감.
활발하게 도느라 뜨끈하게 달아오른 피와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마법사의 거리에서 루멘이 ‘포식’당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하벤이 곧장 끼어들었다.
“헤이스트!”
하벤의 신발 옆에 작고 희미한 하늘색 빛의 날개가 돋아났다.
힘껏 발돋움해서 마법의 힘으로 도약한 하벤이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목표는 스톰팽.
녹색섬광과 함께 날카로운 나무말뚝을 쏘았다.
평소라면 루멘을 방패 삼아 막았겠지만 스톰팽은 그러지 않았다.
루멘을 놓고서 뒤로 멀리 물러났다.
숨 쉬는 걸 실수한 건가 싶을 정도로 ‘포식’의 결과가 당황스러웠기에.
‘다시 생각해도 내가 실수했을 리는 없다.’
개방은 사용을 위해 금제를 푸는 행위.
개방되지 않았더라도 아주 적은 양의 카르마가 신체에 돌고 있다.
그게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그런데 어째서 저 작은 녀석의 카르마를 한 방울도 포식하지 못한 거지?’
의문은 눈썹 사이를 좁혔고 시선을 고정시켰다.
검을 들고서 거리를 좁혀오는 루멘을 주시하며 스톰팽이 양팔을 벌렸다.
양손에 든 검과 검 사이에 청백색 전기가 튀는가 싶더니 정면으로 세차게 쏘아졌다.
속도도 위력도 화살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루멘은 어렵지 않게 쳐냈다.
검신을 튕긴 전기를 일별하며 스톰팽은 다리를 분주하게 움직였다.
단거리 순간이동을 활용해 루멘에게서 달아나며 계속 전기를 쏘았다.
“튕겨내지 말고 거기서 피해!”
뒤늦게 눈치챈 하벤이 외쳤으나 루멘은 이미 여덟 번째 전기를 쳐냈다.
검신을 튕긴 전기가 방향을 트는가 싶더니 허공에 떠 있는 일곱 개의 전기 구슬 사이를 빠르게 연결했다.
바깥쪽에 십자(十)로 놓인 전기 구슬은 큰 원이 되었고, 안쪽의 삼각형과 연결되며 하나의 마법진이 되었다.
삼각형의 중심에는 루멘과 스톰팽이 있었다.
전기 구슬은 지금까지 루멘이 쳐냈던 전기가 사라지지 않고 남은 것이었다.
“스테이시스.”
스톰팽이 쌍검을 부딪치자 전기의 성질이 일변했다.
개념은 빙결에 가까우나 차갑지는 않은 카르마가 루멘을 경직시켰다.
“으윽!”
루멘이 이지스를 써서 방어에 성공하면 감전이나 화상 따위의 해로운 효과는 루멘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유심히 관찰한 끝에 간파한 스톰팽은 전략을 바꿨다.
방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마법을 전개해 발을 묶어버리자고.
카르마 소모가 극심해 당분간 카르마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힘들게 전개해도 루멘의 움직임을 잡아둘 수 있는 건 잠깐이겠지만, 바로 앞에서 검을 찔러넣기에는 충분했다.
입가를 쭉 찢으며 웃는 스톰팽의 쌍검 중 하나가 움직였다.
“안 돼!”
단거리 순간이동은 전투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유용하다.
그런데도 사용하는 마법사가 없는 이유는 신체적 한계와 공간 마법의 불안정함에 있었다.
운이 나쁘면 머리와 몸이 따로 이동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마탑에서는 암묵적으로 금지하고도 있지만 하벤은 사용했다.
미칠듯한 현기증과 고통을 견뎌내며 루멘과 스톰팽의 사이로 이동했다.
“크헉······.”
단거리 순간이동의 고통이 몸을 비트는 거라면, 검에 가슴이 꿰뚫리는 건 영혼이 낚싯바늘에 걸리는 것 같았다.
하벤은 피를 토하며 자기 가슴을 꿰뚫은 스톰팽의 검을 오른손으로 잡았다.
더는 깊이 파고들지 못하도록.
등 뒤에 있는 루멘이 다치지 않도록.
마음 같아서는 양손으로 잡고 싶으나 함께 이동하지 못한 왼팔은 땅 위에서 식어갈 뿐이었다.
“하, 하벤······?”
경직이 풀렸음에도 루멘은 움직이지 못했다.
하벤의 등 뒤로 삐죽 튀어나온 날붙이와 빨갛게 물들어가는 윗옷을 보며 손을 벌벌 떨었다.
하벤이 자신을 감싸다 대진 찔렸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대체 왜······ 당신에겐 나를 감쌀 이유가 없잖아······.”
