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화: 폐광
【 강원도 태백시 인근 20킬로미터 폐광에 청운그룹 비밀 금고가 있습니다. 】
응? 폐광? 청운그룹?
청운그룹 박기영 회장?
아들 박재민이 성 추문에 휘말리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네메시스를 고용, 폭로하려던 성 추문과 불법 마약 파티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기자를 암살한 사람이다.
그런데 오히려 박기영과 박재민은 사냥개인 네메시스 양철주에게 살해를 당했었지.
이게 왜 갑자기 지금 나타나지?
어디 보자, 조사를 좀 해볼까?
아, 이거 때문인가?
청운그룹이 폐광사업을 추진했었네.
폐광사업은 더 이상 경제적으로 채굴이 불가능하거나 안전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된 광산을 대상으로 하는 재개발 또는 활용 사업을 의미한다.
지역 경제 활성화와 환경 복원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아 그룹 이미지를 아주 나이스하게 탈바꿈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박기영 회장 목적은 따로 있었겠지.
껍데기만 폐광사업일뿐, 이미지 세탁만 하며 지지부진하게 끄는 거지.
한참 지나 아무도 관심두지 않게 되자, 그제서야 몰래 비밀 아지트를 만든 거로군.
일단 탐사를 해봐야겠다.
**
태백시 인근 20킬로미터 지점.
50대 아저씨로 변장한 채, 차를 몰고 서서히 다가가는 수혁.
주위를 둘러싼 거친 언덕은 가파르고 울퉁불퉁하다.
드문드문한 풀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한때 산업 중심지였던 이곳의 쇠락을 상징하고 있다.
폐광 중앙에는 낡은 철골 구조물들이 여전히 서 있다.
녹슨 강철 기둥과 부서진 컨베이어 벨트가 곳곳에서 무너져 내린 상태다.
채굴 타워는 거의 무너져가고 있다.
균열이 생긴 기둥과 금이 간 벽들이 이곳의 오랜 폐쇄를 말해준다.
지면은 황량하고 메마른 채 석탄 먼지와 잔해들로 뒤덮여 있다.
여기저기 깨진 기계 부품들과 버려진 장비들이 널려 있다.
잡초가 자란 옛 철로가 남아 있어 한때 이곳에서 석탄이 실려 나갔을 광경이 떠오른다.
광산 터널 입구는 부분적으로 무너진 상태.
그 너머로 어둡고 깊은 터널이 드리워져 있다.
하늘은 구름이 가득 찬 회색빛,
음울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오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완전히 잊힌 공간이 되어버린 듯하다.
이런 황량함이 수만평에 걸쳐 널려 있으니,
GPS 홀로그램과 목소리가 아니라면 찾을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 200미터 직진한 후, 우회전하여 100미터 직진, 다시 좌회전하여 50미터 앞에 있는 터널입니다. 】
터널 입구는 낡은 콘크리트로 덮여 있고,
주변에는 오래된 철문과 녹슨 철사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수혁은 조심스레 발을 들여놓았다.
지하의 냉기가 피부에 닿으며, 공기는 점점 더 서늘해진다.
터널 천장에는 낡은 조명들이 간헐적으로 깜빡거리고 있고, 이따금씩 먼지들이 떨어진다.
"이야, 아직도 조명들을 살려 놨네? GPS덕분에 이런 데를 와보게 되는구나...."
손을 뻗으며 조심스럽게 GPS 홀로그램을 따라 터널 안쪽으로 더 깊이 걸어 들어갔다.
터널 벽에는 흐릿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고, 바닥에는 녹슨 철로가 일부 남아 있다.
수십 년 전 이곳을 지배했던 산업적 흔적들이 수혁의 시야에 스쳐 지나간다.
응? 설치할 건 또 이거저거 설치해놨네.
불규칙하게 뚫린 벽과 그 안에 숨어 있는 은밀한 감시 카메라.
박기영과 박재민이 죽었으니, 저걸 누가 보고 있을까?
그래도 일단 무력화는 시켜야겠지?
터널은 끝없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GPS 홀로그램은 점차 특정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미로를 따라 한참을 더 들어가니, 벽에 설치된 철문이 눈앞에 나타난다.
단단하게 잠겨 있다.
손으로 근처를 뒤적거리니, 바위 틈에 숨어 있는 전자 장치가 나타난다.
특수 장비로 해제해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며 안쪽에 숨겨져 있던 더 깊은 터널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광산이 아니다.
벽과 천정과 바닥의 재질이 다르다.
설령 터널이 붕괴되어도 온전히 남아있을 것으로 느껴진다.
철저하게 비밀스러운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랄까?
터널을 따라가다 보니, 정교한 보안 시스템이 설치된 게 눈에 들어온다.
레이저 감지기가 터널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별 의미도 없을 걸로 보이지만, 이것도 장비를 꺼내 무력화.
드디어 나타난 금고들.
