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17화>
“학센 슈바인, 너는 잘못된 지휘와 더불어 보급을 횡령하여 성과를 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로스우드의 긍지를 두고 전장을 이탈하는 추태를 보였다.”
새빨간 카펫을 사이에 두고 금속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양옆으로 늘어선 가운데 로스우드 공작이 아닌 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로스우드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의복을 입은 그는 로스우드 공작의 왼쪽에 서서 공작의 뜻이 적힌 양피지를 읽었다.
“심지어 열 살조차 되지 않은 소년을 징집하는 과오를 범해 로스우드의 이름에 먹칠까지 하였으니 그 죄가 하늘에 닿을 듯 무거워 네 놈의 하잘것없는 목숨 하나로는 감히 씻어낼 수 없다.”
새빨간 카펫 위에서는 학센을 비롯한 슈바인 일가가 벌벌 떨고 있었다.
달아나지 못하도록 붙잡아두는 두꺼운 줄에 포박당한 채, 죄가 아닌 치르게 될 죗값을 두려워했다.
“하여 나, 반 로스우드는 부정한 청탁으로 신성한 깃발을 산 아판 슈바인과 과분한 지위를 누린 학센 슈바인을 처형할 것이며, 또한 슈바인의 이름을 로스우드에서 지우고 재산을 몰수할 것이다.”
“자, 잠깐만요! 제 말을 좀 들어주십시오!”
학센이 앞으로 나섰다.
제아무리 포박되었다 한들 죄인을 움직이게 두는 건 위험하지만 기사들은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제국을 대표하는 기사 가문의 가주이자, 젊었을 적에는 악마 도살자로고도 불리었던 로스우드 공작이니까.
하물며 양옆에는 로스우드의 최대 전력인 측근들까지 있지 않은가.
한낱 기사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험벨튼, 그 평기사가 하극상을 벌이지 않았습니까! 저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한 것뿐입니다! 가만히 놔뒀다간 반란군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위와 같은 이유로 학센은 귀환하자마자 로마드로 군사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 한 마리 없이 맨몸으로 탈출한 학센이 우여곡절 끝에 산체스로 귀환하는 것보다 전서구가 승전보를 가져오는 게 하루 정도 빨랐을 뿐이지만.
“아이를 징집한 것도 그렇습니다! 어찌 됐든 결국 그 아이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지 않았습니까? 무려 임프들의 왕을 쓰러트렸다지 않습니까! 제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요!”
“끌어내라.”
높낮이 없이 건조한 한마디였다.
노여워하는 기색조차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학센은 물론 기사들마저도 아주 잠깐 호흡하는 걸 잊어버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슈바인 일가를 바깥으로 끌어냈다.
뒷덜미를 붙잡힌 채 질질 끌려 나가는 슈바인 일가의 모습은 산송장이나 다름없어서 조금은 섬뜩했다.
한바탕의 소동이 지나간 뒤 예정된 듯 찾아온 적막은 무거웠다.
모두가 엄숙이란 이름의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목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방금보다는 덜했으나 여전히 사람을 짓누르는 목소리였다.
“루멘이라고 했나. 초대장을 한 장 더 써야겠군.”
“마중은 제가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로스우드 공작의 뜻을 대신 전하던 왼쪽의 남자가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허리를 숙였다.
**
루멘 일행이 전원 무사하단 것.
그리고 루멘이 아주 큰 공을 세웠다는 소식은 루멘 일행보다도 빨리 헤드라에 전해졌다.
당연히 늙은 촌장을 비롯한 마을의 모두가 크게 기뻐했다.
루멘이 임프의 왕을 쓰러트렸다는 부분을 읽을 적에는 놀라 까무러치는 시늉을 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쁨이 아무리 크다고 한들 아이들의 무사를 확인한 부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칼리고가······ 우리 칼리고가······!”
칼리고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고, 루멘의 아버지 또한 두 손 모아 신에게 감사했다.
아버지의 눈물은 소리 없이 무거웠다.
닷새 후에는 웬 마차가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소식은 순식간에 마을 전역에 퍼졌다.
자식을 전쟁터로 보낸 부모들은 맨발로 뛰쳐나왔으나 마차 가득 실린 재물을 보고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웬 거냐는 늙은 촌장의 물음에 마부가 답하길.
“어린 영웅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반 로스우드 공작님께서 하사하셨소.”
루멘 일행을 태운 마차는 여드레 후에야 도착했다.
초라한 짐마차에 짐짝처럼 실려오는 모습의 어디가 영웅인가 싶었으나 부모에게는 아무래도 좋았다.