당신은 나를 지키려고 온 게 아니잖아, 라는 말은 끝내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하벤이 씩 웃었다.
“동생을 지키는데······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냐?”
앞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미소는 스톰팽을 향했지만 루멘의 가슴을 울렸다.
입꼬리를 비튼 스톰팽이 남은 손을 움직였다.
쌍검은 두 자루가 하나니까.
다른 하나로 하벤의 목을 쳐버릴 심산이었다.
쾅!
하지만 저지됐다.
단거리 순간이동에 비견되는 속도로 거리를 좁힌 루멘에게 얼굴을 잡힌 채로 땅에 처박혔다.
날카로운 이로 루멘의 손가락 사이를 조금씩 씹으며 스톰팽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렇군. 그런 거였어. 너는 카르마가 없는 거로군!”
영혼까지 깎아내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비열하게 울렸다.
회귀 전의 루멘을 항상 뒤따랐던 비웃음이었다.
“저 인간 마법사도 딱하게 됐군. 너 같은 돌연변이를 감싸다 죽게 됐으니 말이야!”
“닥쳐.”
“나중에 귀찮아질 것 같아서 반드시 죽여야겠다 생각했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겠군! 지옥으로 끌고 가 연구해주마! 어떻게 너 같은 게 태어났는지! 무슨 기적으로 살아 숨 쉬는지!”
“닥치라고!”
루멘은 미친 듯이 주먹질을 해댔다.
자기 손가락을 때리기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빠르게 이동하면서 검을 놓치지 않았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비상식적인 힘과 회복력은 카르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발달한 건가? 지금이야 남들보다 앞설지 몰라도 머지않아 따라잡히겠군. 너에게는 카르마가 없으니까!”
“닥치라고 했지!”
이번에 뻗은 주먹은 스톰팽에게 닿지 못했다.
잠깐 사이 카르마를 회복한 스톰팽이 단거리 순간이동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성인 다섯 명 높이의 허공을 날며 스톰팽이 양손을 아래로 겨눴다.
두 손 사이로 가느다란 전기가 거미줄처럼 얽히는가 싶더니 이윽고 눈이 아프도록 강렬한 섬광을 발했다.
어마어마한 충격파를 일으키며 쏘아진 청백색 광선의 너비는 양손 사이의 간격과 같았다.
“젠장!”
루멘은 가슴에 검이 박힌 채로 쓰러진 하벤을 지키듯 섰다.
그 옆에 놓인 검, 수호검 이지스의 검신과 자루를 잡고서 머리 위로 들어 떨어지는 광선을 막았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압력에 루멘의 등이 구부러지고 두 발이 땅에 박혔다.
‘이지스를 써서 방어’가 성립되었기에 감전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검을 놓치지 않도록 꾹 쥐는 수밖에 없었고, 손가락 사이가 좁혀지며 왼손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대로라면 손가락이 잘리는 것도 시간문제라 생각한 찰나였다.
‘고개 들고 똑바로 봐.’
이지스가 웅웅, 진동하며 머릿속에 직접 목소리가 울렸다.
반사적으로 지시를 따른 루멘의 눈에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쳤다.
광선의 안쪽에 새겨진 무수히 많은 균열.
그 가운데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새하얀 원이 있었다.
‘회전 방향을 바꿔.’
아까부터 지시를 내리는 목소리가 이지스 안에 깃든 요정의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머릿속에 주입되는 정보를 토대로 원의 회전 방향을 바꿀 방법을 터득한 루멘이 하체에 힘을 싣고서 자세를 단단히 잡았다.
억눌러오는 힘의 파동에 저항하며 허리를 꼿꼿이 세운 뒤, 한계 이상의 힘을 짜내 양팔을 쭉 뻗었다.
그다음 양손으로 잡은 이지스의 검신을 원에 대고서 오른쪽으로 휙 꺾었다.
본연의 흐름을 거스르고 시계방향으로 돌려버렸다.
그러자 유리가 깨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방향을 바꾼 광선이 스톰팽을 덮쳤다.
“끄어억······.”
자신의 카르마며, 전기 내성이 있음에도 스톰팽이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연기가 피어올랐고, 자기 몸을 떠받치던 힘을 잃고서 땅으로 추락하려 했다.
감전된 탓에 옴짝달싹도 못 하는 듯 보였기에 루멘은 곧장 움직였다.
믿을 수 없는 다릿심으로 도약해,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을 상기하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은백색 검날이 햇빛보다도 찬란히 빛나며 스톰팽의 짧은 목을 양단했다.
더러운 검은피를 뿜어내는 몸이 먼저 추락한 다음, 외마디조차 지르지 못한 머리가 땅을 굴렀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일요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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