벽에는 거대한 금고들이 빽빽이 배치되어 있다.
강력한 잠금장치를 하나하나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이야, 박기영이 대한민국 현금왕인가?
너무 많아서 이거, 옮기지도 못하겠는데?
대충 2천억 정도 될려나?
100달러짜리 외화가 더 많아 보인다.
무기명 채권이 3천억에,
차명 계좌가 천억에,
해외 비밀계좌가 15억 달러.
사업은 뒷전이고 비자금이 우선이었나?
뭘 어디에 얼마나 대단한 아방궁을 짓고 천년만년 살겠다고 이렇게까지 축적해둔 것일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아~오! 현금 옮기는 게 역대급으로 힘들겠는데?
트럭을 가져와야겠다.
**
박기영 회장과 아들 박재민이 죽고 난 후, 청운그룹의 경영권은 혼란에 빠졌다.
이사들은 급하게 새로운 경영권 승계를 논의하기 위해 수시로 모임을 가졌고,
막바지 즈음에 이르렀을 때 박기영 사촌동생인 박민수가 등장했다.
박민수는 2년 전 청운물산 대표이사로 재직하던 시절,
거액의 비자금을 빼돌리다 발각되어 박기영 회장에게 쫓겨난 인물이다.
그룹 내에서 경영 능력은 없으면서 성격이 더럽기로 악명 높았던 그가 돌아오자 이사들은 황당한 긴장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박민수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이사들 앞에 섰다.
눈빛에는 이미 권력에 대한 욕망이 가득하다.
박기영이 죽자마자 기회를 잡기 위해 서둘러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자, 이사님들. 이제 내가 그룹을 책임져야 할 때가 온 것 같네요. 형님인 박회장님도 안 계시고, 재민이도 없으니... 누가 나서야 하겠습니까?"
이사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박민수를 쳐다본다.
그룹 내에서 악명이 자자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를 막을 방법이 없다.
그나마 용감한 이현태 이사가 나섰다.
"박민수 대표님, 회장님께서 예전에··· 그 문제로 인해 그룹에서 퇴출시키셨지 않습니까? 이 상황에서 다시 경영권을 맡는 건..."
"퇴출? 무슨 그런 돼먹지 않은 용어를 함부로 지껄이나? 그건 형님의 일방적인 결정이었지!! 난 잘못한 게 없어! 그리고, 이 그룹을 살려낼 사람은 나뿐이야. 나 아니면, 더 큰 문제가 터지고 말 거라고~!!!"
박민수는 오랫동안 청운그룹에 근무하며 내부 사정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다.
과거에 비자금을 빼돌리다 발각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룹의 움직임을 주시해왔다.
형님과 재민이가 죽은 지금, 박민수에겐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기회가 도래한 것이다.
"이 그룹을 누구에게 맡기겠나? 나만큼 이 그룹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은 없어. 형님이 나를 내쫓을 때,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이사님들도 잘 알지 않나? 나에게 다시 그룹의 미래를 맡기면, 한 번 더 도약시킬 수 있다고요."
이사들은 아~주~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박민수는 과거의 더러운 기록에도 불구하고, 청운그룹을 이끌어갈 적임자가 자신이라 주장하며 이사들을 끊임없이 설득하는 중이다.
너희들이 안 넘어가면 어떡할 건데?
다른 대안도 없지 않아?
끝까지 반대하면 당신들 모가지가 먼저 날아갈걸?
**
박민수가 경영권을 승계받은 후, 가장 큰 관심은 비자금이다.
분명히 형님이 감춰둔 거액의 비자금이 있을텐데, 아무리 은밀하게 조사를 해도 그걸 아는 사람이 없다.
못해도 2조원 이상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공식적인 재산 말고는 드러나는 게 없으니 환장하고 팔딱 뛸 일이다.
사냥개를 고용해 은밀하게 비자금 행방에 대해 추적하도록 준비를 하기로 했다.
일단은 과거의 방식대로 다시 비자금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청운그룹 핵심 사업들을 장악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몰두했다.
더러운 성격은 여전했고, 청운그룹은 박민수 손아귀에서 점점 더 불법적인 방법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청운그룹은 전적으로 내 방식대로 운영될 거다. 더러운 방법이라도 돈을 벌 수 있다면 상관없어. 청운그룹은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을 거야. 흐흐흐."
**
그러던 차에 사냥개가 비자금에 관련된 소식을 가져왔다.
박기영 회장 오른팔인 황준식 비서실장이 뭔가를 알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은 퇴직하고 뒷전으로 물러난 사람이다.
박민수는 시내 모처에서 황준식을 은밀히 만났다.
"오랜만이군, 황 실장. 자네가 형님의 비자금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 그래서 부르지 않을 수 없었지."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이 새삼스럽게 뭐 그리 중요한가요? 이제 전 퇴직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 일에서 손을 뗀 지 오래지요."