하나뿐인 자식이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이렇게 다시 껴안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감사한 기적이었으니까.
감동적인 재회를 뒤에서 지켜보며 하벤이 코밑을 문질렀다.
추억을 겹쳐보는 것 같기도, 부러워하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우리 헤드라의 영웅, 루멘을 위하여!”
환영 잔치는 사흘 동안 계속되었다.
작은 우물이 있는 광장에선 군침 도는 연기가 밤낮으로 피어올랐다.
소, 돼지, 닭에다가 새우, 조개, 게 같은 해산물도 있었다.
생선을 제외한 물에서 나는 고기라고는 말로만 들어본 게 전부인 마을 사람들은 칼리고의 제안대로 전부 구워버리기로 했다.
돼지고기와 김치를 넓적한 돌판에 함께 구운 요리의 평판이 특히 좋았다.
늙은 촌장은 칠십 인생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 본다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주인공이 뚱한 얼굴이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루멘을 따라 광장 구석에 앉으며 하벤이 나무 꼬치에 꿴 고기를 건넸다.
단거리 순간이동의 대가로 빈 왼쪽 소매가 헐렁거렸다.
스톰팽을 해치우자마자 하벤의 요정의 눈물을 취한 루멘이 온갖 회복 마법을 전개했다.
정신이 마모되고 뇌가 녹을 듯한 고통을 감내해가며 상처를 치유하고, 꺼질듯한 생명의 불씨를 다시 피워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없어진 것만은 재생시킬 수 없었다.
“그냥, 조금 꿈을 꾸는 기분이 들어서.”
대답하는 중에도 루멘의 시선은 줄곧 정면을 향해있었다.
푸른 눈에 비치는 지금은 원래라면 존재하지 않는 미래였다.
“그러냐? 하긴, 네 집에 쌓인 로스우드 가문에서 보낸 선물만 봐도 꿈 같긴 해. 앞으로 밥 굶을 걱정은 없겠더라.”
“집에 있는 건 선물이 아니라 투자지. 귀족은 대가 없이 퍼주는 작자들이 아니라는 걸 알잖아?”
루멘의 옆에는 로스우드 가문에서 보내온 검이 세워져 있었다.
보급품과는 때깔부터 달랐으나 눈여겨볼 점은 거기가 아니었다.
동그란 폼멜 안에 조각된 ‘월계관 안의 황금양’ 문양.
로스우드 가문의 문장이었다.
검의 의미를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하벤이 입맛을 다셨다.
“가신으로 삼고 싶을 정도로 네 재능을 높이 산다는 거지.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검이랑 초대장을 보낸 걸 보면 뭐······. 어쨌든, 앞으로 어쩌게?”
“3개월 정도 남았으니까 그동안 준비 좀 하고 있으려고. 귀족들에게야 위대한 반 로스우드 공작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연회겠지만 나에게는 사자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응? 설마 가신이 될 생각이야?”
“그럴 리가. 이용할 수 있는 최대한 이용하겠지만 목줄을 찰 생각은 추호도 없어.”
“이번에는 또 무슨 터무니없는 짓을 꾸미는 건지 원.”
초대에 적극적으로 임해 로스우드 공작의 환심을 사되 자유를 보장받는다.
그렇게 책임 없는 지원을 받으며 남은 용사의 성물을 회수한다.
이 계획을 루멘은 다음과 같이 일축했다.
“세상을 구하는 짓. 그런 의미에서 내일 세론으로 갈 예정이야. 마차도 불렀어.”
“세론이면······ 용병들이 말한 비밀 경매에 참여하려고? 사고 싶은 물건이라도 있나 보다?”
용병들이 각지를 떠돌며 파는 건 비단 힘만이 아니니까.
“용병이랑 병사들에게 뜯······ 받은 돈도 있고, 로스우드의 선물도 잔뜩 있으니 이 기회에 써먹어야지. 겸사겸사 스톰팽의 검도 써먹고.”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나 환자야.”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봄의 손짓을 따라 하벤의 왼쪽 소매가 나부꼈다.
**
세론은 로스우드 공작이 소유한 제국 유일의 항구도시다.
악마에게 맞서기 위해 일시적 동맹을 맺었으나 국경이란 높은 벽을 쌓고 성문을 걸어 잠근 세상에서 몇 없는 무역지다.
그 가치는 황금으로 지은 성보다 값지니 제국의 동부를 양분한 두 공작의 대립과 황실의 빈번한 견제의 이유기도 하다.
“크으······ 상상한 거랑 완전 똑같이 생겼네.”
