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19화>
[흉내 내기의 대상으로 루멘을 선택하셨습니다.]
[당신의 능력치로는 대상의 능력을 11%까지 재현할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칼리고에게 말했다.
너의 수준으로는 녀석을 온전히 흉내 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그럼에도 시야가 확 트이며 정면으로 달려드는 라온의 움직임이 조금 느리게 보였다.
챠앙!
마냥 거세기만 했던 라온의 공격이 느리게 보이니 쳐내기 한결 수월했다.
시선, 발끝, 허리, 상체, 팔, 손, 검과 방패의 움직임이 한눈에 들어오고, 상대의 다음 행동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방패를 짧게 뻗어 쳐낸 뒤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하게 베기.’
자각하자 회피와 반격을 겸비한 최적의 경로가 빛나는 발자국으로 나타났다.
칼리고는 자기에게만 보이는 발자국을 차례대로 밟았다.
발끝의 방향이나 간격이 제멋대로라 중심을 잃거나 다리가 꼬이기 십상이었지만 온몸을 써가며 나아갔다.
그렇게 춤을 추듯 우아하게 돌며 방패 치기를 스치듯 회피한 칼리고의 검이 라온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인챈트의 효과가 남은 검은 가죽 갑옷을 능히 찢고 라온의 옆구리에 손가락 반 마디 정도의 절상을 남겼다.
‘와 시발! 이게 11퍼라고? 진짜 개미쳤네.’
검의 떨림을 타고 착 감겨오는 손맛에 칼리고가 전율했다.
막힘없는 전개와 독자에게 사이다를 주기 위한 먼치킨이라는 설정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먼치킨 최고’를 마음속으로 외치는 칼리고의 눈에 또 다른 발자국과 더불어 빈틈이 보였다.
보폭을 넓히고서 파타의 칼날을 세차게 뻗는 라온의 오른쪽 옆구리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저기구나!’
이번에도 닿을 듯 닿지 않는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찌르기를 회피하며 파고든 칼리고가 앞을 비스듬하게 찔렀다.
왼쪽 옆구리보다야 상처가 얕았으나 양쪽을 전부 당한 라온은 식은땀을 흘렸다.
마음 같아선 인내하고 달려들고 싶지만 일단 거리를 뒀다.
올바른 판단이었다.
“하아······.”
극심한 피로감과 근육통에 칼리고 또한 만만찮게 식은땀을 흘렸다.
스킬을 발동하기 전에 베였던 옆구리가 심장처럼 뛰며 피를 뿜어댔다.
“쯧. 그렇게나 구르면서 키웠는데도 망할 놈의 몸뚱이는 이 정도도 못 버텨주네.”
200화쯤에서 루멘은 최강자의 반열에 오른다.
원작을 완결까지 읽은 건 아니라 얼마나 더 강해질지는 모르나 완전히 흉내 내기 위해서라도 몸을 더 키워야겠다.
사흘도 안 되어 사그라들 다짐을 발판 삼아 내달리며 칼리고가 검을 뻗었다.
나쁘지 않은 기회다.
맞받아치기로 마음먹은 라온 또한 오른손을 있는 힘껏 뻗었다.
맞붙으면 카르마로 신체 강화를 할 수 있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뻗기도 전에 상대에게 움직임을 간파당해서야 의미가 없었다.
키이이익!
상대의 숨통을 끊고자 뻗은 두 검이 절묘한 간격으로 스친 그때였다.
쇄도해오는 찌르기를 새하얀 검신으로 흘린 칼리고의 검이 휘었다.
채찍도 아니고 진짜로 휘었을 리는 만무하지만 그렇게 보일 정도로 검이 기이한 궤적을 그렸다.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라온의 검을 타고 올라 손목을 휘감았다.
칼리고와 라온, 관객들과 하벤, 심지어는 루멘에게조차 그렇게 보였다.
‘저 녀석이 저걸 어떻게······.’
회귀 전에도 칼리고는 곧잘 루멘의 검술을 흉내 내고는 했었다.
선택받은 용사니까.
재능의 깊이를 알 수 없으니 그럴 수 있다며 애써 넘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회귀하고 나서 저 기술을 본 사람은 지난해 가을에 루멘에게 죽은 도적 두목뿐이다.
‘역시 칼리고도 모종의 기적을 받은 게 분명해. 아직도 카르마를 개방하지 못한 걸 보면 같은 종류의 기적은 아닌 것 같지만.’
어떤 형태로든 자신과 연관이 있는 게 분명하다.
의심과 함께 눈매를 좁힌 루멘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만에 하나 마을에 위험이 닥쳐오리라는 걸 알고도 방치한 거라면······.’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더욱 고통스럽게 죽이리라.
긴 검이 달린 건틀릿, 파타를 낀 오른팔이 먼저 달린 다음 목이 날아간 라온의 몸이 고꾸라졌다.
머리 없는 목이 콸콸 쏟아내는 피가 차디찬 경기장 바닥을 적셨다.
“스, 승자! 검은 단두대 칼리고!”
돈을 잃은 8할의 탄식과 함께 종이 딱지가 흩날리는 가운데, 돈을 딴 일부의 환호성이 뜨겁게 울렸다.
가장 큰 이득을 봤음에도 루멘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라온의 머리를 들고서 승리를 만끽하는 칼리고를 노려보며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
항구도시 세론에 머무는 닷새는 하벤에게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함께 지낸 지도 곧 1년이니까.