"퇴직했어도 기억은 남아있겠지. 자네가 박 회장 오른팔로 있을 때 어떤 일을 처리했는지 다 알고 있는데?! 중요한 건 지금 자네가 그 정보를 내놓느냐, 아니면... 감추고 묻히느냐야. 선택을 하게."
"비자금에 대해선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는 법입니다. 특히 그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누가 관리했는지 말이죠."
"그건 이미 다 알고 있어. 하지만 어디로 흘러갔는지는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내가 원하는 건 아주 간단해. 비자금이 숨겨진 장소. 그거만 알면 끝이야."
“그렇다면, 제게도 떡고물이 떨어져야 하지 않겠어요? 무려 2조원 이상이 걸린 중요한 정보 아닙니까?”
“음,, 거 참, 지금까지 내게 이야기해 주지 않은 것도 괘씸한데,, 그래, 뭐. 그렇게 하지. 중요한 정보임이 확인되면 5백억을 현금으로 주겠네.”
“계약금으로 차명 계좌에 백억, 비자금을 발견하면 추가로 4백억으로 하시죠.”
“하하하, 은퇴하더니 노욕이 과해졌나? 아니면 노후를 생각하는 건가? 알겠네. 차명 계좌 불러보게. 곧바로 입금하지.”
··· 잠시후, 입금을 확인한 황준식이 말을 이어간다.
"박 회장님은 여러 곳에 분산시켰죠. 국내외에 비밀 계좌를 분산시키고, 안전한 장소에 현금과 비밀 계좌 정보 같은 서류들을 숨겨놨어요. 태백시 근처에 있는 폐광 터널에 감춰져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곳 상황은 제가 잘..."
"음,, 그때 추진했던 폐광사업의 실체가 그거야? 흐흐. 능구렁이 영감탱이 같으니. 지금 그곳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중요치 않아. 거기에 비자금이 있다는 게 중요하지."
“그러면 저랑 단 둘이서 은밀히 가시지요. 거기 터널 구조가 복잡해서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가 장비들을 챙길 시간이 필요하니, 내일 아침 8시에 여기서 뵙지요.”
**
“이야, 이렇게 황량하면서도 멋진 곳에 감춰둔 거야? 형님도 Old School 임에 틀림없구만. 낭만적이야. 하하하.”
“박 회장님 스타일 아시잖아요? 그래서 저도 이거 작업하느라 힘들었습니다.”
박민수는 희열에 넘쳐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다.
드디어 2조원이 넘는 비자금이 자신의 손아귀에 굴러들어온다.
기대하지도 않고 포기하려 했던 돈이다.
근데, 사냥개를 고용한 게 신의 한 수였다.
황준식이 순순히 협조해 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이렇게 자신의 인생이 새롭게 장미꽃처럼 피어나는 건가?
하지만, 그런 희열이 오래 지속되기는 어려웠다.
텅! 터~어~엉! 터~엉!
금고들마다 모조리 텅텅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왜 아무것도 없는 거야. 이런 규모의 금고들이면 못해도 수천억의 현금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엥? 그러게요. 이게 어찌된 일인지···”
오히려 당황한 사람은 황준식.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한달 전만 해도 여기 버젓이 2천억이나 되는 현금이랑 무기명 채권이랑 차명계좌 자료들이 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죠?”
“아니,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이거,, 자네가 몰래 빼돌리고 시치미뗀 거 아냐?”
“아니, 그럴리가 있습니까? 그럴거면 제가 여기 있겠어요? 진작에 해외 어딘가로 튀었죠.”
“하긴, 뭐. 그나저나 이거 어떡하지? 아,, 씨팔,, 어쩐지 잘 풀린다 했더라니,, 어떤 자식들이 선수를 친거야? 자네 말고 누가 또 여길 알고 있는 거 아냐? 사냥개를 고용해서 비자금을 추적하게 해야겠는데.”
“네, 그렇게 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몇 명은 여길 알고 있죠.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너무 큰 돈이죠. 제가 잘 아는 에이스 녀석이 있으니 즉각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대신에 보상금을 총액의 10퍼센트로 올려주시죠?”
“뭐? 10퍼센트? 하하. 이 친구, 갈수록 욕심이 늘어나는구만.. 쓰~읍. 알았네. 그렇게 하지. 성공만 시켜주게.”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로 희망고문을 하며, 두 사람은 금고가 있는 곳을 빠져나와 터널을 걷고 있는 중이다.
콰~광! 펑! 콰~아~아~앙! 그~르~릉~!!!
난데없이 터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억! 허~걱! 으~아~악!!!!
두 사람은 속절없이 무너지는 돌더미 아래 그대로 묻혀버렸다.
오랜 세월 동안 아무일 없던 터널이 이 순간에 무너지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먼지만 가득한 채, 터널은 다시 고요 속으로 파묻혔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선작 꾸~욱~!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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