검문소를 통과하자마자 칼리고가 감탄을 연발했다.
벽돌을 깔아 내놓은 길이나 양옆으로 늘어선 새하얗고 네모난 건축물들은 이국적이었다.
제국이지만 제국이 아닌 느낌.
다양한 인종과 종족의 틈바구니를 가로질러 루멘이 일행을 이끌고 향한 곳은 최고급 여관이었다.
외관부터 화려한 여관은 면적이 넓고 층고가 높았으며 전체적인 색감이 화사했다.
천장에 달린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발하는 은은한 빛이 대리석 바닥 위를 매끄럽게 흘렀다.
급사들은 귀족가의 시종처럼 검은색 바탕의 양복을 맞춰 입고 있었다.
이처럼 고급화 전략이랍시고 비싸게 장사하는 여관을 호텔이라고 부르곤 했다.
특유의 허름함과 떠들썩함으로 모험가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일반적인 여관과는 확연히 달랐다.
입구 가까이에 놓인 기다란 원목 테이블 앞에 서자 늙은 여관 주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경비는 대체 뭘 하는 거지? 비렁뱅이들이 들어오는 걸 막지도 않고.”
여관 주인은 물에도 윗물과 아랫물이 있듯, 평민 안에서도 격이 나뉜다고 생각하는 부류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족을 흉내 낸 자신과 달리 허름한 망토를 두른 루멘 일행을 괄시했다.
옷차림에서 별 볼 일 없는 삶이 드러난다며 퉁명하게 손짓했다.
“여기는 너희처럼 이틀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하찮은 것들이 올 곳이 아니다. 너희가 더러운 숨결을 내뱉는 것만으로도 격이 떨어지니 험한 꼴 보기 전에 나가라.”
“이보시오, 주인장. 말이 지나치신 거 아니오?”
“우욱······ 먹을 게 없어 흙을 물에 적셔 먹기라도 하는 거냐? 입 냄새가 네 놈의 성질머리만큼이나 고약하구나.”
하벤이 욕보여지자마자 발끈한 칼리고가 입을 크게 벌렸다.
다른 세계의 공동체에서 배운 비속어를 선보이려는 찰나였다.
“나뭇잎밖에 보지 못하는 자가 어찌 맺을 열매를 알겠는가.”
평소와 달리 점잖은 목소리로 말하며 루멘이 어깨 너머로 손을 옮겼다.
등에 멘 두 자루의 검 중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칼을 가졌으니 입을 조심하라는 거냐? 돼먹지 못한 놈. 수틀리자마자 겁박부터 하고 보는 게······ 어?”
화들짝 놀란 여관 주인이 검에 코가 닿을 듯 바짝 엎드렸다.
색바랜 두 눈에 검의 꼬리에 달린 동그란 폼멜이 비쳤다.
사람을 홀리는 황금빛의 가운데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문양.
‘월계관 안의 황금양’은 로스우드 가문의 문장임이 틀림없었다.
마른침을 삼키는 늙고 처진 목울대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모조품일 가능성도 있지만 만에 하나 진품이라면?
로스우드에서 임명한 고위 기사 내지는 가신의 자식이라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로스우드 공작의 가신이라면 고위 귀족일 확률이 높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차림새만 보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시골 촌뜨기라기엔 다들 얼굴이 멀끔한데다가 검을 내놓은 꼬마는 금발이기까지 하네.’
희귀한 금발이라면 귀부인의 장난감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이든 위험하다.
덜컥 겁이 난 여관 주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혹시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루멘이 검지를 세워 입으로 가져다 댔다.
위장 중이라 밝힐 수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여관 주인이 고개를 숙였다.
“귀한 분들을 못 알아보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용서해주신다면 머무시는 동안 각별하게 모시겠습니다.”
“기대하지. 그래서 얼마라고?”
“하루에 30골드이옵니다.”
“사, 삼십!?”
30골드면 금화 세 닢.
루멘이 마을을 습격한 도적들을 소탕하고 받은 포상금이자, 루멘 일가의 대략 2개월 치 식비다.
그걸 하루 묵는데 내놓으라니 가만히 듣던 하벤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당연했다.
하벤의 발등을 밟으며 루멘이 반문했다.
“얼마라고?”
“하루에 삼십······.”
“다시 묻지.”
여관 주인의 말을 자른 루멘이 눈에 힘을 주었다.
“얼마라고?”
그제야 말귀를 알아먹은 여관 주인이 한쪽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거점을 공짜로 확보한 루멘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지하 투기장이었다.
지하 경매에 참여할 자격을 획득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
칼리고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때가 왔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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