루멘이 영특한 거야 익히 알고 있었으나 새삼스레 와닿는 방대한 지식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족히 20년은 세상을 떠돌며 다양한 경험을 한 듯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며칠 전에 스치듯 이야기했었던 스톰팽의 쌍검의 쓰임새였다.
“숙적까지는 아니어도 스톰팽은 로스우드 공작과 악연이 꽤 깊다는 것 같아.”
지하 경매장으로 향하는 수많은 통로 중 하나를 걸으며 루멘이 말했다.
“소년병 징집을 비롯한 여러 문제 때문에 대놓고 달라고는 못 하니까 자진해서 헌상해주길 바랄 거야.”
“그러니 모조품을 만들어 넘기겠다? 그걸 위해 가장 실력 좋은 대장장이를 찾아 똑같이 만들어달라 부탁한 거고?”
“제국 유일의 항구도시는 여러 산업이 필연적으로 발달하기 마련이잖아. 분명 감쪽같이 만들어줄 거야.”
“겉모습은 그럴지 몰라도 알맹이가 아예 다르잖아.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어둑한 통로에서 루멘이 든 랜턴은 유일한 빛이었다.
깊숙이 들어갈수록 빛은 작아졌고, 끝에 이르러서는 반딧불이처럼 되었다.
“괜찮아. 겉모습만 똑같이 만들어주면 안 들킬 자신 있어.”
“내가 무슨 수로 너를 말리겠냐? 이 물욕의 화신아.”
마지막 모퉁이를 돌자 환한 빛이 확 들어왔다.
양쪽 벽면에는 횃불이 줄지어있었으며, 그 끝에는 나무에 쇠를 덧댄 문이 있었다.
앞을 지키는 사내에게 투기장의 챔피언 메달을 보이자 순순히 문을 열어주었다.
“오······.”
전체적으로 어두우나 사물을 분간하고도 남을 빛이 은은하게 깔린 지하 경매장은 기묘한 공간이었다.
중앙에 난 계단은 경매품을 소개하는 무대로 이어졌으며, 계단의 양옆으로는 좌석이 반원을 그리듯 층마다 늘어서 있었다.
무대 앞에서 중간까지는 만석이었기에 루멘은 일행과 함께 맨 뒤에 자리를 잡았다.
하얀 천을 깐 나무 의자 위에는 가면과 망원경, 번호가 새겨진 나무 패들이 놓여있었다.
얼굴 전체를 덮는 새하얀 전면 가면은 표정이 각양각색이었기에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오늘 이렇게 귀한 걸음들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인사가 너무 길면 재미없죠? 바로 첫 번째 물건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마법으로 증폭된 경매사의 목소리가 뒷좌석까지 닿았다.
무대에 고루 퍼져있던 조명이 한곳에 집중되었다.
거치대 위에 놓인 펜던트가 서늘한 은빛을 발했다.
“무차별적인 살인으로 제국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희대의 살인마, 외팔이 숀의 펜던트입니다! 인간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겼던 숀이 자기 목숨보다 아꼈다고 전해지죠! 200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피와 공포, 범죄의 역사가 어린 악취미적인 물건이지만 대다수가 수집욕을 드러냈다.
희소성에 취해 상징성을 장식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게 수집광이라는 족속들이니까.
경매가는 순식간에 900골드까지 올라갔다.
하벤과 칼리고가 제정신들이 아니라며 혀를 찬 그때였다.
“910골드! 910골드 나왔습니다!”
루멘이 나무 패들을 들었다.
하벤과 칼리고가 고개를 홱 돌렸다.
“어······ 합리적인 소비인 거지? 그렇지?”
“합리적인 소비는 개뿔. 돈 좀 생기니까 충동적으로 지르고 보는 거지. 이래서 네가 안 된다는 거야, 잘못 만들어진 새끼야.”
역시 칼리고는 회귀한 게 아니다.
그리 생각하며 루멘은 경매를 이어갔다.
2천 골드를 돌파하자 대부분이 포기하고 루멘과 다른 한 명만이 남았다.
다른 한 명은 검은 모자와 베일로 머리와 얼굴을 감췄으며, 귀부인들이 선호하는 펑퍼짐한 디자인의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좌석이 꽤 떨어져 있었음에도 시력이 좋은 루멘에게는 거뭇하게 변색된 왼쪽 손톱과 오른팔 소매의 헐렁함까지 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기어코 2천7백 골드를 주고 낙찰받은 루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미치려면 곱게 미쳐야 한다며 혀를 차대는 칼리고의 입을 틀어막으며 루멘은 경매에 집중했다.
불꽃 문양이 돋보이는 정체 모를 알.
몸통에 순록 그림이 아로새겨진 손잡이가 황금인 단검.
드레이크의 피.
은빛 맨드레이크.
모두 낙찰받는데 거금을 썼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때가 오면 값어치 이상을 하고도 남을 테니까.
알과 단검은 특히나.
“마지막 물건은 무려! 지금은 잃어버린 기술로 분류되는 연금술이 융성했던 옛 왕국 시절의 유산! 잃어버린 기술의 정수가 담긴 아이템! 여러분 모두가 이걸 손에 넣기 위해 이번 경매에 참여했대도 과언이 아닌 세상에 하나뿐인 보물!”
조명이 일제히 꺼지며 무대 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경매사도, 마지막 물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진행하는 목소리만큼은 뚜렷했다.
“그 가치를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기적을 쓰는 펜, ‘이니시에르’입니다!”
곧이어 조명이 일제히 들어왔다.
잠시간 동안 무대 위에는 사소한 변화가 일어났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거치대 위에 전시된 물건이 바뀌었다는 사실이리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손에 넣으리라 루멘이 다짐했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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